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다시보기

차도하 시 읽기

시치 2024. 11. 18. 22:45

차도하 시집을 주문한다.

2020년 한국일보 신춘문에 당선작을 그 때 읽었지만 그때는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지라 미처 느끼지 못했었는데, 그리고 그를 곧 잊어버리고 말았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의 시를 읽고 시집을 주문하고 있으니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각설하고 스무살에 신춘문예 당선의 영예를 얻고 24살의 젊은 나이에 사인은 미공개로 타계하고 만 그녀의 삶이 안타깝고 애절하다.

유고 시집이 되고 만 첫 시집 이전에 발표한 산문집이 있어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모양이지만 나로서는 그 내용도 사연도 알지못한다. 다만 그의 시편들이 이리도 아린데, 시라는 장르에서 이토록 절절한데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의 시에서 보여주는 시적 언술이 이렇게까지 도도하게 감성을 자극하고 있는데.. 시인에  대한 경외감을 차마 떠칠 수 없는 노릇인데당대 대 시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라도 시의 집에라도 한 번 방문하고픈 심정이다.

 

 

침착하게 사랑하기/차도하 (2020,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몸에 든 멍을 신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은 내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다 내가 물비린내를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

빛과 함께 내려올 천사에 대해, 천사가 지을 미소에 대해 신이 너무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미 본 것 같았다

반대편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왔다

.

저를 저렇게 사랑하세요? 내가 묻자

신은, 자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저만 사랑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아닌데 왜 이러세요 내가 소리치자

.

저분들 싸우나봐, 지나쳤던 연인들이 소곤거렸다

.

신은 침착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신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강을 보고 걷는다

강에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강이 무거운 천처럼 바뀌는 것을 본다

.

그것을 두르고 맞으면 아프지만 멍들지는 않는다

.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연인들의 걸음이 멀어지자 그는 손을 빼내어 나를 세게 때린다

 

입국 심사 / 차도하

 

천국은 외국이다. 어쨌든 모국은 아니다. 모국은 우리나라도 한국도 아니다. 천국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입국할 때 모든 엄마를 버려야 한다. 모국을. 모국어를. 모음과 자음을 발음하는 법을. -마음-맘마를. 먹으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밥그릇을.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을.

 

살아가며 했던 모든 말이 적힌 책을 찢어 파쇄기에 넣는다. 나풀나풀 얇은 가루가 된 종이를 뭉쳐 날개를 만든다. 날개를 달면 거기 적혔던 모든 말을 잊어버린다.

 

날고 싶은 방향으로 날아간다.

 

그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된 사람들은 천사를 보았다 말하겠지만

천국의 주민들은 천사라는 단어를 모른다.

그것은 깃털의 일부가 되었을 따름이고 다른 단어와 같은 무게를 지녔다.

 

때로는 아무것도 버릴 게 없는 경우도 있다. 가진 게 없거나 이미 버리고 온 사람들.

울지 않는 아기. 비쩍 마른 노인. 머리가 산발이 된 여자.

버릴 게 생기면 다시 오세요.

천국은 그들의 머리를 떼어 지상으로 힘껏 던진다.

 

비가 오려나.

어떤 사람이 물방울을 맞았다.

그날 비는 오지 않는다. 그래서 한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

 

물방울을 맞은 사람이 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

 

오늘의 구름은 양떼구름

외국에서는 물고기의 비늘이라고 부른다.

 

그래, 천국에서는 하늘과 초원과 바다가 섞여 있지만

그래도 양과 물고기는 있다.

 

양몰이 개와 그물은 없다.

 

 

 

세련/차도하

 

 

이국적인 문양을 갖고 있는 접시를 잘 닦아서 유리장 안에 넣어놓듯이 시를 쓰세요

 

그녀의 시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는

방치된 공원의 쓰레기통 같은

오래된 병원에서 재사용하기 위해 주사기를 모아놓는 상자 같은

질염 찌꺼기가 가득한 보지 같은 시를 쓰고 싶었다

 

요즘 젖가슴이라는 말을 누가 쓰나요?

