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잠 시 4편

시치 2015. 4. 29. 23:41

못 위의 잠/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 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 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내 잠은 당신 잠의 다음이다/ 황학주

 

하루가 두 번의 잠을 잔다.

오늘은 그 중 당신의 잠 속에서 자는 잠이 일찍 왔다.

눈 오는 날이라서

 

아무리 봐도 배꼽에서 나간 것인

당신의 하늘 반지에

손가락을 끼워보거나

검게 익은 정금 열매 굴러간 앙가슴의 길로

첫 키스를 찾아 뛰어들 수 도 있다.

하얀 눈 지붕 밑에 눈 뜨는 것으로도 감는 것으로도

우리 사랑할 수 있다.

지친 새들이 눈밭에 쓰러진 것 같은 눈빛으로 웃는다는 게

바로 그런 것처럼

 

그렇다하여도

당신 잠은 내 잠보다 먼저이다.

얘기를 들어주듯 아픈 당신을 재워야 하기 때문이다.

 

눈이 오는 날이라서

당신을 지키듯 혼자 집 지키는 사람

잠 속에서 마른 모닥불이 지펴졌다.

 

 

아름다운 잠/ 고증식

 

우리 어머니

눈 감기 사흘 전에

곡기 딱 끊으셨다

 

몸부터 깨끗이 비워낸 뒤

 

평생의 외로움과

일체의 미움 버리고

비로소

깊은 단잠에 드셨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평온한 얼굴로

 

 

새우잠-아버지/ 김경윤

 

아버지 잠든 아버지의 등은 새우를 닮았다

열 여섯 어린 나이에 바닷일을 배워

평생을 갯바람 속에서 살았다

 

그의 생애는 이제 낡은 폐선처럼 기울고

등댓불도 없는 밤바다를 헤매듯 목숨 걸고 살아온

청태靑苔같은 젊은 날이 바다 속에 썩었지만

그는 아직도 돋보기 너머로 낡은 그물코를 깁고 있다

 

언제나 등 따순 세상을 만나 허리 펴고 잠들 수 있을까

오늘도 웅크린 아버지의 잠 속에는

콜록콜록 밤기침 소리만 높다

'시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배롱나무 시 모음  (0) 2015.09.18
겨울 백담 / 이상국   (0) 2015.05.11
帽子 詩 보기  (0) 2015.04.18
[스크랩] 2012 제4회 천강문학상 대상 수상작 / 우수상 2편  (0) 2015.03.29
빈집 시 모음  (0) 2015.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