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모음
2025 중앙신춘시조상
평원을 달린다/김보선
벽지의 끝을 잡고 평원을 내달린다
묽어진 시간 앞에 말의 고삐 당길 때
푸른 숲 하나가 되어 펼쳐지는 문양들
천정에 붙인 하늘 뜨겁게 달아올라
폭염을 덧바르는 대형 단지 아파트 안
말라간 풀이 살아나 층층마다 우거진다
초원이 사라질까 손이 바쁜 초보 사원
짙푸른 날을 향해 삼킨 말 쓸어내며
힘차게 갈기를 세워 높은 곳을 오른다
당선소감-“시조=금조 새기며 더 정진하겠다”
올여름 연일 높은 습도의 영향으로 폭염이 지속되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더위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여름 내내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만 다른 데로 정신을 팔면 시조의 말은 저만큼 달아나 있고, 책상 앞에서 고개를 들면 깜깜한 벽과 마주한 나를 봤습니다. 바람 하나 없는 벽에 갇혀있는 말들이 시원한 물줄기를 찾고 있을 때, 또 다른 벽의 푸른 초원에서는 야생마가 자유롭게 뛰어다녔습니다.
정형률의 벽 안에서 시조의 말에 오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답답하고 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벽의 층층을 올라갈 때마다 말은 더 깊어진 미로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앞이 깜깜하지만, 시조의 아름다움을 잘 살려 쓸 수 있을 거라 다짐하며 무모하게 헤맸습니다.
벽지를 바르는 초보 사원처럼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그동안의 고뇌가 얼굴에서 흘러내렸습니다.
금조(今調)라는 말을 새겨보며 생동감 넘치는 문장을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고 정진하겠습니다.
부족한 제 글에 희망을 불어 넣어주신 중앙일보사와 네분 심사위원 선생님께 마음을 다해 감사 인사 올립니다. 말의 갈기를 휘날리며 평원을 달릴 수 있도록 시조의 길을 열어주신 조경선 선생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시란’ 동인들과 늘 곁에서 응원해 주는 가족과 이 기쁨을 함께하겠습니다.
◆김보선(본명 김영자)-경기 안성 출생-한경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중앙시조백일장 2022년 1월 장원. ‘시란’ 동인.
심사평-‘말’을 말로 끌고가는 시적 역량 뛰어나
올해 중앙신춘시조상 후보작은 모두 84편이었다. 이미 올해 월 입상이라는 1차 관문을 통과한 분들의 작품으로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을 보여주었다. 심사위원들이 작품집에서 3편씩을 골라낸 뒤 이를 놓고 긴 토론을 벌인 끝에 뽑은 당선작은 김보선의 ‘평원을 달린다’였다.
‘평원을 달린다’는 작품 구성이 활달하고 벽지 무늬를 통해 풍부한 상상력을 짜임새 있게 확장시키고 있다. 정형 미학을 잘 살린 세 수의 작품에는 힘을 넣지 않고도 “고삐”를 당기는 힘이 강하게 느껴졌다, 특히 셋째 수까지 지치지 않고 끌고 가는 시적 역량이 컸다. 삶이 녹록지 않은 시대, 도배라는 힘든 작업을 통해 삼킨 ‘말(言)’들이, 갈기 세우고 평원을 내달리는 ‘말(馬)’이 되기도 하는, “초보 사원”의 꿈을 시조의 정형성 안에 잘 녹여냈다.