중년 남성이 쓴 시를 놓고 트위터 사람들이 욕을 하고 있었고

그녀는 자신의 시에 젖가슴을 쓰기로 결심했다

 

모유가 나오지 않는 엄마의 젖가슴을 악착같이 빨던 그때처럼

아직도 자신의 젖가슴이 얼마만 한지 모르고 작은 브래지어를 입는 할머니처럼

부드러움이라곤 모르고 젖가슴을 마구 주물러대던 남자친구처럼

 

그녀의 시를 합평할 때는 선생님도 학생들도 난감해 보였다

도발적이네요, 하지만 이게 꼭 필요한 표현일까요, 누구누구의 시를 읽어보셨나요,

그런 말이 오가다가

어떤 학생이 결심했다는 듯

이건 이미, 끝난 시예요

이렇게 말했을 때

 

유리장에 금이 갔다

 

하지만 그녀는 유리장 따윈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시 수업이 끝날 때까지 개근했다

사람들이 추천한 세련된 시집을 사서 읽어보았다

 

좋아해보려고 했지만 잘 안됐다

 

세련된 시집에는 빛이 너무 많이 나와서 눈이 멀 것 같았다

 

 

 

미래의 손/차도하

 

이 시에는 공원이 등장하지 않고, 시인이 등장하지 않으며, 사랑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시에는 공터가 등장하고, 중학생이 등장하며, 등장할 수 없는 사랑이 등장한다.

 

중학생은 공터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공원은 금연구역이기 때문에, 공터는 비어있는 터이기 때문에 공터, 그렇다면 중학생의 마음도 공터, 공터인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랑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하기 때문에, 중학생은 자신이 사랑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을 떠올리면서 담배를 피우고.

 

담배는 아빠에게서 훔친 것. 아빠는 사랑할 수 없는 것. 가족이란 사랑할 수 없는 것. 친구도 애인도 사랑할 수 없는 것. 선생과 제자라면, 신과 신도라면 더더욱 사랑할 수 없고. 사랑을 떠나서. 그 모든 관계가 아닌 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지 중학생이 생각하는 동안

 

담배는 필터까지 타들어 가고. 중학생이 고개를 조금 숙이고 담배와 연기를 바라보는 동안. 세상의 필터도 조금씩 타들어 가고, 세상의 모든 관계가 지워지고, 그리하여 모든 공간이 지워지고. 비어있는 곳 빼고 모든 것이 지워져서.

 

세상엔 공터만이 남았다.

 

공터에 덩그러니 혼자 서서. 담배를 피우거나. 울거나. 쪼그려 앉아 있는 사람들만이 남아

세상은 한층 조용해졌고. 중학생이 문득 고요를 느끼고, 담배를 버리고 신발로 그것을 짓이기고 하늘을 바라볼 때, 하늘은 저녁에서 밤으로 색깔을 바꾸고. 세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고.

 

원래란 뭐지?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 원래대로라면 중학생은 담배를 피우면 안 되고. 중학생은 담배 냄새가 빠질 때까지 산책을 좀 하다가 집에 들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담배 냄새는 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중학생이 하는 질문은,

 

혼을 낼까? 혼을 내지 않을까?

 

예측할 수 없는 체벌.

 

중학생의 마음을 공터로 만들게 한.

 

그러나 우선은 공터에서 빠져나와 담배 냄새를 빼기 위해 산책을 하기로 하고, 중학생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다가

 

주머니 속에서 어떤 손을 잡았다.

 

그것은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선생도 신도 아닌

시를 쓰게 될 중학생의, 미래의 손.

 

하지만 지금 이 시에는 시인이 등장하지 않고

 

주머니 속에 깊게 손을 찔러 넣은 중학생이 당신을 지나치고 있을 뿐이다.

 

시집 미래의 손2024.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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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하 / 1999년 경북 영천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재학 중 2020한국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산문집 일기에도 거짓말을 쓰는 사람(2021), 2023년 가을 타계한 뒤 시집 미래의 손(2024) 출간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