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시

2021년 제21회 고산문학상 시부문 본상 수상작

시치 2021. 10. 2. 00:57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김승희

 

 

친절한 사람

꼭 나를 속이는 것만 같아

친절한 사람은 피하고만 싶다

진실한 사람

내가 들킬 것만 같아

진실한 사람 앞에선 늘 불안하다

 

나는 친절하지도 진실하지도 못하다

속에 무엇이 있는지 본심을 모르는 사람은 무섭고

진심으로 오는 사람은 진실의 무게만큼 무겁다

변심을 하는 사람은 위험하고 변심이 너무 없는 사람도

박제… 아니다, 아니다, 다 아니다

 

차라리 빨리 나는 단무지나 베이컨이 되고 싶다

진심은 복잡하고 입체적인데

진심을 감당하기엔 내내 모가지가 꺾이는 아픔이 있다

내장과 자궁을 발라내고

단무지나 베이컨은 온몸이 조용한 진심이라고 한다면

진심은 한낱 고결한 사치다

말하자면 본심의 배신이자 돼지머리처럼 눌러놓은 꽃이다

 

프로이드의 박물관처럼 본심은 어둡고 원초적이고

진심 뒤에는 꼭 본심이 도사리고 있는데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진심이 아니라 본심이다

거기까지는 가보고 싶지도 않고 숨겨진 본심이 나는 무섭다

과녁에서 벗어난 마음들을 탁 꺾어버릴 때 나오는 진심,

허심이란다

적어도 단무지는 뼛속까지 노랗고 베이컨은 앞뒤로 하양 분홍 줄무늬다

 

무엇을 바라는가

내일이 없는지 오래 되었는데

무엇을 바라는가

진심이 바래 섬망의 하얀 전류가 냉장고 속에 가득 차 있는데

무엇을 바라는가

단무지와 베이컨 이후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무엇을 무엇을 무엇을 더 바라는가

 

 

 

 

모란의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모란이 핀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세상 모두 숨 죽여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멀리 모란의 숨결이 불어오는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한밤중에 홀로

경련으로 몸이 출렁이는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뭐 이런 시간

뭐 이런 절벽

뭐 이런 벼락

죽을 수도 있는 시간

죽어가는 어떤 시간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숨을 죽이고

꿈틀거리는 심장 홀로

모란만 남는 그런 시간

모르는 숨결이 슬쩍 칼처럼 지나가는 시간

모르는 숨결이 슬쩍 칼처럼 들어오는 시간

무슨 시간

그런 시간

모란이 핀 시간

무슨 시간

그런 시간

망할 놈의

모란이 뚜욱 떨어지는 시간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칼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밤

할머니 혼자 사는 어둠에 묻힌 집

뒷마당 부엌문 쪽에서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나서

관절에 고드름이 서걱이는 다리를 끌고

할머니는 부엌문을 열어 보았다

 

하얀 개가 방금 태어난 새끼를 입에 물고

할머니한테

새끼 낳은 소식을 전하려 했다

할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앞으로 쏟아지며

새끼를 두 손으로 받아 안았다

 

품 안에 새끼를 안고

할머니는 앞마당으로 나가 보았다

비닐 휘장이 젖혀진 개집 속에

다른 새끼 네 마리가 모락모락 김을 내며 누워있었다

 

고생했구나, 혼자 애를 낳았구나

할머니는 어미 개의 머리를 자꾸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했다

맛있게 미역국을 끓여

호호 불며 두 손으로 어미 개 앞에 놓아 주었다

새끼들이 조롱조롱 어미의 젖을 물고 있었다

 

 

사랑의 전당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것이다

회색 소굴 지하 셋방 고구마 푸대 속 그런 데에 살아도

사랑한다는 것은

얼굴이 썩어 들어가면서도 보랏빛 꽃과 푸른 덩굴을 피워 올리는

고구마 속처럼 으리으리한 것이다

시퍼런 수박을 막 쪼갰을 때

능소화 빛 색채로 흘러 넘치는 여름의 내면,

가슴을 활짝 연 여름 수박에서는

절벽의 환상과 시원한 물 냄새가 퍼지고

하얀 서리의 시린 기운과 붉은 낙원의 색채가 열리는데

분명 저 아래 보이는 것은 절벽이다

절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절벽까지 왔다

절벽에 닿았다

절벽인데

절벽인데도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

절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

낭떠러지 사랑의 전당

그것은 구도도 아니고 연애도 아니고

사랑은 꼭 그만큼

썩은 고구마, 가슴을 절개한 여름 수박, 그런

으리으리한 사랑의 낭떠러지 전당이면 된다

 

 

오월 모나리자의 미소

 

타버린 숯에서만 흘러나오는 절창이 있다

뼈를 대패로 깎으며 살아온 세월이 있다

재학아, 문재학아,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날

아들을 찾으러 도청에 나갔어요

도청에서 나를 만난 재학이가 말해요

엄마, 창근이가 죽었는데 나만 집에 가면 되겠냐고 물어요

엄마는 할 말이 없었다

친구가 죽었는데 내 아들만 데리고 가면 되겠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도청에서 나 혼자 나왔어요

재학이는 그 날 도청에서 죽었어요

(내가, 내가…… 사람일까요?)

(이런 사람도…… 어머니일까요?)

하얀 민들레 밭을 머리에 인 오월 어머니는

피렌체의 모나리자보다 더 아름답다

거느릴 것 다 거느리고 누리는 평화가 아니라

살아서 육탈한

그 가슴에 신에 대한 질문을 가졌기 때문에

흰 민들레 같은 어머니의 잔잔한 미소는

인간의 법정에서

인간의 얼굴들을 하얗게 만들었다

뼈를 대패로 깎으며 살아온 시간

움직이지 않는 절대 그 날, 오늘도 그 날,

그녀의 기억은 원근법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신의 법정에서 신은 그녀에게 무엇을 되돌려줄 것인가?

            ​ 시집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2021년 4월

             

 

            ⸺계간 《열린시학》 2021년 가을호

-----------------

김승희 / 1952년 전남 광주 출생.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1992년 서상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시집 ​『태양 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미완성을 위한 연가』 『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냄비는 둥둥』 『희망이 외롭다』 『도미는 도마 위에서』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