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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치 2015. 4. 18. 00:51

모자


   오명선

 


   1

   나무들이 모자를 벗는다. 나무는 바람 한 점에도 흐느낀다. 나는 이제야 나무를 읽는다. 제 살 한점 도려내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고 다시 제 살점으로 되돌아가는 나무. 나는 배경보다 풍경이 되기 위해 얼마나 허둥댔던가. 술렁이는 바람에 수십 번의 계절을 앓았던가.

 

 

  2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나 토성동 항암사로 간다. 다음에 만나면 스님이라고 불러.”

  자궁암 말기의 내 친구. 낙엽은 계절이 쓰는 유서가 아니라 별에 닿기 위한 유일한 통로라며 활짝 웃는다.

  꽃이 필 무렵, 그녀가 방사선실에서 나왔다. 머리에 어둠을 꾹꾹 눌러썼다. 그녀가 덮고 있는 어둠이 백지처럼 깊어서 환하다.

 

 

 

―계간『시로 여는 세상』(200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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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채호기

 


모자라는 단어가 있다.
단어에서 그녀가, 물컹, 생겼다
모자 쓴 그녀가 저기 산길을 간다.
책 속에 모자가 그녀를 가리킨다.
따라잡을 수 없다. 그녀가 앞서 간다.
발밑에 뾰족한 돌이 발바닥을 지그시 누른다.
그녀의 허리 밑 허벅지 위에 두 개의 돌
지금 그녀를 보고 있는 이 시간처럼 단단하다.
돌이란 단어를 들추면 그녀가 도둑게처럼 달아난다.
돌을 밟으면 몸속에 그녀의 말이 울려
터질 듯 팽팽해지며 그득해진다.
그녀의 목소리, 녹색의 새로 피어나는 잎
그늘 밑을 걸어간다. 그녀의 그늘에 젖어
처음 생긴 그녀를 알고 싶다.
가쁜 호흡이 그녀에게 말한다.
말없이 땀이 솟고 손안에 잡혀 두근거리는
새처럼 심장이 그녀의 등에 닿는다.
그녀가 돌아본다. 보라색 엉겅퀴 꽃이
회녹색 줄기 위에서 차분하다.
그녀가 말한다 공동묘지 사이
한 무리 금잔화 위로 바람이 지나간다.
가볍게 손을 흔드는 노란색들
노랑이란 단어가 동공을 물들인다.
노란 현기증이 몸에서 빠져나와
산 위를 활공한다.
공기를 저어 나아가는 노란 해
그녀의 금빛 얼굴이 물 위에 뜨고
앞서 가는 그녀의 뒷모습 위에
재빠르게 노을의 커튼이 떨어진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열매들
부리에 머금어본다
돌이 그녀를 누르고 있다.
흘러가는 그 문장 위에서.


 

 

―계간『문학과 사회』(201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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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송찬호

 

 

난 어떤 밀고자를 알고 있다

저기 그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다

벌써부터 그의 머리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난다

 
귓속으로 한 움큼 동전이 쏟아진다

자, 보세요 얼마나 잘 익었는지……

그러나 난 아쉽게도 이 빵을 모자로 뒤집어야 한다

 
난 모자 앞에서 늘 망설이는 편이다

아름다운 여자 아름다운 집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처럼

난 하나의 모자를 고른다, 그렇게

한 권의 훌륭한 책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헤어져야 할 날이 올 것이다

내 고단한 몸을 누일 때 그것이

머리 위로 천천히 들어올려지겠지

죽은 나비를 집어올리듯이

 
저기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다

보라,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내 인사는

이것을 만지작거리며 반가워하는 것이다

이 경의를, 빵 굽는 냄새 나는 이 모자를

 

 


―계간『시와 세계』(2011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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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임성용

 


집은 내가 눌러쓴 모자와 같다
나는 일을 찾아 집을 나왔다
일 주일에 한 번씩, 주말이면
나는 멀찍이 벗어놓은 집으로 간다
갈 때마다 모자는 헐겁다
모자 속에서는
내가 돌보지 못한 아이들이 놀고 있다
아내는 나에게
최소한 가족들이 함께 쓰고 다닐 추억을
모자가 걸린 벽에
못으로 박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몇 번인가 못질을 해봤지만
내가 살고 있는 집의 주인은 따로 있다
월 이십만 원짜리 임대아파트
나라에서 나에게 너그럽게 빌려준 모자는
나라를 지킨 옛 장군의 동상, 투구처럼
한번 쓰면 쉽게 벗어던질 수 없다
더구나 함부로 못질을 하기엔
옹벽이 너무 튼튼하다
저 동상의 모자를 절대 벗겨낼 수 없듯이
나는 어렵게 마련한 내 집과
신체의 일부로 굳어져버린 작업모를
가장 딱딱한 머리에서부터 깨뜨려야 한다
내 모자는 아직 투구가 되지 못했다

