必死 筆寫 324

꽃놀이패 / 권수진

꽃놀이패 / 권수진 . . 너에게 승부를 거는 동안 늘 우아한 자태를 뽐내려고 노력했지만 당신 앞에 추악한 내 모습을 들킨 적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 범사에 감사한 마음으로 꽃잎 띄운 술잔을 정중히 건넸으나 당신은 한 번도 속마음을 밖으로 드러낸 적 없었다 . 당신을 만나 당신의 터전 위에 뿌리내리고 집을 짓고 사는 동안 웃는 날보다 싸운 날들이 더 많았다 . 길 위에서 낭창대는 삶을 살았으니 그동안 당신 마음 어디에 두고 있었는지 감히 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 긴 세월 돌아보면 모든 게 일장춘몽이었으니 더는 사랑이라 부르지도 않겠다 . 고립무원의 꽃 진 자리는 항상 내 몫인지라 간밤에 우수수 떨어진 바둑돌 낭자하고 패를 뒤집듯 밤새도록 이불을 뒤척인다 . 하루를 천년같이 고뇌하며 살았으나 대마가 ..

必死 筆寫 2023.09.01

깨부수기/임지은

남편은 벽을 바라봤다 벽 속에 뭐가 있나요? 벽 속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남편은 저녁도 먹지 않고 주말 영화를 시청하듯 벽을 바라봤다 여보, 오늘은 월요일이잖아요 그는 이제 벽 속에서 내일을 보고 있다고 했다 잠도 자지 않고 벽을 바라보던 남편은 벽에 기대었다 그의 입술이 살짝 벽에 닿았다 대체 무슨 맛이죠? 그는 벽 안쪽의 깊은 고독이 느껴진다고 햇다 깜빡 잠이 든 내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남편이 벽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흐름이 조금 밀리고 그는 벽의 일부가 되었다 뺨일 거라고 만진 곳은 엉덩이고 진심이라고 만진 부분은 주로 거짓인 벽 나는 벽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었다 망치를 들고 와 깨부수기 시작했다 벽이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발견되지 않았다 튀어나온 못..

必死 筆寫 2023.05.08

새와 의자/송찬호

그 의자가 만들어지기 전 나무였을 때 가지에 날아와 앉던 어떤 새를 의자는 기억하고 있다 ​ 새벽을 깨우며 지저귀던 깃털에 찬 이슬이 묻어있던 꽁지 짧은 어떤 새를 잊지 않고 있다 의자라는 직업을 갖기 전 의자라는 형벌의 정물로 만들어지기 전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21년 가을호 ------------------ 송찬호 / 1959년 충북 보은 출생.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10년 동안의 빈 의자』『붉은 눈, 동백』『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분홍 나막신』 등

必死 筆寫 2023.05.08

버드나무와 오리/남현지

여름을 좋아합니다 야구를 좋아합니다 아마도 늙어가고 있습니다 집 앞 개천을 따라서 바람이 두드리는 이파리들은 자신을 반복하며 가볍게 흩날리고 그것이 오락은 아니지만 물에서 오리를 반복해보는 일 오리의 웃음을 기다리면서 늙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놓쳐버린 순간의 현기증처럼 햇빛 아래를 구부리며 그 빛을 내버려두듯이 다리를 건너면 약국과 시장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월간 《現代文學》 2021년 12월호 ------------------- 남현지 / 1977년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2021년《창작과비평》신인상 당선.

必死 筆寫 2023.05.08

달이 떠오를 때까지 / 서연우

달이 떠오를 때까지 / 서연우 달은 살아 있다 살아, 떠오를 곳을 향해 멍석을 펼친다 상을 놓고 병풍을 세우고 떡을 놓고 포를 올리고 촛대를 놓고 초를 꽂고 향을 피운다 달은 살아 있다 살아, 바람이 지운 촛불에 종이컵을 씌우고 초헌관이 오르고 아헌관이 오르고 종헌관이 오르고 고축을 한다 차례차례 잔을 올리고 절을 하고 잔을 올리고 절을 한다 달은 살아 있다 살아, 통술거리 어디든 기타를 메고 나타나 신청곡도 부르고 부르고 싶은 곡도 부르고 손님이 팁을 주면 주는 대로 안 주면 안 주는 대로 노래하던 악사 원형이 간암으로 입원을 하고 성미예술촌 천 여사는 마음이 휘어져 멍석 앞에서 머뭇 머뭇거리다 간절히 아주 간절히 절을 하고 절을 한다 달은 살아 있다 살아, 다시 악사가 되어 돌아오기를 바라는 봉투를 ..

必死 筆寫 2022.08.23

무량 외 4편/전영관

무량 봄비 속살거리고 안개까지 자욱해 아슴아슴 젖어드는데 화엄사 가자하네 기가 센 곳이라 일주문부터 쭈뼛했었지 만발하는 흑매가 보통 귀신은 아니다 싶어 벽사 삼아 마들가리를 주워왔었지 입에만 담아도 무거운 화엄보다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당신에게 간질밥 먹여도 될 것 같은 부여 무량사를 고집부리네 사미*처럼 파르래한 눈웃음도 무례는 아니고 석탑을 데우는 볕처럼 무량하고 사무치는 봄날이라 전생부터 이생의 우환들을 널어놓고 싶네 극락전 처마선이 당신 플레어스커트만큼 황홀하다고 너스레 떨어놓고는 딴청부리겠네 배롱나무 아래 골똘한 당신은 뒤꿈치에 자운영 보랏빛을 묻혀오겠지 쿡, 쿡 옆구리 찌르며 천치처럼 웃으려고 내 팔꿈치에 복사꽃 연분홍을 바르고 싶네 꿀 발라 경단을 빚듯 벌들이 잉잉거려서 물색없이 마른침을 삼..

