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시

제16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작품- 무서운 꽃 외 4편/오늘

시치 2021. 8. 31. 14:49

 무서운 꽃 

 

   사랑하는 빨간 의자가 죽었다

 

  휘청거리는 나무와 서서 바라만 보는 너와 너무하다고 하는 나, 접힌 페이지의 중간부터 불의 상징을 지나는 중이야 그러므로 나는 목각인형이야 한껏 줄을 비튼다고 해서 그게 춤이 되겠어 슬픔에 비트가 붙으면 더 빠르게 몸을 훑는데, 미는 힘이 부족해서 서로에게 갇혀 있나 봐 어쩌다 그늘을 열면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내가 보일 거야 내 낡은 손목을 기억하니? 자꾸만 엉키는 영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첫 페이지에 앉아서 빗줄기를 긋고 싶은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래 지상으로 묶인 줄이 풀리면 재빠르게 공중으로 사라지는 꽃의 사람들 어제는 목련의 줄이 풀렸고 오늘은 장미의 줄이 느슨해지고 있지 내 향을 기억하니 너의 하루에서 지우고 싶은 것이 뭐야 내 몸에 단물이 배어 있을 때 붉게 사라지고 싶어 난 사과를 먹을 거야 이제부터 짓는 모든 죄는 사과 때문이지

 

 

 

전지적 앵무새 시점

 

 

1

전시된 앵무새가 쓰러져 있다

 

쓰러져 있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선을 빠르게 넘어와

세워놓는다

다음 사람이 쓰러진 앵무새를 보기 전

쓰러지고 싶은 작가의 의도를

반듯하게 세워놓는다

 

날지 않을 수는 있지만

쓰러진 것은 참을 수 없어

눕히고 눕혀도

세워놓는다

 

2

박제된 배경으로 어둠이 선다

직립들이 앵무새의 깃털 위로 쓰러진다

 

혀 밑에 숨긴 울음을

새장에 넣는다

앵무새의 울음소리만 빼고 다 넣었는데

모든 소리가 앵무새의 울음이었다

 

길어진 부리를 자르고

하늘로 앵무새를 날린다

 

날려도 되돌아와

갇힌다

날리고 날려도

울음을 짚어 갇힌다

 

울음을 세워놓으면

직립들은 쓰러질 수 없다

 

3

쓰러진 작품을 본 사람은 사라지고

부리가 잘린 채 되돌아온 앵무새가

빗장을 세워놓는다

 

 

 

다정한 우울

 

 

  당신의 다정에는 너무나 많은 의자와 신발이 있네 의자가 많아도 지문이 없는 내 우울은 앉을 수 없어 다시 맨발로 돌아가네 의자의 방향이 바뀌는 동안에도 비현실적으로 내 다정은 길고 길어 무릎걸음을 걷다 고개를 묻네 내게 입 맞추기만을 기다리네 남겨진 다정으로 불안을 접고 또 접네 날마다 다른 다정의 무게가 우울의 방향을 무너뜨리네 유리로 만든 집에서 나와 나무 한 그루 자라네 당신이 물을 주는 나무에게서 숨을 곳 없도록 나는 키워지고 당신은 견고한 미소를 짓네 유리 밖으로 누군가는 걷고 누구인지 종일 통화만 하네 당신의 다정은 받는 사람을 이루고 걷거나 부족한 채로 잠들게 하네 그럴 때면 우울은 다정을 녹이는 쓸모가 되네 문득 당신에게서 다정은 툭 떨어지고 나의 우울은 밤새 서성이네

 

 

 

물고기 밥은 언제 주나

 

 

 

고개를 순하게 끄덕이다가 질문에 갇혀 와삭, 힘겹게 아니라는 말을 베어 물면 손바닥을 파고드는 맥거핀 괜찮아 나는 언제나 네가 예견하는 것들의 필요가 되고 너는 위치를 바꿔서라도 내게 중요한 무엇이 되지 물고기가 좋아서 나무를 키우고 의자를 만들고 나무 그늘 아래 앉고

 

나무가 키운 풀들을 안아야 물고기를 키우지 시클리드는 시클리드 수마트라는 수마트라만 두어야 한다는 경고를 지나친 건 미안해 단지 어항이 하나였을 뿐 우리도 한 어항을 쓰지 네 갈증은 흐트러짐이 없고 원하는 대답을 내가 안 하기 때문이라며 시클리드는 시클리드 수마트라는 수마트라 알아듣겠는데 쟤네 밥 좀 주고 어항 하나를 더 가져오면 안 될까? 그 사이에 서로를 죽일까?