 

 

 

―계간『실천문학』(200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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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김길나

 

 

그는 항상 모자를 비뚜름히 쓰고 다닌다

그의 원시는 상대방의 정면 시선과 엇나간다

그의 왼손 악수는 상대방의 오른손과 엇갈린다


직립병은 치유되어야 한다고

머리 아래로 모자를 쓴 그가 땅을 짚고 팔뚝으로 불끈

일어선다 꽉 차고 텅 빈 허공에 발바닥이 빠진다

직립을 수정하는 뿌리들이 위태롭다

강경한 것들의 기둥이 위태롭다

그의 두 발 위에서 새가 날아다닌다


모자가 그를 벗고 바닥으로 떨어지자

집 한 채가 모자를 벗는다 지붕이 벗겨졌으므로

견고한 고정 칸막이가 노출된다

방마다 쪼개져 담겨진 벌거숭이가 노출된다

쪼개진 오른 쪽과 왼쪽 사이에 벌거벗은 불화가 발각된다


마침내, 집 부수는 일이 업인 그의 현장에서

요동치는 것은 사각달이 부푸는 사각틀유리창

매몰되는 것은 집의 뼈대가 뽑혀 나온 붉은 구멍들 

그리고 와해되는 것은 동서남북 사방벽


잔해가 쌓인 그의 현재는 폐허다

현재 안으로 미래를 불러들이는

그의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월간『현대시학』(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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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위에 모자
―M에게


김지녀

 
 

이러다가 무너지겠어

북극의 빙하처럼, 배고픈 얼굴
 

손이 닿지 않는다
 

언제부터 거기에 서 있었니? 너의 모자 속에 왜 내가 들어가 있니?

선반 위에 벽 위에 생각 위에 층계를 쌓고

올라가는 사람 한 발씩, 우리로부터

멀어지는 사람

무엇이 녹고 있니?


첫 번째 얼굴


너의 이름에는 안개의 뉘앙스가 있다

썩어가는 과일의 내부처럼, 끊어낼 수 없이

자라나는 힘이 있어


얼굴에 얼굴을 부비고

혀를 대본다, 너는 식고 있구나

머리칼이 딱딱하게 굳어간다
 

손이 닿지 않는다
 

무얼 감추고 있는 거니? 언제까지 거기에 서 있을 거니?

모자를 쓰고

모자 위에 모자를 쓰고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계간『작가세계』(201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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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를 사랑하는 사람들


최금진
 

 

모자 값이 오르면 증시가 오르고 덩달아 농산물 값도 오르고

밭에다 야채를 가꾸듯 모자를 자식들 머리에 심어줍니다

왜 처음부터 인생을 잘 벗어서 선반 위에 올려놓지 않았냐고요

그건 모자의 흑백논리입니다

울타리를 넘어 모자 한 송이를 몰래 꺾었다고 칩시다

그것은 살인죄가 아니지만 부끄러운 일입니다

어머니는 모자를 벗어 예를 표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모자의 무게 때문에 척추가 휘어진 농부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장자에게 모자를 물려줍니다

과일을 파는 사람들이 향긋한 꿈은 언제나 뒤집어 쓰고 다니듯

모든 모자는 반드시 불행해야만 한다, 건국 오천 년을 맞는

우리의 모자보호법입니다

시집올 때 쓰고 온 모자 안에 어머니가 몰래 텃밭을 늘려가는 것처럼

무덤 같은 하늘을 쓰고 비를 피하는 모자들은 쓸쓸합니다

초립을 쓰고 일생 떠돌며 모자에 대한 시를 쓴 사람도 있습니다

산사의 범종 밑엔 새들이 모자를 벗고 앉아 떨고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시장에서 비싼 모자 앞을 오래 서성일 때

부디 모자를 벗고 서로 인사를 나누며 웃어주세요

우린 모자 앞에서 기하학적인 어떤 사랑의 형상을 배웁니다

 

