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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파랑/엄지인 잔디를 깎습니다 마당은 풀 냄새로 비릿합니다 잔디가 흘린 피와 눈물이라는 생각 우린 서로 피의 색깔이 달라 참 다행이지 혈통이 아주 먼 사이라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잘린 끝을 만져보는데 아프지 않습니다 심장과는 아주 먼 거리일까요 손 뼘으로 잴 수 있지만 누군가는 머리에서 심장까지 전력을 다해 뜁니다 머리카락 입장에선 불행일지 모른다는 생각 골목 밖에선 길냥이의 울음소리가 날카롭습니다 고양이는 사람에게만 소리 내 운다고 하는데 축축한 여기 그냥 좀 내버려두라고 배가 헐렁한 동물에게 보내는 우호적인 경고라는 생각 다치지 않게 손톱 칼로 조심히 군살을 깎지만 소스라칩니다 가장자리에서 바깥으로 밀리지 않으려는 비명 TV에서는 기상 캐스터의 주의보가 쾌속으로 지나갑니다 암거북들이 짝을 잃고 더운 바다..

신춘문예 2024.01.10

2024년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면접 스터디/강지수 허리를 반으로 접고 아 소리를 내면 그게 진짜 목소리라고 한다 진짜 목소리로 말하면 신뢰와 호감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러자 방에 있던 열댓 명의 사람들이 제각기 허리를 숙인 채 아 아 아 소리를 낸다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진짜 목소리가 방 안을 채운다 이제 그 음역대로 말하는 겁니다 억지로 꾸며낸 목소리가 아닌 진짜 당신의 목소리로요 엉거주춤 허리를 편 사람들이 첫인사를 나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저는 대전에서 왔고…… 멋쩍은 미소를 짓고 몇 번 더듬기도 하면서 말을 하다가 불쑥 허리를 접고 다시 아 아 거리는 이도 있다 나는 구석에 앉아 이 광경을 바라본다 선생님이 손짓한다 이리 와서 진짜 목소리를 찾아보세요 쭈뼛거리며 무리의 가장자리에 선다 허리를 숙인다 정강이가 보이고 뒤통수가 ..

신춘문예 2024.01.10

2024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서울늑대 /이실비 사랑을 믿는 개의 눈을 볼 때 내가 느끼는 건 공포야 이렇게 커다란 나를 어떻게 사랑할래? 침대를 집어 삼키는 몸으로 묻던 하얀 늑대 천사를 이겨 먹는 하얀 늑대 흰 늑대 백 늑대 북극늑대 시베리아 알래스카 캐나다 그린란드 매일 찾아가도 없잖아 서울에서 만나 서울에서 헤어진 하얀 늑대 이제 없잖아 우린 개가 아니니까 웃지 말자 대신에 달리자 아주 빠르게 두 덩이의 하얀 빛 우리는 우리만 아는 도로를 잔뜩 만들었다 한강 대교에서 대교까지 발 딛고 내려다보기도 했다 미워하기도 했다 도시를 강을 투명하지 않은 물속을 밤마다 내리는 눈 까만 담요에 쏟은 우유 천사를 부려먹던 하얀 늑대의 등 네 등이 보고 싶어 자고 있을 것 같아 숨 고르며 털 뿜으며 이불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영원 목만 빼꼼 내..

신춘문예 2024.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