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324

폭설 카페 (외 2편)/전영관

폭설 카페 (외 2편)/전영관 북방으로 떠나기 맞춤인 날이다 눈송이를 헤아리는 당신에게 탁자에 흥건한 커피 향을 준비하라고 눈짓한다 솔개처럼 날아갈 생각을 했다 활공이란 허공을 미끄러지는 새들의 기법 눈 내리는 날의 생각들은 위험해도 푹신하다 나의 북방은 안온할 것 발정에 겨운 수컷 순록들이 뿔 부딪는 소리에 하르르 자작나무 가지의 설화(雪花)가 쏟아지는 곳 우리의 북방은 분주할 것 어둠 속으로 살금거리는 들짐승들 사이 어미 여우가 꼬리로 가만가만 젖먹이들 칭얼거림을 덮어 재우는 곳 당신은 아내여서 북방의 끼니를 예감하는지 눈빛 자욱하다 눈구경 하느라 창가에 서 있다가 순록에게 배운 듯 우쭐거리며 자리로 돌아온다 토끼나 쫓다가 도끼마저 잃어버린 나무꾼처럼 자발없이 웃어본다 장마 비 오는데 물 구경 가요 ..

必死 筆寫 2020.07.17

구현우] 드라이플라워 / 선유도 / 오로지 혼자 어두운

드라이플라워/구현우 백야 속에서 네가 반쯤 웃고 있었다 매혹적인 이미지 외설적인 향기 몽환적인 목소리 너의 모든 것을 훔치고 싶은 한순간이 있었다 아주 잠깐 너를 꽉 안아주었다 그것은 치사량의 사랑이었다 나는 네가 아름다운 채 살아있길 바란 적은 없었으나 아름다웠던 채 죽기를 바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선유도/구현우 창밖의 비를 좋아하지만 비에 젖는 건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 너에게 해주려고 한 얘기가 있어 선유도에서 만나자 선유도에는 오만 색으로 어지러운 화원이 있으니까 녹음된 빗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안정을 찾는 너에게 어울린다 믿는 풍경이 있어 혀끝이 둔감해지면 입안 가득 맥주를 머금고 어디에선가 이 통화가 계속되지 않는다고 네가 여길 때면 무음이 침묵과 다르다면 난치의 감정이라면 그건 바라지 않아도 ..

必死 筆寫 2020.07.17

어느새 뱀을/전동균

어느새 뱀을/전동균 이제 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에요 도둑들, 뚜쟁이들, 사기꾼들은 나를 친구라고 불러요 마른 나뭇잎의 선명한 무늬를 갖고 싶었죠 하루에 한 번쯤은 거짓 없는 눈으로 하늘을 열고 싶었어요 알아요, 알고 있어요, 나는 버려졌고 버려짐으로써 해방되었다는 것을 내가 가야할 곳은 이미 사라졌거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엄마 장례식날 고무줄 놀이하는 아이처럼 살래요 햇볕 한 줌 못 뿌리면서 꽃 한 송이 못 피우면서 어떻게 사랑을 노래할 수 있겠어요 내 안에 담긴 것, 내 곁에 있는 게 무엇인지 말하지 마세요 제발 거미줄에 걸린 벌레의 파닥거림, 아무리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속옷의 얼룩을 보는 게 나의 기쁨이니 어느새 뱀을 좋아하게 되었으니 -《현대시학》 2020년 5-6월호 전동균 경북 경주 출..

必死 筆寫 2020.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