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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제2회 선경작가상 - 한혜영 시인

겨울을 잃고 나는 외 2편​한혜영​​ 나는 흰옷을 걸쳐본 지가 오래된 종려나무, 소금기에 푹 절여진 꼬리를 끌고 해안가를 어슬렁거려요 마음은 죽을 자리를 찾는 늙은 늑대 같기도 하고 조문을 다녀가는 시든 꽃 같기도 하고 찢어질 대로 찢어진 깃발 같기도 하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해요​​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에요 겨울을 잃은 것들은 다 그래서 혀가 포도나무 덩굴처럼 길어졌어요 살려면 닥치는 대로 생각을 잡고 올라야 해요 아니면 녹아서 줄줄 흐르니까 얼음조각처럼 잘 생긴 배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얼굴이 바닥에 질펀해요 뱀은 늘어질 대로 늘어진 혈관을 끌고 서늘한 굴을 찾아가지요​​​ 저기서 시계바늘을 휙휙 돌리는 여자! 아직도 홈쇼핑의 채널을 지키네요 세상엔 없는 계절을 파는, 소매가 긴 스웨터로 ..

수상한 시 2025.01.04

2024년 제5회 선경문학상 - 김륭 시인

식물복지 외 2편-김륭  개가 산책을 할 때 새는 기도를 한다.그녀가 말했고 나는 웃었다.식물처럼 새는 왜 새가 되었는지 개는 왜 개가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새와 개는 마음이 잘 통할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새와 개 사이에 놓인 커다란 구멍, 누가 돌로 구멍을 막아놓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말을 잘 듣지 않는 커다란 돌처럼 고개를 들어 올리면서새를 본다. 새는, 개와 잘 놀아줄 것 같다. 이런 생각은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말은 나보다 늙은 배롱나무에게 들었다. 내가 있어도 외로워? 외롭다는 말은 마음이 식물처럼 걷는다는 말! 배롱나무는 너무 자주 머리를 긁는다. 그녀와 내가 개와 새처럼 걷다가 잠시 멈춰 서 있을 때였다.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죽을 수도 있다고 바람이 말했다. 나는 바람과 말이..

수상한 시 2025.01.04

말씀의 절

오늘은 시인 송호진과 만나는 날이다속천 바닷가에서 식사를 하고 진해루 찻집에서 우리는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진해 앞바다. 바다보다 하늘이 더 가까운, 하늘보다 더 가까운 구름을 그는 참 드문 동갑내기 시인이다.해군 중령으로 예편해 늦은 나이에 문학에 심취하여 앞서 간적도 없는 나를 추월해 저만치 달려가고 있는 늦깎이 시인이다.시적 경륜에 비해 깊이있는 사고를 바탕으로 한 진정성 있는 시적 성취를 이룬 그는 시에 늘 진심이고 품위를 잃지 않는 노장이다. 우리는 나이답잖게 열정적으로 시를 논하고 문단을 오가며 담소를 이어가다 문득, 요절 시인들의 시와 인생을 되짚어가며 위안을 삼는다.인간의 수명이 다하는 때가 오면 시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경지로 극단까지 치닫다가 마지막 유언을 하듯 간절하게 문장이 만..

일상 2024.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