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상. 추천,당선작

2021<시인수첩>신인상 당선작 _ 이진양

시치 2021. 12. 24. 23:16

수많은 굴뚝의 집 외 4편 / 이진양

 

 

가족들은 불에 달군 대못을 입에 물고서

다르게 망가지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창밖에서 나는 쓰러진 나무의 우뚝 선 그림자였는데

나무의 죽음을 조용히 바라보았는데

 

희미한 노래만큼만 몸을 지우면

내게 꼭 맞는 나무 관이 눈앞에 남겨져 있다

 

사라진 개들이 황급히 돌아오는 저녁

나는 개들의 사나움을 크고 작은 열매로 맺는다

얼떨결에 방황은 완성되는 것 같아

불붙은 집은 공장처럼 검은 연기를 뿜어대고

 

가족사진에는 윤곽만 남은 얼굴들이

수많은 굴뚝들을 올려다보고 있다

 

이따금 굴뚝 위로 지친 새가 떨어지고

어지러운 구름마저 떨어지고

 

몸을 버린 목소리들은 집 밖으로 흘러나와

관이 된 나무에 못을 박고

 

지난겨울 굴뚝 아래서 선물을 기다리며 몸을 떨던 아이

나는 그곳에 열매를 떨어뜨리며 조금 더 어두워진다

  

 

 

변신의 귀재 

 

  

 

소년 만화 거꾸로 읽는 서사를 이해하고는

꺼진 전등만 다시 보는 관리인의 하루였습니다

비록 커다란 쥐로 변해가는 느낌이

나의 전부는 아니었지만요

 

찌에 매달린 낚싯대로 살아본 적 있으신가요

누가 또 장난을 치는 것 같은데

호수의 물결마저 조용해지면

소스라치고 싶어서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숨을 곳 찾아 헤매는 패잔병의 호기심은 영롱하고

베개가 많아야 잠을 청할 수 있는 미래의 혼자처럼

태양이 많아야 알 수 없는 질투는 심해지겠죠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뼈가 많은 사람은 몰라요

 

뼈가 하나뿐인 눈사람이

자신의 팔목을 빛내기 위해서

얼마나 성실하게 기다리는지

 

눈이 먼 것도 아닌데

남산타워 자물쇠 걸어두던 손들은

가볍고 무거운 이름들에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고요

내일이면 그것 역시 움켜쥔 손이어서

 

맛있는 요리를 해 먹을까요

알록달록 파프리카 썰어보지만

눈물은 말라서 씨앗이 되어버렸네요

차마 자라지 못한 표정들은 도마 위에서

버려질 위기에 처해갑니다

 

나는 변신의 귀재예요

 

기다리지 않는 당신에게서

도망도 잘 다녀요

 

 

 

조련 

 

  

 

물 흐르듯이 사람은 사물을 닮아갑니다

물 흐르듯이 사물은 사람을 기억합니다

 

언젠가 물 위에 의자를 세워둔 적이 있었습니다 의자는 움직이지도 않고 물을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해는 떨어지고 밤은 커다란 손아귀를 펼쳤습니다 두려움에 휩싸인 의자는 오래전 자신에게 고여 있던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물 흐르듯이 기억도 흘러가고

 

차라리 보살필 수 있는 것이라

어둠을 단정하면

 

흐르는 것들은 모두 개의 형상으로 변해갔습니다

 

컹컹, 어떤 개는 온종일 짖기도 하고

킁킁, 어떤 개는 하릴없이 냄새를 맡기도 했습니다

 

한때 의자에 번갈아 앉아 있던 우리가 그 개들을 받아 적었습니다 두 손에 물을 모아 흐르지 않는 물 위로 물 흐르는 글씨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알아볼 수 없지만 같은 하루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서

 

우리 중 누군가는

존재하는 모든 개들을

한 마리 개로 기념하기 위하여

목줄을 잡아당기기도 했습니다만

 

개들은 어둠의 손아귀를 기억하고

자꾸만 어딘가로 흘러가고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믿지 않아서 그것들을 만지며

하나둘 개로 변해갔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개처럼

 

첨벙거리는 발자국으로

빛에 흠뻑 젖은 마음으로

 

새벽마다 물과 닮지 않은 것을 찾아 떠돌았습니다 잠시 의자에 앉아 쉬지도 못했습니다 오늘도 변해가는 것들은 참을성을 길러갑니다

 

 

 

산책하는 슬픔 

 

 

  

귀에 익은 허밍을 듣고서

테라스에 나온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구경하는 건

양 떼를 잃어버린 소년의 후련함일까

 

보이지 않는 건 영원할 수 없어

혼자 하는 베개 싸움의 한복판에서

터지는 깃털 터지는 냉담

선명한 인상을 지키려는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로비 직원들의 카드놀이는

겨울 장미로 시들어가고

 

산책할수록 나는 무너진 계단이었다

 

턴테이블 선율에 빠져

잔해와 잔상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가끔은 초점 없는 표정을 확대하고 싶어

그걸 걸작이라 우기고 싶어

무명 감독의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이 숲은 영원히 드넓어지는 감옥이었다

 

마음은 내가 없는 곳을 걷는 중이다

처음 만난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면 뒤섞이는 불안들을 수갑으로

서로를 묶어두었던,

 

