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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경상일보,경남도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솟아오른 지하/황주현 ​ 몇 겹 속에 갇히면 그곳이 지하가 된다 ​ 4시 25분의 지상이 감쪽같이 4시 26분의 지하에 세상의 빛을 넘겨주는 일, 언제부터 서서히 시작되었을까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지상의 지하화가 도모되었을까 땅을 판 적도 없는데 다급한 말소리들은 지표면 위쪽에들 있다 조금 전의 당신의 양손과 두 볼이, 주름의 표정과 웃음이, 켜켜이 쌓인 말들이 들춰지고 있다 기억과 어둠이 뒤섞인 지상은 점점 잠의 늪으로 빠져드는데 누구도 이 어둠의 깊이를 짐작할 수 없다 ​ 몸이 몸을 옥죄고 있다 칠 층이 무너지고 십오 층이 무너졌다 그 사이 부서진 시멘트는 더 단단해지고 켜켜이 쌓인 흙은 견고하게 다져졌다 빠져나가지 못한 시간이 꽁꽁 얼어붙는 사이 아침과 몇 날의 밤이 또 덮쳤다 이 깊이..

신춘문예 2024.01.10

<2024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감정 일기/송상목 ​ 매일 아침 여덟 시면 슬픔을 마주친다 그와 인사하고 같은 전철을 타고 버스에 올랐다 내리고 빌딩을 오르고 나면 ​ 정오가 된다 정오는 기쁨을 만날 시간 나는 잠시 슬픔과 작별하고 수저를 든다 기쁨이 키스해온다 ​ 지저분한 기쁨이 기분 나쁘지 않다 ​ 키스는 짧고 오후는 길다 나는 다시 슬픔을 본다 슬픔은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다 매일 같이 다니기 힘든 듯이 ​ 나는 빌딩을 쌓으며 슬픔의 눈치를 살핀다 슬픔은 슬퍼하면서도 빌딩 쌓기를 멈추지 않는다 아무래도 슬픔이 쌓아가는 것은 빌딩만이 아닌 것 같다 ​ 밤은 빌딩을 내려오는 때 슬픔이 가장 먼저 달아난다 나는 기쁨을 볼 생각으로 가득해진다 ​ 기쁨은 집에 있다 마구 꼬리를 흔들며 내게 달려든다 ​ 기쁨은 꽤 나이 들어있고 눈을 끔뻑거린..

카테고리 없음 2024.01.10

2024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젠가 / 홍다미 우리는 즐거움을 쌓기 시작했죠 딱딱한 어깨를 내어주며 무너지지 않게 한 계단 한 계단 다짐을 쌓았죠 대나무가 마디를 쌓듯 빌딩이 올라가고 집값이 올라도 내일 모레 글피 그글피를 오지 않는 내일을 오늘처럼 지금처럼 바람 무게를 견디려면 마스크 쓴 계절도 빙하 녹는 북극도 쌓아야 하는데 밤하늘이 별빛을 빼내고 있었죠 쌓기만 하는 뉴스는 싫증나고요 거꾸로 가는 놀이를 해볼까요 쌓아놓은 블록을 하나씩 빼내는 놀이 장난감을 빼버리면 아이는 자라서 부모 눈물을 쏙 빼버리고 최저임금을 빼내면 알바는 끼니를 빼먹고 잠을 빼내면 기사님은 안전이란 블록을 빼내고야 말겠죠 언젠가 도심 백화점도 한강 다리도 이 놀이를 즐기다 쏟아졌고 모닝 키스도 굿나잇 인사도 기념일도 블록으로 빼내면 연애도 와장창 무너지겠죠..

신춘문예 2024.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