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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둥근 물집/우정인​ 골목 어귀 잊을만하면 문을 여는 과일가게가 있다 잊히기 전에 나타나는 젊은 사내 하나와 모둥이의 걸음 수를 재는 사과가 있다 사과는 욕심이 많은 아이처럼 불은 얼굴을 하고 있다 사내는 맛 좀 보라고 사과 한 조각을 잘라 내 입에 들이민다 나는 깜짝 놀라 속살 속에 스미는 쓸쓸한 음각을 혀 밑에 감추었다 아직 바람도 다 익지 않은 가을인데 ​ 햇살이 잘 밴 사내의 어깨에 기대는 상상을 한다 오래 전에 놓친 이슬 냄새가 날지 모른다 풋잠이 들었을 때 그의 손이 닿으면 나는 동그랗게 몸을 말겠지 상상은 순식간에 과일가게에 퍼진다 상자들이 들썩인다 하룻밤 미쳐서 그의 싱싱한 심장을 베어 먹을 수 있을까 그의 여자로 과연 그러다가 사내에게 물었다 얼마예요? ​ 주춤, 사내가 고개를 흔들며 시선..

신춘문예 2024.01.10

[2024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엄마는 외계인*/최서정 분홍장갑을 남겨놓고 지상의 램프를 껐어요 눈 감으면 코끝으로 만져지는 냄새 동생은 털실로 짠 그 속에 열 가닥 노래를 집어넣었죠 온종일 어린겨울과 놀았어요 어느 눈 내리던 날 장롱 위에서 잠든 엄마를 꺼내 한 장 한 장 펼쳤죠 (우리 막내는 왜 이렇게 손이 찰까) 그리우면 손톱이 먼저 마중 나가는 어린, 을 생각하면 자꾸만 버튼이 되는 엄마 눈사람처럼 희고 셀러리보다 싱싱한 이제는 나보다 한참 어린 엄마 소곤소곤 곁에 누워 불 끄고 싶었던 적 있어요 그녀 닮은 막내가, 바닥에서 방울방울 웃어요 놓친 엄마 젖꼭지를 떠올리면 자장가처럼 따뜻해지던 분홍 그녀, 마지막 밤에 파랗게 언 동생 손가락을 털실로 품은 걸까요 반쯤 접힌 엽서를 펼치듯 창문을 활짝 열면 어린 마당에 먼저 돌아와 폭..

신춘문예 2024.01.10

[2024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길을 짜다/황영기 몸살 난 집을 데리고 경주로 가자 빈 노트가 스케치하기 전 살며시 문을 열어 비에 젖어도 바람에 옷이 날려도 좋아, 아무렴 어때 나갈 때 잊지 말고 우산을 챙겨줘 돌아온다는 생각은 깊은 장롱 속에 넣어두고 먹다 만 밥은 냉동실에 혼자 두고 머리는 세탁기에, TV는 버리고 발가락이 듣고 싶은 곳으로 실선으로 그려진 옷소매에 손을 넣고 버스에 올라 별이 기웃거리기 전에 도착해야 해 능소화 꽃잎 같은 사연을 페달에 담아 바람에 날리자 친구가 필요할 거야 그럴 때는 친구를 잊어 무덤 속 주인이 말했다 지퍼처럼 잎을 내렸다 올리고 꽃은 단추처럼 피었다 떨궈줘 발자국이 세든 골목에 비릿한 바닥을 핥을 때 날실 머리는 잡고 씨실의 허리를 감으며 하나, 둘 잘라줘 촉촉한 파스타에 울던 사람, 발을 만..

신춘문예 2024.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