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상. 추천,당선작

2021년 《현대시학》 신인상 당선작 _ 유정 / 박서영

시치 2021. 12. 24. 23:22

 

 

 

코프만 씨 아아아 1(외 4편)/유 정

 ⸺코프만 닮은 코프만 씨

 

    

 

 

얼마 전 이사 온 나의 유쾌한 이웃은

반려견을 코프만 씨라고, “코프만 씨 이제 잘 시간이에요”

그런 그를 주민들도 코프만 씨라고, “코프만 씨 안녕하세요”

두 명의 코프만은 늘 똑같은 옷과 비슷한 식사를

단정한 동작과 함께!

 

점점 늘어나는 코프만

아마존 앵무새, 납작머리개구리, 긴팔원숭이 등

기체에 문제가 있었지만,

아비앙카 항공은 브라질산 열대식물을 코프만 씨 집으로 배달

이름이 열여덟 글자인 잎들은 안개를 등지고 베란다 맨 왼편으로!

한편, 대리석 현관을 건너온 붉은 악어는 욕조 안에서 첫날밤을

⸺18번째 코프만

 

마을에 퍼진 소문

〈직원 모집, 코프만 씨 코프만들을 코프만 씨처럼 돌볼 사람 구함〉

 

최종 합격자 18명.

담당 3

“코프만 씨가 저 녀석들을 모두 코프만이라 부르지?”

담당 7

“아니야, 조금씩 발음이 다른 것 같아.”

담당 16

“아니야! 다 똑같애.”

 

여행에서 돌아온 코프만 씨

그의 실크옷 주름처럼 금이 간 화분,

“어떤 코프만이 그랬어?”

일제히 그를 쳐다보는 코프만

“어떻게 된 거야!”

모든 직원의 대답

“그게요, 코프만이 코오프만을 때려서

다른 코푸우만이 코오우프만과 싸우다가,”

“그만!!!”

 

다음 날, 코프만 씨는 코프만이 되었다

 

 

 

코프만 씨 아아아 2

 ⸺18분의 1

 

 

 

바비큐 파티에서 돌아온 나의 주인이

햄 덩어리를 창틀에 걸어 놓았을 때,

러시아산 굵은 총탄은

내 두꺼운 등을 긁어주던 소녀 에바의 잠을 깨웠다

나는 부쿠레슈티*의 거리로 내몰렸다

혁명은 도시를 덮쳤고,

내 뒤로 햄 덩어리가 떨어졌다

 

항로를 몇 번 바꾼 노란 비행기는

줄무늬 지붕의 저택으로 나를 안내했다.

주인의 실크 침대가 불편했던 나는 살며시

네 번째 욕조로 가서 첫날밤을ⵈ

그날, 이 나라의 저녁 뉴스는 다음 사실을 보도

⸺5년간 한강에서 인양된 시신 1000구 넘어ⵈ

“7~8월에 집중”

직원들의 멍청한 발음에 쫓겨난

나의 다음 정착지는 정육점.

보직은 야간 경비.

1mm씩 몰래 목줄을 끊어갈 무렵,

밤마다 로아**에게 피를 바치는

검은 피부의 마들렌 여사와

그 어깨 위의 가짜 새는 나를 응시했다

“저것도 팔아요?”

 

사인 : 대퇴부 골절 및 과다 출혈(지문 없음)

용의선상 : 턱수염에 집착하는 정육점 주인

눈썹 없는 헬스 트레이너

최근 욕조를 개조한 마들렌 여사의 전남편

 

다음 날, 상가 입구에 붙은 전단지

〈오늘부터 악어고기 판매〉

⸺원산지 모름, 가격 협의

 

 

*루마니아의 수도.

**부두교 신령.

 

 

 

코프만 씨 아아아 3

  ⸺코프만 속의 코프만 씨

 

 

 

그는 제 나이보다 서른 살쯤은 더 먹은 사람처럼

힘 빠진 손으로 느릿느릿 글을 쓰곤 했다

 

그가 글을 쓰는 오후는

거리를 배회하는 개와 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리며 그의 집 앞에 모여드는 시간

 

그가 만든 주인공도 그를 닳아서인지

겁 많고 동물 좋아하는 늙은이였다

 

코, 오으, 푸우, 마아암

늦은 밤 그의 코 고는 소리는

그의 동물들에게 창작보다 더한 고통으로 다가왔다

 

주민들은 항상 지친 모습의 그를

관심 어린 눈으로 지켜봐 주었다

 

옆집 누군가는

빈 욕탕 속에서 가만히 누워 있는 그를 발견하고

숨을 헐떡이며 경찰에 신고했다

부적절한 상상의 죄목으로 즉결심판 3일 구류형

 

또 다른 옆집의 누군가는

어정쩡한 자세로 화분을 밟고 서 있는 그를 발견하고

황급히 동사무소에 민원을 넣었다

화분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죄목으로 50만원 벌금형

 

또 다른 옆집의 누군가가

바나나 속살을 한 입 베어 문 그를 발견하는 순간,

그는 그 누군가를 향해 울분을 토했다

“그만!!!”