끝까지 겨룬 나정숙의 ‘오르골, 돌다’는 선명한 이미지를 거느린 서정성이 돋보였으나 함께 보내온 다른 작품과 편차가 있어 최종에서 내려놓았음을 밝힌다. 땀과 열정으로 시조의 문을 환하게 열어젖힌 새로운 신인 탄생에 축하를 보내며, 응모하신 모든 분들의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서숙희·손영희·정혜숙·이태순(대표집필)
2025 신춘문예 조선일보 시조 당선작
취급주의 / 한승남
계단을 오르내리며 슬픔을 운구한다
얼굴 없는 수취인 이름도 희미해졌다
똑똑똑 대답 없는 곳
긴 복도가 느려진다
저 많은 유품들은 누가 보내는 걸까
주문을 외우면 외로운 착각의 세계
반품도 괜찮을까요
열지 못한 사연들
상자도 사람도 구석에서 자라고 있다
유리 같은 마음입니다 던지지 마세요
날마다 포장된 시간
기적을 쌓는다
<당선 소감>
붉은색 바탕에 '취급주의' 문구가 붙은 택배 상자가 아파트 현관 앞에 도착합니다. "절대 던지지 마세요. 밟지 마세요."는 누구를 향한 외침일까요? '택배기사의 과로사가 올해만 벌써 10번째... 기사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택배를 받을 때면 낮은 곳에서 애쓰는 이들의 땀내가 느껴집니다. 우리의 일상이 때로 거대한 담론이 되어 다가옵니다. 열지 못한 사연이 유리같은 아픔으로 전해집니다. 하루를 천 년처럼 사는 그들이 있어 나의 아침이 있습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길고 거대하고 이성적인 착란을 통해 견자가 된다."라는 랭보의 말이 떠오릅니다. 시조는 저에게 많은 숙제를 던집니다. 시조를 쓰는 '견자'로서 하루하루 성찰해 봅니다.
문학은 삶의 무게와 아픔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됩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도록 지도해 주신 조경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시인의 길에 동행해 준 남편, 시란 동인, 볼륨 동인 모두 고맙습니다. 시조의 길을 열어 주신 심사위원님과 조선일보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제 시의 씨앗이신 아버지 영전에 이 운문을 바칩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자매들, 아들딸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나의 가장 안쪽에서 세상의 가장 바깥쪽을 향해 써 나가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한승남-1968년 서울 출생-고려대 정보통신대학원 졸업-고려아트컴퓨터학원 원장
-2022년 3월.2023년 5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심사평>
조금씩 나아가는 응모작 속의 걸음들이 보였다. 익숙한 작풍의 탈피가 오늘의 정형시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졌다. 형식적 안정감 위에 어떤 새로움을 발굴해야 오늘의 정형시로 거듭날지, 분투한 흔적들이다. 그럼에도 작품을 거듭 읽다 보면 피상적 인식을 드러내는 성급한 종결이나 시상의 서두른 봉합, 각 수 사이의 작위적인 연결 같은 것들이 더 드러났다.
그 중 '신발 애너그램', '꽃 긷는 중', '겨울 매미', '블라인드', '취급주의' 등이 남았다. 꽃 긷는 중'과 신발 애너그램' 그리고 겨울 매미'는 일상 속의 발견을 장식적 수사 없이 담아내는 발성과 형식의 구조화가 돋보였다. '블라인드'는 형식과 가락을 유려하게 타는 능숙함을 여러 편에서 균질감 있게 보여줬다. 하지만 구체성이나 핍진성 등에서 다소 떨어지는 안이한 완결 등이 보였고, 이런 인식과 편차를 넘어서는 '취급주의'가 당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취급주의'에는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극화하는 직조력으로 주의를 일깨우는 힘이 있다. 택배와 함께 나날을 사는 현 세상의 면목을 '취급주의'로 집어낸 발상과 이면의 성찰이 울림을 지닌다. 이사 때 요주의 물품에 붙이던 취급주의를 통해 요즘 도처의 경고로 봐도 좋을 만큼 함의를 넓힌다. '슬픔을 운구한다'는 대목과 유품'의 연결, '반품'과 '열지 못한 사연들'의 조합은 '구석에서 자라는'또 다른 우리 현실의 면면을 환기한다.동봉한 작품에서도 한 단어, 한 구절을 허투루 놓을 수 없는 시조에 허사나 과잉 없는 구조화를 보이며 이곳의 현실을 되짚는 발견도 묵직하다.
한승남씨에게 축하와 기대를 보낸다. 도전할 분들의 앞길에도 큰 바람을 보낸다.
