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324

호우 /안희연​​

호우 /안희연​​ 방 안으로 새가 날아들었다 문이 열려 있지 않은데 여긴 어떻게 들어왔을까 창문을 열고 새를 날려 보낸다 ​ 방 안에 새가 들어와 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문은 열려 있지 않은데 ​ 새의 눈을 들여다본다 사람 손을 많이 탄 것 같다 ​ 이것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 태양이 태양을 삼켜 자멸하고 멈추지 않는 비가 내리고 매일 조금씩 떠내려가는 방 안으로 ​ 새 한마리가 날아들고 날려 보내도 기어이 되돌아오고 더듬더듬 그 새를 살피고 이름이 필요해졌다는 이야기 ​ 이름이라니, 우리는 정말 멀리 와버린 것이다 ​ 닫힌 문 안으로 쉴 새 없이 비가 들이치고 목은 자꾸 휘어지려고만 하고 언젠가 이 새가 나를 포기하는 순간이 올까봐 ​ 가망이라는 말을 뒤돌아본다 비가 와도 울지 않는다

必死 筆寫 2022.04.16

빗방울 쪼개기/박연준

침대 아래에서 나는 짐승이었다가 접힌 우산이 된다 침대 아래에서 나는 세상을 두드리는 해파리였다가 찢어진 우산이 된다 지나가는 하마가 하염없이 하염없이 하품을 하고 침대 아래에서 나는 고양이가 떨군 수염이었다가 펼쳐진 우산이 된다 우산이 아닌데 나는 자꾸만 우산이 되고 그것은 나 아닌 나의 탄생 우산을 사세요 다 살아 본 우산을 사가세요 오랫동안 나는 펼쳐진 침대를 접으려 애썼다 침대 아래에서 —사이버문학광장《문장웹진》 2022년 4월호 --------------------- 박연준 / 1980년 서울 출생. 2004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

必死 筆寫 2022.04.15

가난에 대하여/김승희

가난에 대하여/김승희 가난은 전깃줄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반쯤 감전된 검은 까마귀들이거나 신문지로 덮어놓은 밥상 구타와 악다구니와 꽃밭 앞에 나동그라지는 세숫대야 천지는 인자하지 않단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 하나 병들어서 어느 날 밤에 누군가는 생을 떠나고 아침 골목에 내놓은 연탄재 구멍 속에 누군가 파란 손목 두 개를 꽂아 놓았네 가난은 폭삭 끊어진 계단 계단이 없으면 천사도 안 오고 약장사도 안 오고 돈도 안 오고 밤새 눈 내려 얼어붙은 빙판길에 압정같이 떨어진 별빛들 가난은 압정 같은 별빛을 밟고 걸었다 슬픔은 휘발되지 않더라 슬픔은 가라앉아 벽돌이 되기도 하더라 그 벽돌이 몸을 이기기도 하더라 벽돌 한 장만한 마당에 꼬부랑 할머니가 세 살짜리 손녀와 앉아 채송화나 분꽃 씨앗을 심는 것 아욱을 ..

必死 筆寫 2022.03.25

김륭 신작 시 3편

비단잉어 (외 2편)/김 륭 비단잉어에게 비단을 빌려 당신에게 간다 바람이 불고 있다 그러나 바람은 글을 쓸 수 없어서 못다 한 인생에 피와 살을 더할 수 없고 당신은 누워 있다 요양병원 침상에 누워만 있다 떠날 수 있게 하려면 물에 젖지 않는 종이가 필요하다 나는 지금 죽어서도 뛰게 할 당신의 심장을 고민하고 있고, 당신은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반짝인다 비단잉어에게 빌린 비단을 들고 서 있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 허공에 고양이 수염을 붙여 주러 온 미친 비행기인 양, 내가 낳았지만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걱정 마, 엄마는 지금 엄마 뱃속에 있으니까 나는 이 이야기를 나의 머랭 선생님에게 해 주었다 좀 많이 늦었지만 결혼을 한 번 해야 할 것 같은 여자를 만났다 기뻤다 운명 같아서, 이 운명이 지옥..

必死 筆寫 2022.01.06

제6회 동주문학상 수상작

꽃이라는 기호의 모습 (외 2편) 강재남 우는 법을 잘못 배웠구나 바람은 딴 곳에 마음을 두어 근심이고 환절기는 한꺼번에 와서 낯설었다 오후를 지나는 구름이 낡은 꽃등에 앉는다 매일 같은 말을 하는 그는 옹색한 시간을 허비하기 위해서다 눈시울 붉히는 꽃은 비극을 좀 아는 눈치다 비통한 주름이 미간에 잡힌다 구름의 걸음을 가늠하는 것만큼 알 수 없는 꽃의 속내 연한 심장을 가진 꽃은 병들기 좋은 체질을 가졌다 그러므로 생의 어느 간절함에서 얼굴 하나 버리면 다음 생에도 붉을 것이다 얼굴이 수시로 바뀌는 계절에는 풍경이 먼저 쏟아졌다 헐거운 얼굴이 간단없이 헐린다 낭만을 허비한 구름은 말귀가 어둡다 색을 다한 그가 급하게 손을 내민다 구름이 무덤으로 눕기 전에 꽃은 더 간절해져야 하므로 울기에 적당한 시간이..

