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324

제라늄/이규리

제라늄/이규리 안에서는 밖을 생각하고 밖에서는 먼 곳을 더듬고 있으니 나는 당신을 모르는 게 맞습니다 비 맞으면서 아이는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어요 약속이라고,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물은 비를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나봐요 그런 은유라면 나는 당신을 몰랐다는 게 맞습니다 모르는 쪽으로 맘껏 가던 것들 밖이라는 원망 밖이라는 새소리 밖이라는 아집 밖이라는 강물 조금 먼저 당신을 놓아주었다면 덜 창피했을까요 비참의 자리에 대신 꽃을 둡니다 제라늄이 창가를 만들었다는 거 창가는 이유가 놓이는 곳이라는 거 말 안 해도 지키는 걸 약속이라 하지요 늦었지만 저녁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었으니 저녁에게 이르도록 하겠어요 여름, 비, 안개, 살냄새 화분을 들이며 덧문을 닫는 시간에 잠시 당신을 생각합니다 흔들림도 이젠..

必死 筆寫 2021.11.03

이혜미의 「원경」 감상 / 유희경

원경/이혜미 썰물 지는 파도에 발을 씻으며 먼 곳을 버리기로 했다. 사람은 빛에 물들고 색에 멍들지. 너는 닿을 수 없는 섬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미간을 좁히는구나. 시간은 누군가 쓰다 펼쳐둔 일기장 같아. 빛이 닿아 뒷면의 글자들이 얼핏 비쳐보이듯, 환한 꿈을 꺼내 밤을 비추면 숨겨두었던 약속들이 흘러나와 낯선 생이 문득 겹쳐온다고. 멀리, 생각의 남쪽까지 더 멀리. 소중한 것을 애써 가지려 하지 않는 잠시의 영원을 믿으면서. 섬 저편에 놓아두고 온 것들에게 미뤄왔던 대답을 선물했지. 구애 받는 것에 구애받지 않기로 했다. 몰아치는 파도 속이라도 소라껍질 안에는 지키고 싶은 바다가 있으니까. 잃어버리고 놓쳐버린 것들을 모래와 바다 사이에 묻어두어서…… 너는 해변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하나마다 마음을 맡기는..

必死 筆寫 2021.09.28

기형도의 「물 속의 사막」 평설 / 김현, 강인한, 고성만

물 속의 사막/기형도(1960~1989.3) 밤 세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 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

必死 筆寫 2021.09.28

그 집 앞/김 륭

그 집 앞/김 륭 내가 없으면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방 안에 파리나 모기 대신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집, 고양이는 십 년을 넘게 키웠지만 사람이 되지 않았다 집주인은 이미 죽었지만 죽었는지 모르는 손님들이 화장지나 식용유를 들고 문을 두드리는 집 꼬깃꼬깃 구겨져 뒹구는 유령의 그림자 몇 장을 세어보다가 돌아서는 집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너무 자주 나마저 나를 기다리지 않는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게임처럼 사랑을 즐기는 소년과 배달 음식처럼 사랑을 잘 받는 소녀들이 우글거리는 집으로 꾸며야지 그러려면 시를 써야지 사랑을 해야지 내가 없으면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니까 내가 시인이 되어야지 시가 오고 있다 시가 오면 봄은 와도 되고 안 와도 그만인 집 그러나 시를 쓰려면 당신이 필요한 집, 이사를 가기..

必死 筆寫 2021.09.23

173 폐쇄병동 (외 2편) ⸻달 / 승한

173 폐쇄병동⸻달 / 승한 (외 2편) 밤하늘에 해골이 떠 있다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나의 해골이 떠 있다 원효(元曉)도 아닌데 나는 저 해골바가지에 무슨 물을 담아 마실까 무슨 물을 담아 마셔야 감로수가 될까 좌선의 시간 무념의 시간 무상의 시간 강화유리창 밖으로 대오(大悟)가 떠가고 있다 차다 173 폐쇄병동 ⸺사라진 우물 볼우물이 참 예뻤지 끊임없이 분절음을 내뱉다가도 홍시 먹은 듯 웃을 때면 오른쪽 뺨에 고이는 볼우물이 참 예뻤지 그 볼우물 속에 두레박이 있었지 어릴 적, 그 두레박으로 공동우물에서 나는 달을 길어 먹었지 너를 길어 올렸지 헤어 보니 그믐달 어느 날 알 틈도 없이 사라져버린 우물, 새 샘물이 잘 솟으면 좋겠네 새 달도 잘 잠기면 좋겠네 173 폐쇄병동 ⸻쥐에게 옆구리를 뜯어 먹힌..

