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상. 추천,당선작 364

2022년 상반기 《시와 반시》 신인상 당선작

수돗가의 구름 (외 4편)/위성욱 어떤 기분을 위해 비누에 손을 씻고 지나가는 구름에 손을 넣어 또 한 번 씻고 하얀 입술들이 전해주는 은밀한 이야기가 농익어 갈 때 어디선가 코트 깃을 세운 노신사가 무서운 얼굴로 나타나자 혼비백산 흩어지는 어떤 조각들 바다 위에 떠 있는 흰 식탁에 오늘도 잘 익은 고등어가 올라오고 서로의 젓가락질로 조각조각 나눠질 때 누군가 먼 곳에 있는 눈을 빼 자신의 눈인 것처럼 얼른 집어넣었다 바람의 언사가 구름의 언사와 섞이면 천 리를 갈 수 있다는데 천 리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고 하니 어떤 기분을 위해 나는 오늘도 구름에 또 다시 손을 넣어 잘 익은 것들로 붉은 열매를 따고 있다 흰 허벅지를 가진 풋풋한 그 여자는 영문도 모른 채 수돗가에서 그 열매를 깨끗이 씻고 있다 ..

〈현대시〉 신인상 2022년 상반기 당선작_

광교(외 4편) / 박다래 미영 씨는 좋은 여동생이었다. 신도시 아파트에서 캡슐커피를 내리며 아직 죽지 않은, 혼자 죽어갈 자신의 언니를 떠올렸다. 남편과 딸은 외출했고, 미영 씨는 그들에게 일이 있다는 것을 의심했다. 창밖으로는 노란 꽃가루가 날렸다. 그것이 저층인 미영 씨의 집 창문에 달라붙었다. 노란빛을 통해 창밖을 바라보는 미영 씨. 미영 씨는 살을 벅벅 긁으며 꽃가루가 만든 문양을 바라보았다. 집 창밖으로 무덤이 보였다. 보상 없는 비와 디 사이에 씨. 아직 살아가고 있으니까. 5월이면 보랏빛 꽃이 피는 꽃잔디가 봉분 위에서 자라났다. 같은 동네에 사는 언니와 함께 미영 씨는 호수공원을 걸었다. 나무 데크 위를 걸으며 미영 씨는 호수공원의 호수는 어째서 두 개인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북호, 남호..

2021,중앙신춘시조상 -권선애

불편에게로路/권선애 편안대로大路 벗어나 불편에게로 갑니다 자동화된 도시에서 손발이 퇴화될 때 발밑은 물관을 따라 실뿌리를 뻗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가 풀 죽은 빌딩 숲은 낯선 대로 익숙한 대로 껍질만 남긴 채 별들의 보폭을 따라 좁은 길을 걷습니다 좋을 대로 움트는 불편을 모십니다 어두우면 꿈꾸는 대로 밝으면 웃는 대로 낮과 밤 시간을 일궈 내 모습을 찾습니다 당선소감:권선애 당선 연락을 받고 온종일 내 몸엔 명사와 주어(정말, 정말 내가?)가 번갈아 돋았습니다. 밭에서 발코니에 옮겨 심은 케일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불편해서 지나친 것에 한없이 미안했습니다. 시조 앞에서 제자리를 맴돌 때, 들풀은 바람을 따라가느라 더욱 유연해졌습니다. 편한 곳에서 시(詩)를 찾는 것은 모두 발각된 단어였습니다. 풀들..

2021년《문학사상》신인상 시 당선작_ 혼자 하는 추모(外)/ 한진우

혼자 하는 추모 (외 6편)/한진우 흰 벽에 머리를 대고 에스키모인들은 화가 나면 풀릴 때까지 직선으로 걷는 풍습이 있다 마음이 풀린 곳에 표시를 하고 하룻밤 만에 돌아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 돌아오다가 끝난 사람도 있다 분노는 어떤 자세로 식어 있나 어디까지 걸었니? (묻기 전에 걸어야지) 한 사람의 길을 루틴으로 만들면 잠시가 영원으로 변할 수 있다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곳에 닿아 보려는 염원은 스스로 물에 빠지는 선택지를 만들었다 물방울이 덜 튈수록 예쁜 다이빙의 모양 왕관 모양으로 퍼지는 밤 창문을 보면 다들 입김을 한 번씩 꽂아 두고 갔다 추모의 방식은 제각각이었지만 결국은 투명해지고 풍경을 받아들이라는 압박에 시달린 창문과 외면하고 싶어지면 창문을 찾곤 하는 우리 빙하가 사라지는 이유를 ..

2021년 《현대시학》 신인상 당선작 _ 유정 / 박서영

코프만 씨 아아아 1(외 4편)/유 정 ⸺코프만 닮은 코프만 씨 얼마 전 이사 온 나의 유쾌한 이웃은 반려견을 코프만 씨라고, “코프만 씨 이제 잘 시간이에요” 그런 그를 주민들도 코프만 씨라고, “코프만 씨 안녕하세요” 두 명의 코프만은 늘 똑같은 옷과 비슷한 식사를 단정한 동작과 함께! 점점 늘어나는 코프만 아마존 앵무새, 납작머리개구리, 긴팔원숭이 등 기체에 문제가 있었지만, 아비앙카 항공은 브라질산 열대식물을 코프만 씨 집으로 배달 이름이 열여덟 글자인 잎들은 안개를 등지고 베란다 맨 왼편으로! 한편, 대리석 현관을 건너온 붉은 악어는 욕조 안에서 첫날밤을 ⸺18번째 코프만 마을에 퍼진 소문 〈직원 모집, 코프만 씨 코프만들을 코프만 씨처럼 돌볼 사람 구함〉 최종 합격자 18명. 담당 3 “코프만..

