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솔밭길 (외 2편) / 유종인

시치 2022. 7. 9. 02:38

 

 

찬 이별을 씹었다가도

솔밭길에 오르면

감초 달인 물에 목욕하고 온 바람이

내 귀를 적시네 잇바디가 노랗고 달구나

 

궂긴 이들 한두 번씩은

예서 이 솔바람 속에서 뺨이 나오고 이마가 반들하니

시큰한 콧등 분주한 콧김을 공중에 내어

서러운 기쁨도 눈을 반짝여 말없이

바라다 갈 것이구나

 

굽은 소나무 거칠거칠한 소나무 잔등을 어루어

미처 못 만져 준 그대를 대역했으니

내가 이 솔밭길을 거둔 뒤에도

소나무는 그대가 떠난 쪽으로

지향을 세웠네 그윽이 굽어 바라네

 

해를 감추고 구름이 흩어져도

솔바람에 물든 풍문을

서너 폭 문장의 두루마리 옷에 번져 입었으니

밤에 누우면 서늘하니 속옷이 울고

비 그친 솔수펑이가

내 가슴 늑골에 번져 와 추억의 피륙을 다시 짜듯

눈보라 속에 웃음이 태연한 내가

소나무와 짐짓 등을 맞대고 맑게 미쳐 가네

 

 

 

숲 선생

 

 

 

겨울 근자近者에

선생께서는

곤줄박이 서너 마리와 붉은머리오목눈이 이십여 마리를

마을 인가에 내려보내셨다

 

나는, 선생의 사신단 일행을 병꽃나무 울타리에서 우연히 맞아

때론 푸른 가시뿐인 탱자울타리에서

괜히 위리안치된 이의 반짝이는 설움으로

저들의 수다스러운 안부를 눈시울에 담았다

 

선생의 말씀이나 당부는

한번의 여울물 소리 뒤에 공중에 한없이 떠도는 깃털 하나의

들릴 듯 말 듯한 전갈이 전부였으나

긴 겨울 가뭄 끝에 나는 오체투지로

그 섬섬한 침묵의 하산 앞에 하염없이 글썽일 따름이었다

 

뒤미처 정숙한 동고비 두엇이 다녀갔다

나는 미처 대접할 마련이 없이 물 종지만 내었을 뿐

삶이 적막일 때마다 선생은

산그늘의 목청을 풀라고 산금山禽을 내려보낸다는 정도만

뒤란의 스러진 소란 뒤의 소슬함으로 똥길 따름이다

 

여기저기 꽃이 벙글었을 때는

선생이 숲에서 겨우내 가꾼 혼신渾身이

세속에 초록의 온도를 좀 올려놓았다는 것만

겨우 눈물겨움으로 엿볼 따름이었다

 

 

 

나무 의사

―촉진(觸診)

 

 

 

시르죽는 병든 나무 한 그루를 돌봐 고쳐주면

이미 궂긴 사람들 더불어 여기저기 시르죽는 사람들

여든 명의 아흔 명의 사람, 백에 백 사람들 차차 병들어 감에

나무가 서서 굽어보며 손 내밀리

 

황무지나 아스팔트와 사창가 골목 입구에

이팝나무 한 그루 꽂아만 줘도

변절이 없는 석학碩學의 그늘을 드리운 것,

그 나무 중동에 못질을 하고

빨랫줄을 걸었던 무례함을 후회하기만 해도

중동에 박혀 구부러져 녹슨 못

다시 펜치로 뽑기만 해도 나무는 전생을 다 내줄 것

 

재개발지구 다 허물어진 담벼락에

봄 아지랑이를 뒷배로 개오동나무 자란 것

그 너른 잎새에 잠시 손바닥을 포개기만 해도

인기척이 성장 호르몬처럼 반가운 나무들,

도시와 매연에 시무룩한 가로수에

스테이플러로 광고지를 박는 사람들이

한 번만이라도 플라타너스 몸속에

사람의 목소리가 잠겨 있을 거라 떠올리기만 해도

그는 어느새 그윽한 나무 의사 인턴이 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지나가다 문득 나무와

어깨를 견주거나 허그를 하거나 허리를 기대기만 해도

나무와 행인은

서로를 촉진觸診하는 서로의 소슬한 의사가 되는 법,

나무들만 살리고 사람만 따로 죽지 않으리

사람들 죽는 데 나무만 싱싱 태연하지 않으리

 

 

             ―시집 『숲 선생』 202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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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인 / 1968년 인천 출생. 1996년 《문예중앙》 시,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 시집 『아껴 먹는 슬픔』 『교유록』 『숲 시집』 외 다수. 시조집 『답청』, 미술책 『조선의 그림과 마음의 앙상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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