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다시보기 212

진이정을 읽다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 진이정​흐르는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꽃이라고 별이라고 그대라고 명명해도 좋을까요 그대가 흘러갑니다 꽃이 흘러갑니다 흘러흘러 별이 떠내려갑니다 모두가 그대의 향기 질질 흘리며 흘러갑니다 그대는 날 어디론가 막다른 곳까지 몰고 가는 듯합니다 난 그대 안에서 그대로 불타오릅니다 그대에 파묻혀 나는, 그대가 타오르기에 불붙어 버렸습니다 지금 흘러가는 이때>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의 허락도 없이 잎이라고 눈이라고 당신이라고 명명해봅니다 당신에 흠뻑 젖은 내가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아아 당신은 나라는 이름의 불쏘시개로 인해 더욱 세차게 불타오릅니다 오 지금 흐르고 있는 이 꽃 별 그대 잎 눈 풀씨 허나 그러나 나도 세간 사람들처럼 당신을 시간이라 불러봅니다. ..

차도하 시 읽기

차도하 시집을 주문한다.2020년 한국일보 신춘문에 당선작을 그 때 읽었지만 그때는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지라 미처 느끼지 못했었는데, 그리고 그를 곧 잊어버리고 말았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의 시를 읽고 시집을 주문하고 있으니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각설하고 스무살에 신춘문예 당선의 영예를 얻고 24살의 젊은 나이에 사인은 미공개로 타계하고 만 그녀의 삶이 안타깝고 애절하다.유고 시집이 되고 만 첫 시집 이전에 발표한 산문집이 있어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모양이지만 나로서는 그 내용도 사연도 알지못한다. 다만 그의 시편들이 이리도 아린데, 시라는 장르에서 이토록 절절한데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의 시에서 보여주는 시적 언술이 이렇게까지 도도하게 ..

차라리 풀이 되어버리자/차창룡(동명)

어쩌면 삶은 견디는 것이다. 윤회의 수레바퀴가 멈추지 않는 한 삶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기조 시인의 「풀과 함께」라는 시를 읽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평생 풀을 매시던 어머니가 무릎수술 후 말씀하셨다. “풀처럼 살아라 내가 이기지 못한 것은 저 풀밖에 없다“ 어머니는 풀 외에는 모든 것을 다 이겼다는 뜻일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어머니는 다 견딜 수 있었을 뿐이다. 남편의 건강도 아들의 가난도 당신의 고달픔도. 다만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마당이며 밭이며 논이며 길바닥에 풀이 무성해지는 것, 그래서 어머니에게,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풀이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에게 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누구보다도 강한 어머니가 이기지 못했다는 풀처럼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

함기석의 「서해에 와서」 해설 / 반경환

서해에 와서/함기석 1 방파제에 기린이 서 있다 무얼 바라보는 걸까 누굴 생각하는 걸까 날마다 목이 길어지는 키다리 등대 아저씨 2 바다에 심장이 둥둥 떠 있다 누가 던진 걸까 누구 몸에서 떨어진 흰 살점 나비들일까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예쁜 국화꽃들 3 바닷속에서 계속 총소리 울린다 탕! 탕! 탕! 아이들 울음소리 같고 비명소리 같은 찬 물소리 ⸻시집 『음시』 2022년 2월 .................................................................................................................................................................................... 이 ..

빨래 걷는 여인들⸻하동송림/이 경

빨래 걷는 여인들⸻하동송림/이 경 저녁의 여인들이 오래된 사진을 걷어 바구니에 담고 있네 여기 옛날의 강물 널었던 빨래를 걷어 품에 안듯이 사진 속 여물을 끓이는 아이가 걸어 나와서 빨래집게로 눌러놓았던 시간들을 걷어 품에 안고 있네 햇살에 묻은 송진내를 걷어 개키고 있네 여기 중학교 때 소풍 왔던 곳 우리 기대어 사진 찍던 자리 여인들이 솔밭 사이로 긴 빨랫줄을 치고 어느 해 수해에 떠내려간 다리를 건져 올리고 있네 강물에 떠내려 온 빨치산의 시체를 건져 올리고 있네 햇빛에 바래 역사가 된 신화 달빛에 물들어 신화가 된 역사*를 걷어 바구니에 담고 있네 사진 속 여물 끓이는 아이가 걸어 나와서 널었던 빨래를 걷어 사진 속으로 돌아가고 있네 *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