 

 

―계간『시와 시』(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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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모자


임영조

 


나의 새해 소망은
진짜 '시인' 이 되는 것이다
해마다 별러도 쓰기 어려운
모자 하나 선물 받는 일이다


'시인' 이란 대저,
한평생 제 영혼을 헹구는 사람
그 노래 멀리서 누군가 읽고
너무 반가워 가슴 벅찬 올실로
손수 짜서 씌워주는 모자 같은 것


돈 주고도 못 사고 공짜도 없는
그 무슨 백을 써도 구할 수 없는
얼핏 보면 값싼 듯 화사한 모자
쓰고 나면 왠지 궁상맞고 멋쩍은
그러면서 따뜻한 모자 같은 것


어디서나 팔지 않는 귀한 수제품
아무나 주지 않는 꽃다발 같은
'시인' 이란 작위를 받아보고 싶다
어쩌면 사후에도 쓸똥말똥한
시인의 모자 하나 써보고 싶다
나의 새해 소망은.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1 (제6시집 시인의 모자)』(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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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엄한 모자

 

 이기홍

 


오늘 예식장에 그를 데려가기로 합니다
그는 내 가슴속에 살면서도
맨 위에 올라가 군림하기를 좋아합니다
어쩌면 그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 내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주는 그가
차갑고 근엄한 얼굴을 치켜들면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가
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립니다
예식장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도
나보다는 그에게
더 깊은 관심을 표하기도 해 속이 몹시 상합니다
이제 그가 없으면 나는
사람들의 괄호 밖으로 밀려날지 모릅니다
그래서 난 왜 그의 보디가드가 됐습니다
그의 뾰족한 코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진 않을까
낯선 바람에라도 끌려가 낭패를 당하지 않을까
조금도 맘 놓지 못하고 그를 지켜봐야 합니다
슬그머니 내 위까지 올라와 상전이 된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나 나는 이렇게
나와 다르게 살아야 하나요
그를 몰아내고 청바지 입기를 좋아하는
나를 데려올 수는 없나요

 

 

 

―《200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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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는 왜 써

 

최치언

 

 

모자는 왜 써? 당신의 말엔 백 가지의 이야기와 천 가지의 전설과

만 가지의 싸움이 시작될 수 있는 불온성이 있죠

싸움 끝에 누군가는 모자를 찢어발기겠고

이야기 끝에 누군가는 상점으로 달려가 모자를 쓰겠죠

전설이야 적당히 이 둘을 합쳐 이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모자를 만들면 될 테고.

오! 그렇다고 해도 모자는 왜 써?

또 이런 질문을 황당하게 하신다면 여기엔 백 가지의 사랑이

있을 수 있고 천 가지의 살인과 만 가지의 감옥이 들어있지

않겠어요.

사랑은 모자 뒤편에서 은밀하게 시작하고 그 모자가 핑계가 되죠

그럴싸한 천 가지의 핑크빛 모자를

증거물로 제출하는 건 수사관의 몫이지만 그 분도

모자를 쓰셨겠죠 공평하지 못한 살인사건은 감옥에선 만 가지로

공평해지죠,

빌어먹을 모자는 왜 쓰냐니까! 내 그럴 줄 알고

다음 대답을 준비했는데 그 질문엔 백 가지의 어리석음이 있을 수

있고 천 가지의 지혜와 만 가지의 허무가 있겠죠

허무가 만 가지 정도 되니 백 가지의 어리석음이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단지 모자를 태양과는 상관없이 쓴다는 건 필시

지혜일 텐데 만 가지에서 천 가지를 뺀다고 해도 구천 가지가

허무이니까 태양과 상관이 있겠네요.

그렇담 내가 당신에게 물어보죠

왜 모자를 쓰지 않죠?

당신이 이 질문에 대답을 못하는 것엔 백 가지의 생각과 천 가지의

이데올로기와 만 가지의 노동이 들겠네요

백 가지의 모자가 백 가지의 생각을 하겠죠 그런 혼란을

피하려고, 한 가지의 모자를 주장한 것이 천 가지의 이데올로기

겠는데,

이게 다 모자를 왜 쓰는가에 대한 실천적 질문이므로

만 가지의 노동이 들겠네요

오! 그래요 노동이야말로 모자를 만드는 위대한 일이죠 일이 끝난 뒤엔

삐딱하게 모자를 눌러쓰고 식기판 같은 얼굴로 더운 빵을

뜯어먹는 거죠.

