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걷는 여인들⸻하동송림/이 경
저녁의 여인들이 오래된 사진을 걷어 바구니에 담고 있네
여기 옛날의 강물 널었던 빨래를 걷어 품에 안듯이
사진 속 여물을 끓이는 아이가 걸어 나와서
빨래집게로 눌러놓았던 시간들을 걷어 품에 안고 있네
햇살에 묻은 송진내를 걷어 개키고 있네
여기 중학교 때 소풍 왔던 곳 우리 기대어 사진 찍던 자리
여인들이 솔밭 사이로 긴 빨랫줄을 치고
어느 해 수해에 떠내려간 다리를 건져 올리고 있네
강물에 떠내려 온 빨치산의 시체를 건져 올리고 있네
햇빛에 바래 역사가 된 신화
달빛에 물들어 신화가 된 역사*를 걷어 바구니에 담고 있네
사진 속 여물 끓이는 아이가 걸어 나와서
널었던 빨래를 걷어 사진 속으로 돌아가고 있네
*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작가 이병주 어록)
⸺계간 《시와시학》 202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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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 / 경남 산청 출생. 1993년 계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소와 뻐꾹새 소리와 엄지발가락』 『흰소, 고삐를 놓아라』 『푸른 독』 『오늘이라는 시간의 꽃 한 송이』 『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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