2021<시인수첩>신인상 당선작 _ 이진양

수많은 굴뚝의 집 외 4편 / 이진양 가족들은 불에 달군 대못을 입에 물고서 다르게 망가지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창밖에서 나는 쓰러진 나무의 우뚝 선 그림자였는데 나무의 죽음을 조용히 바라보았는데 희미한 노래만큼만 몸을 지우면 내게 꼭 맞는 나무 관이 눈앞에 남겨져 있다 사라진 개들이 황급히 돌아오는 저녁 나는 개들의 사나움을 크고 작은 열매로 맺는다 얼떨결에 방황은 완성되는 것 같아 불붙은 집은 공장처럼 검은 연기를 뿜어대고 가족사진에는 윤곽만 남은 얼굴들이 수많은 굴뚝들을 올려다보고 있다 이따금 굴뚝 위로 지친 새가 떨어지고 어지러운 구름마저 떨어지고 몸을 버린 목소리들은 집 밖으로 흘러나와 관이 된 나무에 못을 박고 지난겨울 굴뚝 아래서 선물을 기다리며 몸을 떨던 아이 나는 그곳에 열매를 떨어뜨리며..

2021년 하반기 《현대시》 신인상 당선작_ 신동재

오디에이션* (외 4편) / 신동재 너는 교실에 혼자 앉아 있다 자작나무 의자들이 모두 다른 빛깔을 지녔다 일회용 용기에 남은 아메리카노의 높이가 다르다 일부러 말을 걸어보는 것이 좋겠지 어제는 얼음만 앙상한 일회용 용기를 남겼네 매일 음정이 다른 악기를 만드는 중 자작나무에서 연주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직 구멍을 뚫지 않았는데 틀릴 것을 걱정하니 시원히 볼 수 없잖아 그때는 교실이 악기처럼 행세한다 하나뿐인 출입문이 어떤 맵시를 뽐냈는지 너는 진종일 본다 음파들이 다른 데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오후 세 시쯤 한 곳으로 집결한다 얼음이 줄어들 때마다 연주를 다르게 해본다 간드러진 음이 누그러들었다 * 너는 평소처럼 리코더를 분다 독주獨奏된 악기의 감정이 너에게 전해진다 의자 위에 리코더가 앉는다 고저음..

2021,《창작과 비평》신인상 시 당선작 _남현지 / 호수공원 (외 4편)

호수공원 (외 4편) 남현지 눈앞에 호수가 있고 나는 시민과 조경이 익숙한 듯이 벤치에 앉아서 방금 점심을 먹고 식당에서 나오다가 묶여 있는 개를 바라보는 회사원처럼 호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배가 부르다는 게 큰 개가 묶여 있다는 게 누가 길을 물어서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호수만 보이는데 꿈에서는 나도 찰랑거리다가 귀를 기울이면 자신이 물결처럼 쏟아져서 깨어났다 잉어 몇마리와 엉겨붙은 물풀을 떼어내면서 호수는 잘 묶여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건물처럼 고요하게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생각하면서 호수를 따라 걸었다 삼십분 전에 본 사람이 다시 옆을 달리고 있다 빛의 생산 전기 좋아해요? 이제 그만 그걸 자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담배를 마지막으로 집에 불타오르..

2021년 문학동네신인상 시 당선작 / 변윤제 시인

2021년 문학동네신인상 시 당선작 / 변윤제 시인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가만히 동호회 외 6편 가만히 멈춰라.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시작된 동호회. 가만히 멈추는 건 무엇인가요 멈추는 것과 가만히 멈춤은 무슨 차이일까요. 먼지떨이를 쓸어내리며 생각했습니다. 수백 갈래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고민했습니다. 먼지떨이로 사람을 때리면 회초리가 되고요. 먼지떨이로 반찬을 집으면 젓가락이 되는데. 가만히 멈추면 가만히가 무엇이 되지요? 요를 펴면서도 생각했어요. 이불로 나를 돌돌 말아 쥐는 사람아. 김밥 놀이를 시키며 내 숨을 사라지게 하는 사람아. 어머나. 오이의 기분은 희박하구나? 그래서 안쪽이 창백하구나. 그대여. 내게 가만히를 명령한 그대야말로 가만히의 명수. 타르트를 파는 저 세탁소를 보아요. 가루가 떨..

2021년 하반기 《현대시》 신인상 당선작_ 신동재/ 오디에이션(외 4편)

오디에이션* (외 4편) / 신동재 * 너는 교실에 혼자 앉아 있다 자작나무 의자들이 모두 다른 빛깔을 지녔다 일회용 용기에 남은 아메리카노의 높이가 다르다 일부러 말을 걸어보는 것이 좋겠지 어제는 얼음만 앙상한 일회용 용기를 남겼네 매일 음정이 다른 악기를 만드는 중 자작나무에서 연주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직 구멍을 뚫지 않았는데 틀릴 것을 걱정하니 시원히 볼 수 없잖아 그때는 교실이 악기처럼 행세한다 하나뿐인 출입문이 어떤 맵시를 뽐냈는지 너는 진종일 본다 음파들이 다른 데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오후 세 시쯤 한 곳으로 집결한다 얼음이 줄어들 때마다 연주를 다르게 해본다 간드러진 음이 누그러들었다 * 너는 평소처럼 리코더를 분다 독주獨奏된 악기의 감정이 너에게 전해진다 의자 위에 리코더가 앉는다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