이 빌어먹을 새끼야 밥 먹을 때 모자를 왜 쓰고 있냐고

당장 벗어!

아! 그 모자가 이 모자였습니까? 이렇듯,

모자란 쓰고 있지 않는 자들에겐 백 가지의 분노와 천 가지의 의심과

만 가지의 부러움이 있겠죠, 그럼 실례!

  

 

 

―계간『시와 사상』(201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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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짚모자 영화관


박제천

 


밀짚모자 영화관을 아시는지요

토막 낸 16밀리 영화필름으로 양 테를 두른
밀짚모자,
그 모자 덮어쓰면, 차르르 돌아가는 햇빛 영사기,
내 머릿속 내 일생은 아랑곳없이 밀쳐내고
영화 한편 돌아갑니다

한 남자에 두 여자거나 한 여자에 두 남자
그도 아니면 환과고독, 하나같이
멋지고 슬픈, 비극이고 희극인 인생이랍니다
(나 역시 저와 같으리)

세상에 나지 말라 그 죽기가 괴로우니
세상을 버리지 말라 새로 나기가 괴로우니
더 줄이면, 죽기도 살기도 모두 괴로워라
원효 스님의 한 말씀 생각납니다

나도 한 말씀, 죽고 삶을 나눔이 부질없는 일,
기분 나면 영화 필름 갈아 끼고
마음대로 인생을 골라 사는 이 재미,
그 밀짚모자, 40년 지난
오늘, 내 추억 모니터에 나타났어요
오늘부터 저 밀짚모자, 잠잘 때마다 쓰고 자렵니다

 

 

 

―격월간『유심』(2009년 3-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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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모자가 떨어진 날

 

박미산

 

 

지금 계신 곳은 따뜻한가요?

우리의 계절은 겨울뿐이었지요
내가 혼자 있는 곳은 여전히 겨울이에요, 너무도 익숙한
오늘은 흑백영화를 한편 돌릴까 해요
이화동 사거리의 카페가 보입니다
키가 큰 남자가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갑니다
흔들리는 겨울과 젖은 어깨가 위태롭습니다
줄줄이 흘러내리는 낡은 스크린
초록빛 모자의 불빛이 꺼집니다
여자 주인공은 보이지 않고
남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터를 옮겨봄이 어떠냐고, 아기도 함께
그대의 말이 푸른 강으로 분분하게 달려갑니다
수면 위에 떠오르는 마음이 파닥거렸어요
여자에게 주인공은 그대가 아닌 엑스트라 아이였지요
아기를 안은 여자는 눈물이 너무 깊어 강을 건너지 못했어요
기다림에 지쳐 취한 그대
푹 꺾인 머리, 긴 다리, 뼈마디 마디,
그대로 초록빛 모자에 흐릅니다
그때 흘러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데
영화필름은 자꾸 돌아갑니다, 그대
겨울이 한 칸쯤 남아 있나요?
가슴 한가운데 따뜻한 부장품처럼, 혹은
유품처럼 차갑게?

 

 

 

―계간『시와 사람』(200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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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의 기원

 

서영택

   

 

1.

모자가 사람을 만든다

나를 삼켰다 뱉는 모자

바람이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아주 작은 불꽃 하나가 모자를 바꾼다

 

대의명분을 앞선 권력의 모자를 쓰기 위하여 진흙탕 속에서 춤을 추었다 칼은 역사의 불꽃, 어

둠을 밝히는 빛, 모자들의 화려한 군무다

 

욕망의 큰 모자를 쓰고 한바탕 잘 놀아보는 일이다

 

2.

