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흔(躊躇痕) / 김경주 외 주저흔(躊躇痕) / 김경주 몇 세기 전 지층이 발견되었다 그는 지층에 묻혀 있던 짐승의 울음소리를 조심히 벗겨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발굴한 화석의 연대기를 물었고 다투어서 생몰연대를 찾았다 그는 다시 몇 세기 전 돌 속으로 스민 빗방울을 조금씩 긁어내면서 자꾸만 캄캄한 동굴 .. 시 모음 2013.12.05
하늘 그물/이명 하늘 그물/이명 대웅전 처마가 그물에 걸렸다 그물코 사이로 군데군데 새들의 빈 집이 보인다 제석천의 그물에는 매듭마다 아름답고 맑은 구슬이 달려 있다는데 구슬은 서로를 비추고 있어 한 개의 구슬에 모든 구슬이 다 머물고 있다는데 단청에 거소를 둔 새들은 당분간 노숙을 해야 .. 시 모음 2013.03.29
흰 그늘 속, 검은 잠 (외 1편)/조유리 흰 그늘 속, 검은 잠 (외 1편)/조유리 한 삽 푹 퍼서 언덕 아래로 뿌리면 그대로 몸이 되고 피가 돌 것 같구나 목단 아래로 검은 흙더미 한 채 배달되었다 누군가는 퍼 나르고 누군가는 삽등으로 다지고 눈발들이 언 손 부비며 사람의 걸음걸이로 몰려온다 다시 겨울이군, 살았던 날 중 아무.. 시 모음 2013.02.08
비유법/이규리 비유법/이규리 방과 후 날마다 비유법을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이 계셨다* 비유법을 밥처럼 먹던 시절 있었다 비유는 하나로 여럿을 이해하는 일이야 노을이 철철 흘러 뜨거워서 닫아거는 저녁에 우리는 서쪽 창가에 앉아 흰 단어들을 널었다 나뭇가지에 서늘한 시간이 척척 걸리곤 했다 .. 시 모음 2013.02.08
뿔/천향미 뿔/천향미 나는 뿔이 갖고 싶었다 이른 봄 머위 햇순처럼 모 없이 둥근 뿔 하나 갖고 싶었다 내 뿔에 들이받힌 상처 부위마다 솔솔 향기 퍼지는 그런 뿔 하나 갖고 싶었다 어릴 적 풀 먹이던 우리 집 뿔난 염소 길고 무섭지만 뿔끝이 돌돌 말려 어느 누구에게도 뿔질 한번 못해본 허울뿐인 .. 시 모음 2013.02.08
-엄마의 집/이서린- -엄마의 집/이서린- 엄마의 그것을 보고야 말았다 차마 바로보기 민망한 순간 한 호흡 쉬고 바라보는데 문득 마주친 엄마의 눈빛 그 무성한 숲은 어디로 갔을까 지아비 받들고 새끼들 쏟아내던 깊은 우물과 숲을 거느린 엄마의 집은 언제부터 비었을까 할머니 이쪽 다리 들어보세요 예, .. 시 모음 2013.01.09
살아 있는 집/김상미 살아 있는 집/김상미 나는 아주 낡고 허름하고 오래된 집에 산다 고장 난 수도꼭지를 갈면 배수구가 막히고 배수구를 고치면 변기가 막히고 변기를 뚫으면 이층 베란다에 고인 물이 천장으로 스며든다 방 안 가득 쌓인 책은 버려도 버려도 다시 쌓이고 창틀에 낀 먼지는 울부짖는 침묵처.. 시 모음 2013.01.09
귀신고래회유해면 / 권수진 귀신고래회유해면 / 권수진 우리들이 밑줄 친 수평선 어디쯤인가 잃어버린 바다의 문장에 대해 고래가 쓴 필적을 따라가 본다 행간과 행간 사이로 흐르는 파도는 울산만 해변에 목차를 펼쳐 놓고 당신이 필사한 두꺼운 전집 어느 한 구절에서 귀신고래의 훈독은 멈추었다 망망대해 뒷장.. 시 모음 2012.12.04
얼굴 반찬 外1편/ 공광규 얼굴 반찬 /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 시 모음 2012.09.23
자전거에 바람 넣기 / 손택수 자전거에 바람 넣기 / 손택수 겨우내 타지 않던 자전거에 먼지가 뿌옇다 그 사이 마흔 넘은 내 엉덩이처럼 맥없이 축 처진 타이어, 비루먹은 짐승 같다 구석에 처박아 놓았던 펌프를 젖 물리듯 타이어 꼭지에 꼽는다 창밖에선 나무들이 한참 땅거죽 속에 봄바람을 집어넣고 있다 땅거죽 속 씨앗들을 들.. 시 모음 2011.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