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무량 (외 2편) / 전영관

시치 2022. 7. 9. 02:31



봄비 속살거리고
안개까지 자욱해 아슴아슴 젖어드는데
화엄사 가자 하네

기가 센 곳이라 일주문부터 쭈뼛했었지
만발하는 흑매가 보통 귀신은 아니다 싶어
벽사 삼아 마들가리를 주워 왔었지

입에만 담아도 무거운 화엄보다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당신에게 간질밥 먹여도 될 것 같은
부여 무량사를 고집부리네
사미*처럼 파르래한 눈웃음도 무례는 아니고
석탑을 데우는 볕처럼 무량하고 사무치는 봄날이라
전생부터 이생의 우환들을 널어놓고 싶네
극락전 처마 선이 당신 플레어스커트만큼 황홀하다고
너스레 떨어놓고는 딴청 부리겠네

배롱나무 아래 골똘한 당신은
뒤꿈치에 자운영 보랏빛을 묻혀 오겠지
쿡, 쿡 옆구리 찌르며 천치처럼 웃으려고
내 팔꿈치에 복사꽃 연분홍을 바르고 싶네
꿀 발라 경단을 빚듯 벌들이 잉잉거려서
물색없이 마른침을 삼켜보네

돌아오다 무창포의 지는 해를 보고
봄보다 가을을 먼저 배운 사람처럼 헛헛해져서
꿈만큼 잘 놀고는 시무룩해질 것이네

발 벗고 여울 건너던 당신 종아리처럼
사는 일이 환했다가 아슬아슬
추워라


* [불] 십계를 받고 불도를 닦는 어린 남자 승려. 사미승.




무적(霧笛)




내 아픔을 이해한다니
깊게 오해했구나

감사 인사는 하지 못했다

식탁을 도둑맞은 듯이
허기지다가
뜯지 않은 소포처럼
더부룩한 저녁이면
반문하지 않아서 순진한
오르골 태엽을 감았다

운명을 비웃고 싶을 때는

누가 벗었는지도 모를 재활용함에서 가져온 외투를

몇 번 털고
아무렇지 않게 입었다

무적(霧笛)처럼
미리 일러줄 사람이 아쉬워서
낡은 구두를 보면서도
부모를 떠올렸다

겨울 나비를 보듯
너를 걱정했다

문은 벽의 수술자국 같은 것이어서
열리지 않고
묵은 약속도 없고

바깥이 궁금하지 않았다

환멸로 욕설을 던진 후엔
눈사람은
입냄새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뒤척거리다가 자정의 창을 열면
허공에서
숯 냄새가 났다

표정은
내가 나를 괴롭히다가 생긴
부작용일 뿐인데

나를
들킬 때마다
거울을 엎어놓았다




문진




커피를 엎지르면 화들짝 놀라는데
저녁은 발묵하고 기다리는 시간
골목마다 붓이 지나가며 컴컴해진다

마르는 걸 기다리지 못해서 종이를 찢곤 했다

준법(皴法)은 붓을 놀리는 방식
준(皴)은 산수화의 주름이라는 뜻
노인의 메마른 피부 느낌 같은 것
주름도 법이 있으니 비관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길고양이들은 쓰레기봉투를 뜯고
상가에 다녀왔는지 달이 흠뻑 어룽거려서
동네가 먹에 젖은 것같이 물렁해진다
문진(文鎭)처럼 지긋이 눌러줘야 하는데
다려 입은 린넨 셔츠에 주름 잡히듯*
바동거려도 안 되는 일 있으니 힘을 풀어야지

음식도 사람도 구뜰한 것이 편안하다
국밥 먹고 나서면 어둠이 뜨끈해진다
칼바람도 애인 속살 같겠지 하다가
자발없이 웃었다

국물 지우려고 물수건으로 문지른 자리에
고춧가루 색이 현실적으로 번져 있다

일인분 적막이 기다리는 집을 향해
붓이 된 양 천천히 먹을 걸었다


  * 파울 첼란.




          —시집 『미소에서 꽃까지』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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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충남 청양 출생. 2011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바람의 전입신고』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 『슬픔도 태도가 된다』 『미소에서 꽃까지』, 산문집 『문장의 무늬』 『슬퍼할 권리』 『좋은 말』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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