 

우린 한 어항을 쓰고 어항 하나는 더 필요 없지 괜찮다는 말 속의 혐오를 알아듣기까지 참 오래 걸렸네 내 대답은 네 온도가 필요해서 점점 어항 속이 사나워지나 봐 코코넛 은신처를 두고, 수초와 함께 모서리가 없는 돌멩이를 넣고 밥 먹으라고 부르는 것은 너를 사랑한다는 나의 긴 대답이지

 

 

 

 

그녀가 사마리아에 간 이유

 

 

 

거울 속으로 들어가

실금에 몸을 맞춰보는 뱀 한 마리

어쩌면 둘, 셋

아직은 아니야

소유의 힘은 강하고

서로를 끌어당긴 말랑한 직관

 

그녀의 등을 닦을수록

뿌옇게 번지는 실금과

점점 맞아가는 뱀의 간격

어느 날의 그녀가

서럽게 울었던 건

봄이 덧칠되는 꿈속으로 뛰어든

목소리를 품었기 때문이지

 

미안해, 내가 사과를 던졌어

 

*

 

허공이 가진 투명한 어둠 그 어둠이 무서워서 튀어나온 첫 마디, 간절하고 단단한 주문

 

*

 

붉은 눈동자가 저물 때 울음 끝에서 맴을 도는 통증, 늦봄이 흩날리고 있었던가, 놓지 못하는 단 한 가지가 놓아야만 하는 유일한 한 가지였어 단 한 번 웃어줬을 뿐인데 주저 없이 생을 걸고 내게로 왔던 그녀의 등을 끌어안으면 말랑하게 따뜻해서 눈물이 나

 

밀어낼수록 잠기는 지독한 이생의 구간을 지나면

나 낳지 말고

아빠도 낳지 말고

 

사랑해

엄마

 

 

 

 

 

오 늘 (시인)

 

2006년 계간 <서시>로 등단

2015년 한국문예진흥기금 수혜

2020년 제10회 시산맥작품상

2021년 제16회 지리산문학상

시집 <나비야, 나야>(2017년 세종우수도서)

저서 <윤동주의 시에 나타난 멜랑콜리 연구>

 

 

 

[2021 지리산문학상 심사평]

 

  매년 여러 문학상의 수상자가 발표되고 찬사와 다름없는 심사평이 덧붙지만, 어떤 문학상은 현재의 작품보다는 오히려 수상자의 지난 문학적 업적과 평판 뒤에 따라붙은 후행적인 포상같이 여겨지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것이 상의 성격에 따라 가능한 것일 수도 있지만, 최근 문학상을 둘러싼 형태가 다른 여러 논란들은 어쩌면 바로 그런 지점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닐까 고민해본다. 문학상은 경기를 끝내고 단상 위에 서서 목에 거는 메달이 아니라, 치열한 시작의 과정 한가운데 숨이 가빠 오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이를테면 마라톤 주자가 자신이 어디쯤 왔는지 언제까지 달려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바로 그 순간 어떤 이가 불쑥 건네는 시원한 생수 한 병 같은 것이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적당할 것 같다.

