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다시보기 210

차라리 풀이 되어버리자/차창룡(동명)

어쩌면 삶은 견디는 것이다. 윤회의 수레바퀴가 멈추지 않는 한 삶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기조 시인의 「풀과 함께」라는 시를 읽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평생 풀을 매시던 어머니가 무릎수술 후 말씀하셨다. “풀처럼 살아라 내가 이기지 못한 것은 저 풀밖에 없다“ 어머니는 풀 외에는 모든 것을 다 이겼다는 뜻일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어머니는 다 견딜 수 있었을 뿐이다. 남편의 건강도 아들의 가난도 당신의 고달픔도. 다만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마당이며 밭이며 논이며 길바닥에 풀이 무성해지는 것, 그래서 어머니에게,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풀이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에게 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누구보다도 강한 어머니가 이기지 못했다는 풀처럼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

함기석의 「서해에 와서」 해설 / 반경환

서해에 와서/함기석 1 방파제에 기린이 서 있다 무얼 바라보는 걸까 누굴 생각하는 걸까 날마다 목이 길어지는 키다리 등대 아저씨 2 바다에 심장이 둥둥 떠 있다 누가 던진 걸까 누구 몸에서 떨어진 흰 살점 나비들일까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예쁜 국화꽃들 3 바닷속에서 계속 총소리 울린다 탕! 탕! 탕! 아이들 울음소리 같고 비명소리 같은 찬 물소리 ⸻시집 『음시』 2022년 2월 .................................................................................................................................................................................... 이 ..

빨래 걷는 여인들⸻하동송림/이 경

빨래 걷는 여인들⸻하동송림/이 경 저녁의 여인들이 오래된 사진을 걷어 바구니에 담고 있네 여기 옛날의 강물 널었던 빨래를 걷어 품에 안듯이 사진 속 여물을 끓이는 아이가 걸어 나와서 빨래집게로 눌러놓았던 시간들을 걷어 품에 안고 있네 햇살에 묻은 송진내를 걷어 개키고 있네 여기 중학교 때 소풍 왔던 곳 우리 기대어 사진 찍던 자리 여인들이 솔밭 사이로 긴 빨랫줄을 치고 어느 해 수해에 떠내려간 다리를 건져 올리고 있네 강물에 떠내려 온 빨치산의 시체를 건져 올리고 있네 햇빛에 바래 역사가 된 신화 달빛에 물들어 신화가 된 역사*를 걷어 바구니에 담고 있네 사진 속 여물 끓이는 아이가 걸어 나와서 널었던 빨래를 걷어 사진 속으로 돌아가고 있네 *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