모자는 누군가의 모자였다

 

침입자들은 순식간에 대궐을 점령하였다 머리에 義를 두르고 칼 찬 병사들 모자를 벗어야할 때를 안다 달이 질 때를 알듯이 역사는 모자 하나의 차이

 

역사가, 왕이 바뀌었다 모자가 제 주인을 알아본다

 

죽지못해 살아야하는 왕이 머리를 숙인다

바닥에 닿도록 모자를 숙이는 일,

 

모자의 안과 밖

빛나는 영광과 비굴한 모욕이다

 

모자를 썼다 벗는다

 

세상이 있었다 사라졌다 한다

 


                     

―웹진『시인광장』(201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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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모자를 쓴 아이

 

김명은
   

 

대원사로 가는 꽃길이 멀다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가면 보인다 석상이 된 아가들의 빨간 모자

이슬도 없는데 정수리를 가린 모자

보넷을 씌워주고 싶은 검게 그을린 얼굴

 

아가야 아가야 여길 봐

 

한아름의 꽃이 꽃가위에 토막토막 잘리는 것 같았다

기도하듯 웅크린 태아의 두 팔이 잘렸다

자른 다리와 떼어낸 내장과 탯줄이 쌓였다

나는 아프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픈 곳을 만질 수가 없었다

햇살이 쇠붙이의 손끝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어디선가 숨비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나는 고무젖꼭지마저 물릴 수 없었다

혼자 일어난 달이 허리를 꺾고 일그러졌다

 

나와 아이는 버려졌고 나도 아이를 버렸다

용기에 담긴 핏덩어리에 대해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구척의 태안지장보살 품에 안겨 있는

저 아기가 내 아이는 아닐까

바람이 연잎을 감싸 안는다 개구리밥이 꼼지락거린다

연못 속의 얼굴이 나를 보고 있다 빨간 모자를 썼다

 

 


―격월간『시사사』(2013년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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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모자

 

여성민 

 

 

날아든 적 없는 새가 보였다 귀퉁이에서 어른거리는 새를 찾아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방 안에

방이 있다 들어갈수록 방은 점점 작아진다 아주 가벼운 모자처럼

 

방은 몇 개의 모자로 만들어지는 걸까 모자 안에서 퍼덕이는 새소리 히브리

 

제사장들은 새를 쪼개지 않는다고 너는 말해주었지 이해할 수 있니? 새를 찢으면 두 개의 귀가

생기는데, 왼쪽과 오른쪽, 찢은 책이거나 구름, 두 개의 귀를 붙이면 새는 추락해?

 

비밀을 하나 말해줄게 새를 쪼개면 흉터가 된다 오래 전 하나의 흉터가 폭발했을 때 너는 흘러

나왔다

비밀을 감추기 위해 눌러쓴 모자처럼

 

얼굴의 한 쪽이 흘러내리면 너의 흉터를 보여줘 얼굴을 뒤집어서 모자로 씌워줄게

 

모자를 쪼개면 구석과 구석으로 분열한다 구석을 뒤집어쓰면 불 꺼진 예배당 들어가면 자꾸 속

죄할 일이 생겼다 새를 쪼개고 나오면 멀리서, 빛

 

 

 

―계간『예술가』(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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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모자를 쓴 사내

 

문신

 


바람이 불어 흔들릴 때마다
빨간 모자를 쓴 사내, 제 발 밑에 구름 떠 있는 줄 모르고
휘이익- 휘파람을 불었다 옆구리에 걸어놓은 물동이에서
비눗방울 몇 개 비명처럼 날아오르고
그래도 믿는 건
하늘 어디쯤 매달린 동아줄 한 가닥
그는
먼지 앉은 유리창을 힘주어 닦는다


언제나 아래로만 내려가는 삶
더러는 윤기 나는 생활을 꿈꾸기도 하면서 그 사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닦는다
세상의 얼룩은 찌들어만 가는데
삶은 왜 이렇게 가벼워지기만 하는 걸까
닦고 또 닦아도 선명해지지 않는 얼굴이 있어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 간신히 매달려 있는 낯선 사내 울 듯 말 듯
그 사내 서둘러 마른걸레로 훔쳐낸다
누가 그에게 동아줄을 내려주었을까
가끔씩 허리를 묶은 동아줄을 확인하면서....
제 삶을 확인하면서
그 사내
비눗방울 같은 휘파람을 분다
또 한번 줄을 풀고 내려가면
거기에도 흐린 얼굴 하나 떠 있을 거야
흔들리면서 그 사내 바람이 된다


걸레질을 멈추고
잠깐 생각의 끈을 놓았을 뿐인데
빨간 모자를 쓴 사내
어느덧 구름 위에 떠서...
휘파람처럼 메아리 없이 떠서
그이 삶처럼 습기 많은 먹구름을 닦고 있다

 

 


―《2004년 신춘문예 당선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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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모자

 

김미정

 

 

10년 만에 그들이

그 사람들이 또 나타난 것이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낯빛이 어둡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른다고 하신다

