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시 134

2021,중앙시조대상-손영희

고비, 사막 / 손영희 아버지, 간밤에 말이 죽었어요 그때 고삐를 놓은 건지 놓친 건지 쏟아진 햇살이 무거워 눈을 감았을 뿐 한 발 올라가면 두 발 미끄러지는 잿빛 모래언덕도 시간을 허물지 못해 이곳은 지평선이 가둔 미로의 감옥입니다 한세월 신기루만 쫓다가 허물어지는 사방이 길이며 사방이 절벽입니다 아버지, 간밤에 홀연히 제 말이 죽었어요

수상한 시 2021.12.25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나는 산사나무를 지나가고 / 조정인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나는 산사나무를 지나가고/조정인 지금은 산사나무가 희게 타오르는 때. 나여. 어딜 가시는지?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내가 나를 경유하는 중이네. 흰 터번을 쓴 어린 수행자 같은 산사나무 수피를 더듬는다. 내가 나를 더듬고 짚어보고 헤아려 보듯. 나는 재에 묻혀 움트는 감자의 눈, 움트는 염소의 뿔, 움트는 붉은 승냥이의 심장, 봄 나무가 내민 팥알만 한 새순, 겨울 끄트머리에 걸린 시샘달* 방금 운명한 망자의 움푹 꺼진 눈두덩, 생겨나고 저무는 것들 속에 눈뜨는 질문. 나여, 나는 어디로부터 나를 만나러 산사나무 하얗게 타오르는 이 별에 왔나? 어제 나는 스물일곱에 요절한 나를 조문하고 왔네. 꽃 같은 얼굴이 웃고 있는 영정 앞에 예를 갖추고 향을 피우고 한 송이 애도를 놓고 ..

수상한 시 2021.10.24

2021년 제21회 고산문학상 시부문 본상 수상작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김승희 친절한 사람 꼭 나를 속이는 것만 같아 친절한 사람은 피하고만 싶다 진실한 사람 내가 들킬 것만 같아 진실한 사람 앞에선 늘 불안하다 나는 친절하지도 진실하지도 못하다 속에 무엇이 있는지 본심을 모르는 사람은 무섭고 진심으로 오는 사람은 진실의 무게만큼 무겁다 변심을 하는 사람은 위험하고 변심이 너무 없는 사람도 박제… 아니다, 아니다, 다 아니다 차라리 빨리 나는 단무지나 베이컨이 되고 싶다 진심은 복잡하고 입체적인데 진심을 감당하기엔 내내 모가지가 꺾이는 아픔이 있다 내장과 자궁을 발라내고 단무지나 베이컨은 온몸이 조용한 진심이라고 한다면 진심은 한낱 고결한 사치다 말하자면 본심의 배신이자 돼지머리처럼 눌러놓은 꽃이다 프로이드의 박물관처럼 본심은 어둡고 원초적이..

수상한 시 2021.10.02

제11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작 - 진혜진

빗방울 랩소디 우산이 감옥이 될 때 예고도 없이 소나기가 쏟아진다 손잡이는 피하거나 피하지 못할 것에 잡혀있다 비를 펼치면 우산이 되지만 우산을 펼치면 감옥 귀고리 목걸이 발찌 팔찌에 수감된 몸, 쇠창살 소리가 난다 소나기 속의 소나기 나만 흠뻑 젖는다 보도블록 위에서 이질감이 된 빗방울, 절반은 나의 울음 나머진 땅의 심장에 커다란 구멍을 낼 것이다 버스정류장 앞 넘치는 웅덩이가 막차를 기다리는 새벽 2시의 속수무책과 만나 서로의 발목을 확인한다 빗방울 여러분! 심장이 없고 웃기만 하는 물의 가면을 벗기시겠습니까 젖어서 만신창이가 된 표정을 바라만 보아도 되겠습니까 어떤 상실은 끝보다 시작이 더 아프다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끝이 날까 검은 우산과 정차하지 않는 버스 바퀴와 폭우가 만들어 내는 피날레 밑..

수상한 시 2021.08.31

제11회 시산맥작품상 수상작 - 김희준

루루와 나나/김희준 가위를 쥐어 봐요 우리는 유전자가 편집된 채 태어난 최초의 쌍둥이 에이즈에 걸리지 않는 미래형 맞춤 아기예요 말랑한 윤리를 만지는 모순된 인류 미래의 심장입니다 크리스퍼 베이비CRISPR BABY 바코드를 파란 엉덩이에 붙여도 좋겠습니다 어쩌다가 만들어졌어 루루는 득을 따지지만 나나는 우연이라 하지 8월은 어쩌다가 포도에게 빚을 져서는 여름을 담보한 과일이 속절없이 투명해져 가 루루, 무례한 씨를 가졌구나 당도 높은 태양이 바구니에서 후숙되는 중이야 다음 생은 입 없는 하루살이가 좋겠어 평생 말을 연습하다가 끝내 소리할 수 없는 계절을 삼키다가 당신 이름이 유언이 되는 비루한 알몸이면 좋겠어 나나, 과일을 조심해야 해 파란 혈맥을 가진 여름을 함부로 만지는 건 위험해 태양이 파과하고 ..

수상한 시 2021.08.31

제16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작품- 무서운 꽃 외 4편/오늘

무서운 꽃 사랑하는 빨간 의자가 죽었다 휘청거리는 나무와 서서 바라만 보는 너와 너무하다고 하는 나, 접힌 페이지의 중간부터 불의 상징을 지나는 중이야 그러므로 나는 목각인형이야 한껏 줄을 비튼다고 해서 그게 춤이 되겠어 슬픔에 비트가 붙으면 더 빠르게 몸을 훑는데, 미는 힘이 부족해서 서로에게 갇혀 있나 봐 어쩌다 그늘을 열면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내가 보일 거야 내 낡은 손목을 기억하니? 자꾸만 엉키는 영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첫 페이지에 앉아서 빗줄기를 긋고 싶은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래 지상으로 묶인 줄이 풀리면 재빠르게 공중으로 사라지는 꽃의 사람들 어제는 목련의 줄이 풀렸고 오늘은 장미의 줄이 느슨해지고 있지 내 향을 기억하니 너의 하루에서 지우고 싶은 것이 뭐야 내 몸에 단물이 배어 있을 때..

수상한 시 2021.08.31

질마재문학상-김추인

오브제를 사랑한 / 김추인 -매혹을 소묘하다 바람을 지운다 소리를 지운다 창을 설핏 열어 빛을 소환한다 하오의 잔광이다 동쪽 문은 유리의 캠버스 물의 입자들이 캠버스 위에서 응결되는 중이고 보얗게 채색되는 중이고 무거워진 몇 개 물방울들 중력 쪽으로 가파르게 하강하며 긴 발자국을 남긴다 물의 족적 물의 붓질 캠버스 위 몇 개의 길고 투명한 금줄들은 스크레치 기법일 것이다 샤워실에선 더 촘촘해 진 김, 아지랑이 시계 소리는 화면 밖에서 똑딱이게 두어라 소녀가 뭍에서 오고 있으니 젖은 살내, *쪽으로 쏠리는 펄럭이는 후각들 팔 하나가 불쑥 액자 속으로 들어가 몸을 반쯤 가린 무명 타올을 벗겨내며 빛을 조금 더 불러 앉힌다 전라의 소녀 어디선가 휘리릭 ~날아오는 입바람 소리들 아니다 역시 셀렘은 은밀하고 순연..

수상한 시 2020.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