必死 筆寫 2021.12.09

첫눈은 내 혀에 내려앉아라/신미나

오늘은 날이 좋다 좋은 날이야 손을 꼭 잡고 베개를 사러 가자 원앙이나 수壽자를 색실로 수놓은 것을 살 수 있겠지 이것은 흐뭇한 꿈의 모양, 어쩐지 슬프고 다정한 미래 양쪽 옆구리에 베개를 끼고 걸으면, 열두 폭의 치마를 환하게 펼쳐서 밤을 줍는 꿈을 꾸겠네 목화꽃 송이, 송이 세 송이 콧등을 스치며 높은 곳에서 하나씩 떨어지는 모양을 바라보아도 좋겠네 너와 나, 꿈길의 먼 이부자리까지 솜을 틀자 이불이 짧아 드러난 발목을 다 덮지 못해도 꿈속에서는 미래의 지붕까지 덮고도 남겠지 오늘은 날이 좋다 좋은 날이야 철 지난 이불은 개켜 두고 일단 종로로 가자 종로에 가서 베개를 사자 ⸻시집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必死 筆寫 2021.11.26

사라지다 (외 2편) / 권박

사라지다 (외 2편) 권 박 나는 사라진 시인이다 사라진 언어, 사라진 사람, 사라진 직업에 대해 썼던 시인이다 어디로 갔을까? 키 작은 소년은 애써 세워놓았던 볼링 핀처럼 튕겨져 나갔던 그 소년은 어디로 갔을까? 가스등에 불을 켜고 어디로 갔을까? 밤처럼 침침한 하수구 밖으로 고개를 내밀던 쥐잡이꾼은 새벽처럼 침침한 창문을 막대기로 두드리던 알람시계 사람은 오후처럼 침침한 오줌으로 옷을 세탁하던 오줌 세탁부는 저녁처럼 침침한 커피를 불법으로 볶는 사람을 찾아내던 퇴역 군인은 어디로 갔을까? 가스등에 불을 켜고 어디로 갔을까? 존 르 카레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1974)에 나오는 가스등에 불을 켜던 사람처럼 거대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땜장이, 재단사, 군인, 선원, 부자, 가난뱅이,..

必死 筆寫 2021.11.26

혼자만 착하믄 뭐하노 / 박제영

혼자만 착하믄 뭐하노 / 박제영 착하다 사람 좋다 그기 다 욕인기라 사람 알로 보고 하는 말인 기라 겉으로는 사람 좋다 착하다 하믄서 속으로는 저 축구芻狗* 저 등신 그러는 기다 우리 강생이 등신이 뭔 줄 아나 제사 때 쓰고 버리는 짚강생이가 바로 등신인 기라 사람 축에도 못 끼고 귀신 축에도 못 끼는 니 할배가 그런 등신이었니라 천하제일로 착한 등신이었니라 세상에 두억시니가 천지삐가린데 지 혼자 착하믄 뭐하노 니는 그리 물러 터지면 안 되니라 사람 구실을 하려믄 자고로 모질고 독해야 하니라 길게 말할 게 뭐 있노 우리 강생이 그저 할배랑 반대로만 살면 되니라 하모 그라믄 되니라! *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뱉던 말 "축구 등신"이 실은 노자(老子)가 얘기한 추구 (芻狗,짚강아지)라는 걸 대학 가서야 알았다..

必死 筆寫 2021.11.20

저쪽 눈물이 이쪽으로 왔는지/이향

저쪽 눈물이 이쪽으로 왔는지/이향 겉은 멀쩡한데 썰어보면 바람 든 무가 있다 바람이 무 속을 헤집고 들어온 것인지 무가 바람을 끌어들인 건지 알 수 없지만 한 번 바람 든 자리는 울음 없는 눈매처럼 퍼석하기만 한데 차곡차곡 접혀 있던 너를 들춰본 뒤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간 그 바람이 썰다 만 무 속에 있다 너는 이미 없는데 바람은 또 불어 마치 저쪽 눈물이 이쪽으로 건너오기라도 했는지 그 자리가 잘 마르지 않는다

必死 筆寫 2021.11.03

비의 나라/황인찬

​비의 나라/황인찬​ ​ “상황이 좀 나아지면 깨워주세요” 그렇게 적힌 쪽지가 있을 것이다 ​ 여행에서 돌아온 너는 이 모든 것이 옛날 일처럼 여겨질 것이다 밝은 빛이 부엌을 비추고 있고, 먼 지들이 천천히 날아다닐 것이다 그런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 무슨 일이 여기에서 일어났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선하고 선량한 감정들이 너의 안에서 솟아오를 것이다 ​ 기쁨 속에서 너는 국을 끓일 것이다 멸치와 다시마를 넣고 국물을 우려낼 것이다 흰 쌀밥에서 흐린 김이 피어오를 것이다 ​ 그리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느껴질 때, 너는 무심코 만지는 것이다 평화롭게 잠든 사람의 부드러운 볼을 너는 흠뻑 젖어 있다 너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必死 筆寫 2021.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