아버지에겐 뭔가 말 할거리가 필요하신 걸까

 

침대 모서리에 앉아

지붕에서 물이 샌다며 투덜거린다

천정에 침을 뱉는다

  

비가 연일 쏟아지던 그날들

신발들이 퉁퉁 불었다

굵은 우동가락을 나무젓가락으로 건져 올린다

너무 불어터져 내 얼굴이

비로소 제 모습을 가질 때

거울을 샀다

옛날부터 갖고 싶던 깨진 거울

이제야 제대로 보이는 군

한쪽 눈을 안대로 덮은 비둘기가 말한다

 

구구 구구 아버지가 손을 떨며 침대를

두드린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던가

지붕이 열리고

장맛비는 거리를 내달리고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보았다던

그 모자 쓴 사람들이

 

 


―계간『시와반시』(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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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모자를 조문하는 법

 

최호일

 

 

꿈을 꿀 때도 노란 모자를 쓰고 있었지 노란 모자라고 불렀던 그 여자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크다

 

곱창과 소주 생각이 나서 곱창에 소주 마시는 생각을 했다

시간은 느리게 갈 것이고

밤은 덜 익은 곱창처럼 질기고 소주는 너무 써

물방울무늬의 암세포가 시간의 덩굴처럼 아름답게 자라는

누우면 젖과 젖 사이가 멀어지는 여자

 
서른여섯이니까 하늘을 봐요

같은 병실에서 잠이 드는 게 지루하고 미안해 별을 보고 말했다

 
별은 단순하고 쓸쓸한 쪽에서 빛난다

 
먼 부부처럼 밥을 따로 떠먹으며

그녀와 함께 바람 부는 날 소주에 곱창을 먹을 확률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 생각들은 형광등 불빛으로 멀리 새 나가

더 먼 곳에서 사라진다

 
안녕, 노란 모자

노란 모자가 불이 켜지는 냉장고 위에 놓여 있다

죽음에 무사히 도착하려면 모자를 벗어야지

 

누가 내 혀를 잘라서 가지고 있는지

요즘 소주는 싱거워

 

 

 

―계간『미네르바』(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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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모자
 

신철규

 

 

모자는 언제나 나의 머리 꼭대기보다 높은 곳에 있습니다

나는 모자의 하수인입니다

 
모자에서 팔다리가 나오고 몸이 불쑥 솟아납니다

얼굴은 가장 나중에 나옵니다

당신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까르르 웃습니다

 
모자 속에는 많은 것을 숨길 수 있습니다

늘씬한 미녀

카이저수염을 기른 독재자

둥근 민머리

가끔 얌전하게 숨어 있던 비둘기가 날아가기도 합니다

 
모자를 쓰면 왠지 편안해집니다

모자를 쓴 사람에게는 함부로 말을 걸지 않습니다

 
모자를 벗으면 사람들은 겸손해집니다

벗은 모자를 가슴에 안고 굽실거립니다

걸인들은 자신의 머리맡에 모자를 놓고 엎드립니다

 
어젯밤 꿈속에서 당신은 모자를 쓰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당신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모자만 떠 있었습니다

당신은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처럼 모자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갔군요

 
당신이 써놓은 메모를 찢어서 모자에 넣습니다

다시 손을 넣어 꺼내 보면 나의 심장이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공중에 뜬 모자가 걸어갑니다

 

 


―계간『시와 사상』(201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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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이야기

 

남진우

 

 

내 낡은 모자 속에서

아무도 산토끼를 끄집어낼 수는 없다

내 낡은 모자 속에 담긴 것은

끝없는 사막 위에 떠 있는 한 점 구름일 뿐

내 낡은 모자 속에서 사람들은

파도 소리도 바람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깊은 밤 내 낡은 모자에 귀를 갖다 대면

기적 소리와 함께 시커먼 화물 열차가 달려 나오기도 한다

내 낡은 모자를 안고 오늘 나는 시장에 갔다

하지만 해 저물도록 아무도 사는 이 없어

나는 구름과 놀다가 기차를 타고 훌쩍

머나먼 사막으로 떠났다

 

누군지 모르는 그대여

내 낡은 모자를 사다오

달리는 화물 열차 끝에 매달려 오늘도 나는

내 모자를 쓸 그대를 찾아 헤맨다

 

 

 

시집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2006,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