 

그날 밤,

그는 자손들이 자신의 몸을 갈기갈기 찢는 꿈을 꾸었다

 

 

 

코프만 씨 아아아 4

  ⸺코프만을 사랑한 코프만

 

 

  

서로를 다르게 부른 코프만

네로와 페로

 

먼저 수컷 강아지가 암컷 고양이 이름을

“페로, 페로야, 심심하지?”

그때마다 엉덩이를 치켜들고 돌아서는 페로

그 자리에 눈꽃처럼 붉은 털이 떨어지고

“난 네로라고 할게. 네로, 안 심심해?”

달이 밤을 지나갔다

 

네로는 매일 페로를 쫓아다녔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커다란 주석 브로치가 덜렁거렸다

 

온몸에 퍼지는 어지러운 향

늘어나는 네로의 흉터

그리고 늙은 피부에 스며드는 피

 

당시 여장에 심취한

코프만 씨가 코프만들을

모두 내쫓았을 때,

끝에서 두 번째 줄에

서 있던 네로는 페로를 잃어버렸다

 

네로는 동네에 늘어선 자동차 아래를

동굴처럼 지나가며 페로를 찾았다

비를 피해 들어간 정육점에서는

18번째 코프만 시체를 보았고,

문득 떠오른 놀이터에서는

새로 수집된 다른 코프만들의 행렬을 목격

 

빠르게 섞이는 트럼프마냥

네로의 젖은 발은 다시

인파 속으로 향했고,

 

축 처진 엉덩이에는

페로의 젊은 손톱자국만

빗살로 그어져 있었다

 

 

 

코프만 씨 아아아 5

  ⸺코프만 씨를 닮은 코프만

 

 

유언대로 코프만 씨 장례식에

코프만들은 없었다

사인⸺심장마비,

깊은 숲속

메뚜기 모양을 닮은 관棺

하늘이 코프만 씨 얼굴에 떨어졌다

“우리 기도합시다”

 

예배를 마친 유족 8인은

코프만 씨 줄무늬 저택을 차지

현재 코프만 수 17,

한 마리 실종,

 

코프만들은 점점 식욕을 잃어 갔고

매일 계속되는 유족들 잡담

“나는 굴뚝새보다 굴뚝새 사진을 더 좋아해”

 

일요일이 네 번 지나고

따분함을 느낀 아들의 제안

〈창작 동물 콩쿠르〉

“우승자에게 아버지 유품을 드리겠소”

 

그리하여 코프만들의 몸이 색종이처럼 잘려 나가고 다시 그 조각들이 뭉쳐 팔이 되고 다리가 되는데 그 중 머리는 하마의 둔부요, 몸통은 야자의 체목體木인 짐승이 펠리컨 날개를 퍼덕이자 기립박수를 받으며 최우수작으로 선정되니 그 이름을 두고 이렇게 고민하는지라

 

유족 3

“저걸 대체 뭐라고 부르지?”

 

유족 1

“머리가 하마니까 하마라고 불러야지, 안 그래?

 

유족 5

“무슨 소리야, 몸통이 야자니까 야자라고 하자.”

 

유족 4

“멍청하긴, 하야페라고 불러야지.”

 

유족 7

“그렇게 멋대로 붙이면 되냐?

결국 노인네가 키우던 녀석들이잖아. 이놈도 코프만이라고 하자.”

 

잠시 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작품명 코프만으로 결정

 

  

▲유정 / 2021년 〈현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셜록 홈즈』 『에거스 크리스티』 『게임메뉴얼』 등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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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할 땐 코인빨래방으로 가요 (외 4편)/박서영

 

 

조심히 다루어주세요

이제 막 태어난 신상이에요

왼쪽 옆구리를 뒤집으면 취급주의 라벨이 붙어있어요

 

햇살70% 분홍리본22% 주근깨8%

고온금지 비틀기금지 좌절금지

 

아르바이트는 두 개를 해야 해요

아르바이트 천국인 나라 거주민이거든요

잠이 부족해요

빨래는 쌓여가고 다크서클이 눈가를 검게 덮어요

하얀 셔츠는 까만색과 가까운 목은 자주 어두워지고

허리는 자주 고장이 나요

 