  그런 마음으로 올해 지리산문학상 본심은 곽재구 시인을 위원장으로 하여 정윤천, 김중일 시인이 맡았다. 무기명 원고 뭉치들을 사전에 전해 받아서 검토했다. 오직 작품집 원고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본심에서 논의된 시인은 총 일곱 분이었다. 올해부터 시집 한 권 분량의 원고가 접수되었다. 이런 점 때문에 단 몇 편의 작품으로 수상자를 결정하는 것보다는 현시점에서 훨씬 더 완결된 시 세계를 면밀히 점검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일곱 분 모두 이미 저마다 나름의 작품 세계를 의미 있게 구축하고 있었다. 몇 편의 작품만으로 수상자를 결정해야 했다면 다소 곤란했을 정도로 인상적인 작품들을 시인마다 포함하고 있는 시집 분량의 원고들을 심사회의를 기다리며 되풀이해 읽는 과정은, 적잖이 소요되는 시간을 기꺼이 감수할 만큼 즐거운 경험이었다. 앞서 말했듯 일곱 분의 작품집에 포함된 각자의 장기가 극대화된 이른바 인상적인 대표 작품들이 그저 완성도 높은 단편에 불과한지 아니면 한 권의 작품집 속에서 어떤 의미 있는 포지션을 구축하고 있는지 나아가 응모된 모든 작품들의 시적 의미를 대표하고 포괄하고 배가시키고 있는지를 살폈다. 결과적으로 이번 지리산문학상을 통해 개성적이고 완성도 높은 한 권의 시집이 탄생할 수 있을지에 대해 더 큰 기대감을 갖게 하는 작품집을 선택하고자 했다.

 

  충분한 원고 검토 시간을 거쳐 최종 심사회의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된 작품집은 최정란, 강재남, 오늘 시인이 보내온 것이었다. 세 분으로 압축하기까지는 어렵지 않았으나 최종 한 분을 정하는 토론과정에서 공동수상이 잠시나마 거론되었을 정도로 우열을 정하기 어려웠다. 우열을 정하려는 의도를 내려놓은 토론이 이어질수록 자연스럽게 수상자가 결정되었고 심사위원들은 이견 없이 흔쾌히 동의했다.

  최정란의 『공중사원』은 생과 사 사이에 있는 폭발할 듯한 유무형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힘이 대단하다. 편차는 다소 있었으나, 특히 「무적」 등의 작품은 ‘무의 세계’가 펼치는 향연이라고 할 만큼 인상적이었다. 시어를 변주하며 이미지를 확장시키는 능력이 돋보였다.

  강재남의 『초원의 물기를 요약하니 다시 기린,』은 무엇보다 직관적인 언어 운용이 돋보였다. 나름의 시적 언어를 발명하고 감각적으로 배치하여 운영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탄력 있고 간결하며 더러 발랄하기까지 한 리듬과 동시에 행간에 스며있는 깊은 슬픔의 정서가 인상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

  오늘의 『봄밤은 수많은 출구를 열어놓는다』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큰 편차 없이 시적 호흡이 안정적이면서도 동시에 흥미로워 읽는 이를 시종 자연스럽게 집중시키게 하는 힘이 있다. 즉 단지 언어를 운용하는 감각이 좋은 것을 넘어, 작품마다 자신만의 상상력 그 자체가 시적 호흡을 자연스럽게 자아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런 특징은 다양한 소재를 매력적으로 가공하는 능력과도 연결된다. 요컨대 한 편의 시를 넘어 한 권의 시집으로 판단했을 때 전반적인 요소에서의 균형이 고루 수준 높게 가장 잘 어우러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시적 상상력이란 무엇일까. 시적 상상력에 우열이 있을까. 시인이라면 누구나 시를 작동시키는 나름의 상상력이 있다. 다만 시인의 상상력이란 것에는 타자를 끌어들이는 인력의 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인력의 강도 또한 독자마다 다르게 느끼고 반응할 것이다. 수상자를 포함한 시인들의 작품에 대해 굳이 상대적인 아쉬운 점을 거론하지 않은 이유다. 말하자면, 이번 심사과정은 상대적인 우열을 가렸다기보다는 본심의 작품집들이 이번 심사위원들을 끌어들이는 인력의 강도를 측정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수상 자격이 이미 충분한 미수상 시인들에게 아쉬움을 전하며, 이번 수상자에게는 더욱 힘센 정진을 부탁드린다.

 

  이번 제16회 지리산문학상은 전국 163명의 시인이 보내온 시집원고를 가지고 1차 2차 예심을 거쳐 일곱 분의 작품을 본심위원께 무기명으로 전달하였다. 당일 심사위원들은 각각 2명의 번호를 불러주었고, 가장 점수가 높은 세 편의 작품을 가지고 심사를 하였다. 관련자들은 다른 방에서 대기를 하였다. 심사위원 세 분이 심사를 끝내고 결과를 발표하였다.

 

심사위원장 곽 재 구

심사위원 정 윤 천

심사위원 김 중 일(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