너는 아무렇게나 물들어가고

 

뒤돌아보면

날 닮은 카메오는 훤히 비치는 유리를 뒤집어쓰고 있다

폐기물 스티커가 너덜거리는 나무 의자처럼

실내를 그리워하며

 

처음 가는 방향에 중독되는 건 쌓아온 시간이 녹슬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간에선 이따금 낡은 운동화 냄새도 난다

 

 

 

컨트롤러 

 

 

  

내 눈은 유리와 어울리지 않는다 내 몸은

브라운관에 갇혀 일그러지는 환상을 겪는다 내 시선의 경유지에는

 

파도가

살아난다고 믿으면서

온종일 따라 하는

야자수

 

얼굴색을 푸르게 바꾸며 나는 혼잣말한다 이 섬에도 수많은 채널들이 있고 채널을 돌릴 때마다 등장하는 유명 가수가 다르며 그들은 서로의 잊혀가는 노랫말을 훤히 꿰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완성하지 못한다 매일 밤 호텔에 머물며 처음 마주치는 누군가를 떠올릴 뿐이다 그렇게 깨진 유리처럼 쌓아두었던 이미지가 닳아갈 무렵,

 

너는

화면 속 흔들의자에 앉은 아이가 되어

나를 바라볼 것이다

 

여유롭게 움켜쥔 잔 속에

조용한 바다를 흔들며

 

어른이 된 것처럼 나를 흉내 낼 것이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유명 가요를 허밍할 것이다 그때서야 나는 야자수의 하루를 헤아릴 것이다 다시 한 번 느끼지만,

 

내 눈은 바다와 어울리지 않는다 내 몸은

파도의 포말로 사라지는 기억을 앓는다 내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아이가 주머니에 구겨 넣고서

잊어버린 노랫말

 

내가 잊은 척

아이의 얼굴로

따라 불렀던 노랫말

 

우리가 모래사장에서 마주친대도 그걸 함께 부를 수는 없겠지만

 

창문 너머 파도가 오고 있다

 

파도가

조종하는 나를

닮아간다

 

 

 

▲ 이진양 / 본명 이진영. 1993년 경기도 광명 출생. 국민대학교 연극영화과 졸업. 2021년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

 

 

 

|| 심사평 || 삶의 진정성과 이미지의 선명성

 

 

   이번 제10회 〈시인수첩 신인상〉 공모에는 여러 분의 예비시인이 자신들의 시간과 공력을 온전히 바친 가작들을 보내왔다. 이러한 커다란 관심은 이미 시단에 무게감 있는 신인을 다수 배출해온 《시인수첩》의 매체적 위상을 알려주는 동시에 가볍지 않은 지표로 이번에도 남기리라 생각된다. 예심을 통과해 올라온 아홉 분의 작품을 여러 차례 읽으면서 심사위원들은 문장과 사유의 양면에서 남다른 개성적 성과를 보여준 이진양 씨에게 주목하였고 그의 「수많은 굴뚝의 집」 외 4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진양 씨의 작품은 오랜 창작 이력을 암시해주었다. 「수많은 굴뚝의 집」은 가족 서사를 바탕으로 그 안에 담긴 페이소스를 “다르게 망가지는 노래”와 “윤곽만 남은 얼굴”의 이미지로 직조한 선명한 작품이었다. 무료하고 어둑한 이미지와 어법이 교차하면서 수많은 굴뚝들을 지치고 어지럽고 어두워지는 흐름 속에 맞춤하게 배열한 작품이었다. 이어 펼쳐진 작품들도 상상력의 원심을 최대화하여 “패잔병의 호기심”(「변신의 귀재」)이나 “빛에 흠뻑 젖은 마음”(「조련」)의 흐름을 격정적으로 노래하거나, “처음 가는 방향에 중독되는”(「산책하는 슬픔」) 스스로를 다잡으면서 “내가 잊은 척/ 아이의 얼굴로/ 따라 불렀던 노랫말”(「컨트롤러」)을 되새겨주었다. 회상과 상상, 외상과 내상, 어두운 기억과 밝은 환상이 조화를 이루면서 이 신예시인의 미래를 기대해봄 직하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진양 씨는 오랜 습작 시간을 남몰래 간직한 젊은 신인이었다.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과 개성적 문장에 공을 들인 점도 매우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시를 한 편 한 편 써가는 기율과 방법에서도 삶의 진정성과 이미지의 선명성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시인수첩》이 선택한 이번 결과가 우리 시의 미학적 편폭을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를 바란다. 당선을 마음 깊이 축하드리면서, 더욱 단단한 안목과 기량을 통해 젊은 신인다운 지속 가능성을 구현해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본심 위원_ 고두현(시인), 유성호(문학평론가, 글)

 

 

본심 대상 작품(총 9명, 67편)

 

우리가 아는 폼페이와 모르는 Pompei 외 4편

여자의 바다 외 4편

폭설 외 9편

그을린 적의 외 4편

엉덩이 눈 외 9편

사과와 식탁 외 11편

2분짜리 데탕트 외 4편

카뮈의 햇빛 조각 외 4편

수많은 굴뚝의 집 외 9편

 

예심 위원_ 이인철, 이지호, 정연홍 시인

 

 

 

               ⸺계간 《시인수첩》 2021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