우울할 땐 코인빨래방으로 가요

쌓인 걱정을 모아 집을 나와요

커다란 곰 인형 노란이불이 따라와요

세탁 바구니를 뒤지면 나를 증명할 수 있을까요

시간을 믿어도 될까요

취업은 언제일까요

 

원하는 코스를 골라주세요

사용은 어렵고 시집이 멀다면 애인을 구하세요

애인의 가슴에 몸을 열고 버튼을 누르세요

애인이 돌아갈수록 하얀 꿈은 부풀고

밤은 가까워져요

코인 수만큼 여러 애인을 가질까요

빨래방은 24시니까요

 

 

 

다섯 방

 

 

 

어디에

거울이 깨어진다

내 머리 어디에 둔 걸까?

 

배캠을 들으며 퇴근한다

노을 속으로 길을 잃어버리기 좋은 시간

여긴 어디지

어디가 출구일까

지하철은 왜 은하철도를 꿈꿀까

 

탁발

환한 봄날 마을로 내려간다

만발한 꽃밭에 놀다가 탁발바가지를 잃어버린다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

빙글빙글 돌아가는 수화물 벨트 위

캐리어는 도착하지 않는다

 

길은 길을 잃는다

플라밍고 노을이 타오르는 라 콘차 해변

바다는 밤보다 어둡다

구두를 벗고 맨발이 되어가는 바다

바다가 바다를 찾고 있다

 

백야

밤이 밤을 본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

휘파람을 불면 립스틱은 짙어지고

빨강 구두는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자신을 살해한다

 

 

 

오후의 화병

 

 

 

수국은 변덕이 심하지요

아침엔 보라였다가 밤에는 파래져

 

고양이 울음소리 들려요

고양이를 화병에 꽂아요

울음을 꽂으면

가을장마가 시작되어요

 

엄마는 화병에서 시들어 가요

물을 갈아도

엄마의 얼굴은 피어나지 않아요

아빠는 집에 언제 올까요

아빠를 잘라 식탁에 올려놔야 하는데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누구도 보이지 않아요

 

햇볕이 빈방을 비추어요

잘린 목들이 화병에서 반짝여요

 

 

 

Never, Never, Land

 

 

 

까만 밤은 춥고 창문은 무서워요

엄마 없는 우리는 곰 인형을 안고 산책을 가요

 

요정의 손톱이 창문을 두드려요

팅커벨이 밤하늘에 마법의 가루를 뿌려 놓아요

피터 팬의 손을 잡고 네버랜드로 날아가요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우린 자라지 않을 거예요

 

네버

네버

 

미혼모의 성곽은 높고 위험해요

아빠 없는 아이들이 버려지고 있어요

전쟁이 필요해요

네버랜드를 열자

완다 블랙켓 가모라 그루트 마블 히어로가 등장해요

 

멀리서 나팔 소리 들려오고

쇠갈고리 반짝이는 후크 선장이 나타나요

절정은 자정이에요

자정에는 모두를 용서해요

 

째깍째깍 시계를 삼킨 악어가 잠들고

우리는 침대에 누워요

 

밤은 어둡고 내일도 창문을 열어둘게요

 

 

 

고양이와 정글짐 

 

 

 

메타세쿼이아는 꽃이 없지 꽃 없는 바람이 건반을 두드린다 악보를 넘기며 날아오르는 새들 새들의 머리카락과 먹구름이 몰려오는 공원, 놀이터에 빗방울은 번지고

 

고양이는 정글짐에 갇혔지 파란 눈빛의 러시안블루 머리를 숙이고 다리를 구부리고 정글짐 안으로 네모난 하늘이 울면서 따라오지

 

미로가 쌓여 가는 하늘, 하나씩 상자를 열수록 추워진다 여기는 겨울일까 왜 이렇게 추운 방에 몰래 들어온 걸까 언제부터 고양이가 되어버렸는지 아무리 울어도 아무리 뛰어도 출구는 보이지 않지

 

상자 안에는 고양이가 남고 고양이 안에는 고양이가 울고 우는 고양이 앞에 나는 아이가 된다

 

어둠이 밀려온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키 큰 나무가 정글짐으로 성큼 걸어 들어온다 꼭대기에는 파란 밤하늘이 걸리고 내가 쌓은 천 개의 정글짐에 천 개의 고양이는 울고

 

 

▲박서영 / 2021년 〈현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심사위원 _오민석, 김금용, 조대한

 

 

 

                     ⸺격월간 《현대시학》 2021년 11-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