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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빈의 잔

시치 2021. 8. 24. 11:47

루빈의 잔

 

 

루빈의 잔

                                          박남희

너와 나 사이에 잔이 있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잔과 우리 사이에는 명암이 존재한다

누군가 잔에 무엇인가를 채우고 간다
잔을 볼 수 없고 우리만 보인다
명과 암, 전경과 배경의 이중성이 우리의 눈을 속이고 있다

우리를 버릴 때 잔은 보인다
잔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잔 속에 든 것은 우리의 것인가
잔은 캄캄하고 때로는 환하다
잔의 윤곽 속에 우리가 있다

우리를 자세히 보니
너와 나는 이목구비가 똑같다
너는 나이고 나는 너인가
너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거울이 존재하는가
잔 속에 가득 채워진 것은 거울인가

누군가 거울 속의 너를 시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나도 시인이 된다
누군가 너와 나의 윤곽을 보고 있다
잔의 이미지를 읽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소망하던 것은 잔인가
우리가 마주 보아야 존재하는 저 잔,
어쩌면 신비스러운 말이 가득 들어있을지도 모르는
저 잔을 들어 마실 손이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