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무량 외 4편/전영관

시치 2022. 7. 14. 01:12

 

무량 

 

봄비 속살거리고

안개까지 자욱해 아슴아슴 젖어드는데

화엄사 가자하네

 

기가 센 곳이라 일주문부터 쭈뼛했었지

만발하는 흑매가 보통 귀신은 아니다 싶어

벽사 삼아 마들가리를 주워왔었지

 

입에만 담아도 무거운 화엄보다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당신에게 간질밥 먹여도 될 것 같은

부여 무량사를 고집부리네

사미*처럼 파르래한 눈웃음도 무례는 아니고

석탑을 데우는 볕처럼 무량하고 사무치는 봄날이라

전생부터 이생의 우환들을 널어놓고 싶네

극락전 처마선이 당신 플레어스커트만큼 황홀하다고

너스레 떨어놓고는 딴청부리겠네

 

배롱나무 아래 골똘한 당신은

뒤꿈치에 자운영 보랏빛을 묻혀오겠지

쿡, 쿡 옆구리 찌르며 천치처럼 웃으려고

내 팔꿈치에 복사꽃 연분홍을 바르고 싶네

꿀 발라 경단을 빚듯 벌들이 잉잉거려서

물색없이 마른침을 삼켜보네

 

돌아오다 무창포의 지는 해를 보고

봄보다 가을을 먼저 배운 사람처럼 헛헛해져서

꿈만큼 잘 놀고는 시무룩해질 것이네

 

발 벗고 여울 건너던 당신 종아리처럼

사는 일이 환했다가 아슬아슬

추워라

 

*⦗불⦘십계를 받고 불도를 닦는 어린 남자 승려. 사미승.

 

 

무적(霧笛)

 

내 아픔을 이해한다니

깊게 오해했구나

감사인사는 하지 못했다

 

식탁을 도둑맞은 듯이 허기지다가

뜯지 않은 소포처럼 더부룩한 저녁이면

반문하지 않아서 순진한

오르골 태엽을 감았다

 

운명을 비웃고 싶을 때는

누가 벗었는지도 모를 재활용함에서 가져온 외투를 몇 번 털고

아무렇지 않게 입었다

 

무적(霧笛)처럼 미리 일러줄 사람이 아쉬워서

낡은 구두를 보면서도 부모를 떠올렸다

 

겨울나비를 보듯 너를 걱정했다

 

문은 벽의 수술자국 같은 것이어서 열리지 않고

묵은 약속도 없고

바깥이 궁금하지 않았다

 

환멸로 욕설을 섞은 후엔

눈사람은 입 냄새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뒤척거리다가 자정의 창을 열면

허공에서 숯 냄새가 났다

 

표정은 내가 나를 괴롭히다가 생긴 부작용일 뿐인데

들킬 때마다 거울을 엎어놓았다

 

 

치명(治命)

 

허공이 창백해지도록 제 것을 다 토한다

낙화라는 몸으로 유언을 상징한

꽃은 피어나면서 죽는다

 

봄날의 양지는

치기로 배열하다가 끝내 죽어버린 형용사들과

이종교배로 태어난 수사학의 괴물들을 합장한

허장(虛葬)의 공동묘지

풍경의 독이 치명적이어서

은수저를 내놓으면 검게 변할 것 같다

그 독에 대한 내성을 나이라 한다

묻어버렸던 것들이 아쉬워

늙으면 회상이라는 연장을 가진 도굴꾼이 되는 것이다

 

봄은 해마다 겪은 듯 능란한데

음전한 당신과 함께

 

꽃의 처음부터 끝까지 걸었다 내 주머니에 당신의 손과 함께 넣으며 체온의 섞임에 대해 생각했다 창밖 살구나무 감상도 월세의 일부려니 하면서 집을 얻었다 꽃은 해마다 피지만 그 전생은 공전주기가 삼백 년인 혜성일 것이다 삼백 년은 회전해야 빈혈을 앓는 낯빛이 되는 것이다 당신의 진한 사랑을 느낄 때마다 나는 다 저승으로 가져갔는데 혼자 남을 당신이 애잔해서 아팠다 꽃의 뒤를 보면 캄캄해진다 오도카니 피어있는 봄과 같이 당신이란 호칭의 속정은 깊다 전부가 살아나는데 죽는 것 같고 바람결의 미열로도 홧홧해지는 미혹이 봄의 독성이다

 

멱목*처럼 손수건을 얼굴에 얹고

잔디밭에 나란히 눕고 싶은 오후다

 

*염할 때 시신의 얼굴을 싸는 헝겊

 

 

환생들

 

아랫배가 따듯할 때 나른한 것처럼

연해진 봄나물 찾다가 벼랑을 헛디딘

양지의 유혼 아지랑이가 스미어

빈혈로 평생 어지러웠던 여인이

쑥버무리 해드리마고 잊지 말자고

약속하듯 손가락 걸어둔 진달래

 

얼음 풀리는 거 금세라고 웃으며

봄에 돌아온다는 서방을 기다리는데

애 낳다가 이승을 떠나

혼자만 행복한 천국이 슬퍼진 천사가 되어

여기 있다고 가지마다 옷자락을 매듭지은 목련

 

귓속말이라도 할 듯이 다가왔다가 겸연쩍어

사랑한다고 후우... 입김 불던

아내 제상(祭床)에 올릴 떡가루가 뜸 들 듯 포슬포슬

다래끼가 난 것 같이 아롱거리게 하는

저승까지 손닿는다면 흔들어보고 싶은 산수유

 

푼수면서도 속 깊었던 시누이 머리핀처럼

지방(紙榜)마저도 싫증나는데 돌아보게 만드는

정전된 밤에도 환할 것 같은

바람 속에 숨은 악동이 겨드랑이 파고드는 듯

깔깔거리는 동네처녀 합창단 개나리

 

허공에 몰려다니는 귀신들의 곡을

봄바람이라 한다

꽃은 지는데 사람이 더디 온다는 몸부림을

꽃샘바람이라 한다

곁이 비었는데도 울렁거리는 까닭을

환생이라 한다

 


 

선택

 

봄이라서 손금이 가지 번지듯 자란다

갈라지는 것 같다면 혼자를 느끼는 것

손가락을 보다가 다육이를 떠올렸다

물 못 주어도 통통하니까 갈증이 안보이겠고

싫증내도 괜찮을 것이다

꽃은 잃어버리는 게 많아 상심하게 만들고

난은 예민해서 걱정할 수밖에 없게 한다

강아지는 사랑만을 갈구해서 아프다

 

아침에 햄스터를 묻었다

모종삽이 공범인 것 같아

다른 생명을 심는 일에 쓰기 싫었다

밥 먹이듯

다육이에게 흙을 숟가락으로 퍼주었다

 

고통을 피하는 방법이

행복으로 가는 길은 아니었다

 

행인들이 매화 앞에서 어김없이 멈춘다

매화가 향기라는 거미줄을 쳐놓고

이미 걸려서 버둥거리는 먹이가 다른 먹이를 유인하는 방식처럼

꽃잎까지 흩뿌려 놓았다

 

불행에 배려 없이 호기심을 보이면 불행해진다

얼뜨기 인턴 신이라도 되는 양

3층에서 골목을 내려다보았다

 

신이 된다면

인간들이 안 보였다는 변명은 할 수 없고

눈웃음을 내려 볼 수 있는 높이의

3층에서 근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