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435

루빈의 잔

루빈의 잔 박남희 너와 나 사이에 잔이 있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잔과 우리 사이에는 명암이 존재한다 누군가 잔에 무엇인가를 채우고 간다 잔을 볼 수 없고 우리만 보인다 명과 암, 전경과 배경의 이중성이 우리의 눈을 속이고 있다 우리를 버릴 때 잔은 보인다 잔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잔 속에 든 것은 우리의 것인가 잔은 캄캄하고 때로는 환하다 잔의 윤곽 속에 우리가 있다 우리를 자세히 보니 너와 나는 이목구비가 똑같다 너는 나이고 나는 너인가 너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거울이 존재하는가 잔 속에 가득 채워진 것은 거울인가 누군가 거울 속의 너를 시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나도 시인이 된다 누군가 너와 나의 윤곽을 보고 있다 잔의 이미지를 읽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소망하던 것은 잔인가..

시 모음 2021.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