必死 筆寫 2022.07.14

산 사람은 살아야지(외 1편) / 조 정

그때 산에 간 사람들이 거지반 죽었다든디 떼보 각시는 살어있다는 말 있대 자네도 들었능가? 살았재 성님도 들으셌구만 떼보네 식구들 토벌 때 다 죽고 떼보 각시만 포로가 되야가꼬 자응 갱찰서에 잽해 있다가 뭔 사연인가 토벌 갱찰하고 살게 되얐다대요 그래이 사람 일을 알 수 없어이 즈그 서방 자석 죽인 웬순디 그 사나그랑 살 수도 있으까 아이고 성님 좋아서만 산다요 양님네 아짐이 아들 혼수 헐라고 광주 갔다가 장바닥서 잘팍 부닥쳤다능거여 입성은 깨꼼허니 갠찬한디 아짐을 보고 낯바닥이 노라니 밴함서 주저앉을락 하드랑만 양님네 아짐은 인공 때 저짝 사람들 손에 서방님허고 시동상까지 다 학살 당했능가안 그때 떼보 각시가 여맹위원장 맡어가꼬 동네서 인공 노래 갈치고 그랄 땡께 오메 이 사람아 어째 이랑가 못 살 시..

必死 筆寫 2022.07.09

쓸쓸해서 하는 짓 (외 2편) / 진 란

네가 만일 오밤중에 음악을 권하고 피워 올릴 때 누군가 가만히 서랍을 열고 옛 사진들을 한 장씩 들여다보고 있다면 분명한 것은 아직은 멀쩡하다는 거야 네가 만일 푸른 숲으로 뛰어들었을 때 누군가 슬며시 렌즈를 당겨서 오후 다섯 시의 길어진 그림자들 뒤로 깔리는 황철나무 잎사귀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잡는다면 먼 곳의 바람들이 부르카를 뒤집어쓰고 기도를 훼방하는 미친 짓이었을지도 몰라 영원을 바라 아주 멀리 날으고 싶은 간절하고 쓸모없는 구름의 눈물과 반성이었을 거야 오래전 너에게 읽히지 못한 편지와 열망이 촛불에 온몸을 불사른 나방의 곁으로 어쩌다 무심히 떨어지는 촛농 한 방울이었을 거야 억지로 너를 흔들어 댓잎 떨어뜨린 후에 책갈피를 세차게 닫아버린 짓, 같은 그런 사랑 찬바람이 저미는 징검다리를 건너..

必死 筆寫 2022.07.09

솔밭길 (외 2편) / 유종인

찬 이별을 씹었다가도 솔밭길에 오르면 감초 달인 물에 목욕하고 온 바람이 내 귀를 적시네 잇바디가 노랗고 달구나 궂긴 이들 한두 번씩은 예서 이 솔바람 속에서 뺨이 나오고 이마가 반들하니 시큰한 콧등 분주한 콧김을 공중에 내어 서러운 기쁨도 눈을 반짝여 말없이 바라다 갈 것이구나 굽은 소나무 거칠거칠한 소나무 잔등을 어루어 미처 못 만져 준 그대를 대역했으니 내가 이 솔밭길을 거둔 뒤에도 소나무는 그대가 떠난 쪽으로 지향을 세웠네 그윽이 굽어 바라네 해를 감추고 구름이 흩어져도 솔바람에 물든 풍문을 서너 폭 문장의 두루마리 옷에 번져 입었으니 밤에 누우면 서늘하니 속옷이 울고 비 그친 솔수펑이가 내 가슴 늑골에 번져 와 추억의 피륙을 다시 짜듯 눈보라 속에 웃음이 태연한 내가 소나무와 짐짓 등을 맞대고 ..

必死 筆寫 2022.07.09

무량 (외 2편) / 전영관

봄비 속살거리고 안개까지 자욱해 아슴아슴 젖어드는데 화엄사 가자 하네 기가 센 곳이라 일주문부터 쭈뼛했었지 만발하는 흑매가 보통 귀신은 아니다 싶어 벽사 삼아 마들가리를 주워 왔었지 입에만 담아도 무거운 화엄보다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당신에게 간질밥 먹여도 될 것 같은 부여 무량사를 고집부리네 사미*처럼 파르래한 눈웃음도 무례는 아니고 석탑을 데우는 볕처럼 무량하고 사무치는 봄날이라 전생부터 이생의 우환들을 널어놓고 싶네 극락전 처마 선이 당신 플레어스커트만큼 황홀하다고 너스레 떨어놓고는 딴청 부리겠네 배롱나무 아래 골똘한 당신은 뒤꿈치에 자운영 보랏빛을 묻혀 오겠지 쿡, 쿡 옆구리 찌르며 천치처럼 웃으려고 내 팔꿈치에 복사꽃 연분홍을 바르고 싶네 꿀 발라 경단을 빚듯 벌들이 잉잉거려서 물색없이 마른침을..

必死 筆寫 2022.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