必死 筆寫 2021.08.31

초야(初夜)/전영관

초야(初夜) . 새색시 고요하시다 고요히 누워 화장 받으신다 . 백분(白粉)보다 화사한 신식 분이 홍매화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 한 겹 두 겹 처음 입는 예복으로 친친 감아도 한 말씀 없던 새색시 수줍은 듯 발그레한 얼굴에 멱목*을 덮는다 . 캄캄하게 기다리던 새신랑 옷고름 푸느라 역정 낼지 모르는데 염(殮)장이 속도 없이 올차게 삼베 매듭짓는다 . 우리 할머니 오늘 뒷산에 꾸며놓은 신방살림 가신다 . 요령소리 앞세운 꽃상여 타고 산비둘기 기웃거리는 할아버지 곁으로 돌아가신다 .

必死 筆寫 2021.04.21

비로소/이서화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글귀를 읽을 때마다 반드시 도달해야 할 그 어떤 곳이 있을 것 같다 그 비로소는 어떤 곳이며 어느 정도의 거리인가 비로소까지 도달하려면 어떤 일과 현상, 말미암을 지나고 또 오랜 기다림 끝에 도착할 것인가 팽팽하게 당겨졌던 고무줄이 저의 한계를 놓아버린 그곳 싱거운 개울이 기어이 만나고야 마는 짠물의 그 어리둥절한 곳일까 비로소는 지도도 없고 물어물어 갈 수도 없는 그런 방향 같은 곳일까 우리는 흘러가는 중이어서 알고 보면 모두 비로소, 그곳 비로소에 이미 와 있거나 무심히 지나쳤던 봄꽃, 그 봄꽃이 자라 한 알의 사과 속 벌레가 되고 풀숲에 버린 한 알의 사과는 아니었을까 비로소 사람을 거치거나 사람을 잃거나 했던 그 비로소를 만날 때마다 들었던 아득함의 위안을 또 떠올리는 것..

必死 筆寫 2021.04.2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외 1편)/김행숙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외 1편)/김행숙 내 기억이 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 사람처럼 내 기억이 내 팔을 늘리며 질질 끌고 다녔다, 빠른 걸음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촛불이 바람벽에다 키우는 그림자처럼 기시감이 무섭게 너울거렸다 사람보다 더 큰 사람그림자, 아카시아나무보다 더 큰 아카시아나무그림자 그러나 처음 보는 노인인데…… 힘이 세군, 내 기억이 벌써 노인을 만들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생각을 하는 누군가가 나를 돌보고 있었다 기억이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 마지막 여관 조금 전에 키를 반납하고 떠나는 손님을 봤는데 분명히, 당신은 그 손님과 짧은 작별인사까지 나눴는데 당신은 빈방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은 더 이상 빈방이..

必死 筆寫 2020.12.31

불량한 시/황정산

시가 불량해진다. 불온을 꿈꾸며 시를 써보지만 불량한 시만 자꾸 쓰게 된다. 시는 가치이고 의미이며 또한 가치 있는 의미라는 한 중견 시인의 한 마디에 내 시는 사상 불량한 시가 되고 시 쓰면 돈이 되냐는 집 사람의 딴죽에 품질 불량한 상품이 된다. 잘 빚어진 항아리처럼 존재로 아름답지 못하니 미학적 불량이고 나무를 키우거나 꽃을 피우지 못하니 생태적 불량이다. 칼과 불이 되지 못하고 민족이니 전통은 원래 내 시가 알 바 아니니 좌로도 우로도 정치적 불량이 되겠다. 말을 하면 짧은 바람이 되어 세상을 말리고 쓰인 글자는 모두 거친 모래가 되어 눈에 쓰리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안다, 실현된 불온은 선량이 되고 희망 없이 꿈꾼 불온은 불량이 된다는 것을. 불량하고 불량해서 불량할 수밖에 없는 시를 쓴다, ..

必死 筆寫 2020.12.1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외 1편)/김행숙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외 1편)/김행숙 내 기억이 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 사람처럼 내 기억이 내 팔을 늘리며 질질 끌고 다녔다, 빠른 걸음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촛불이 바람벽에다 키우는 그림자처럼 기시감이 무섭게 너울거렸다 사람보다 더 큰 사람그림자, 아카시아나무보다 더 큰 아카시아나무그림자 그러나 처음 보는 노인인데…… 힘이 세군, 내 기억이 벌써 노인을 만들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생각을 하는 누군가가 나를 돌보고 있었다 기억이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 마지막 여관 조금 전에 키를 반납하고 떠나는 손님을 봤는데 분명히, 당신은 그 손님과 짧은 작별인사까지 나눴는데 당신은 빈방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은 더 이상 빈방이..

必死 筆寫 2020.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