-정수자:시조시인
2025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절연/류한월
불꽃이 튄 자리엔 그을음이 남아 있고
뭉쳐진 전선 끝은 서로 등을 돌린 채로
흐르던 전류마저도 구부러져 잠들었다
구리 선을 품에 안은 검은색 피복처럼
한 겹 두 겹 둘러싸는 새까만 침묵으로
철로 된 마음속에서 절연되는 가족들
한 번의 접점으로 미세 전류 흐르는데
묻어둔 절연층엔 전하지 못한 말들이
심장의 전압 내리고 가닿는 길 찾으려
당선소감
글은 늘 저를 지켜주는 등불이었고, 저는 그 빛을 따라 걸었습니다. 제게 글쓰기는 자기 수양의 도구이자 벗입니다. 어릴 적부터 마음의 외로움과 무게를 덜어내는 수단이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실용적인 글로 밥벌이를 하는 삶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글들 속에서도 문학적 갈망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루기 어렵지만 마음속 깊이 숨어 있던 그 열망이 그림책과 운문이라는 새로운 지평에서 결국 현실로 이어졌습니다.
지난 10월 말, 제가 글을 쓴 첫 그림책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즈음 다양한 운문에 관심이 깊어져 시조에 도전했는데, 쓰고 싶은 마음이 앞서 형식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써버렸습니다. 몇 편을 써내고 나서야 종장 첫 음보 3글자라는 기본 형식조차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홀로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형식을 바로잡아 쓴 첫 시조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놀랍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혼자서 문학의 길을 걸어왔기에 스승과 문우는 없지만, 삶의 여정에서 만난 귀한 분들이 계십니다. 인생의 동반자 류민정, 삼성전자 재직 시절 상사였던 고 박희섭 상무님, 그리고 지난날 미숙했던 저를 감내한 가족과 지인들, 특히 황재선, 김지현, 김우승 형님, 이정규 사장님의 너그러운 이해를 잊지 못합니다. 도서출판 봄볕과 제천문화재단에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신뢰와 격려로 제 작품을 선택해 주신 동아일보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문학의 길은 끝없는 수련의 여정일 것입니다. 출발은 늦었지만, 더욱 정진하여 우리 문학의 아름다움을 꽃피우는 데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며, 진실한 울림이 있는 작품을 쓰기 위해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이 길의 끝에서 누군가에게 따스한 빛이 되어줄 글 한 조각 남기고 싶은 마음으로.
-유한월△1971년 서울 출생 △한양대 경제학과 졸업
● 심사평:소통 끊어진 현실에 반성적 통찰 더해 진중한 무게감
문학이란 활자 위에 진중한 인생의 소회와 사유를 얹어 독자에게 다가가는 작업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잘 읽혀야 한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아울러 시대에 알맞은 울림을 기대했다.
올해 투고된 많은 작품 가운데 마지막까지 심도 있는 윤독을 요구한 작품은 ‘귤꽃 피는 서귀포 바다’, ‘나무는 나비를 묻지 않았다’, ‘시장 골목 국숫집’, ‘호스피스’ 그리고 ‘절연’이었다. ‘귤꽃 피는 서귀포 바다’는 가독성이 좋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시인만의 독특한 개성 면에서 미진한 부분을 간과할 수 없었다.
‘나무는 나비를 묻지 않았다’는 서정성 면에서 단연 돋보였지만 배면에 깔린 시대의 울림이 부족했다. ‘호스피스’는 번뜩이는 비유와 언어의 섬세함이 돋보였으나 당선작으로 선하기에는 울림 면에서 아쉬운 감이 있었다. ‘시장 골목 국숫집’은 우리의 지난한 현실을 그려내기에 알맞은 풍경화였다. 가락도 자연스럽고 가독성도 좋은 작품이라 몇 번이나 되읽게 했다. 다만 치열함이나 새로움 면에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올해의 행운은 ‘절연’에 돌아갔다. 끊어진 전선을 모티프로 내면적 소통이 단절되어 가는 작금의 가족 풍경을 절실하게 표현했다. 불안한 정치, 외부 의존도가 높은 경제, 남북 대치 상태에서의 복잡한 국제관계 등이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 작품이 환기하는 가족 간의 갈등은 이미 헝클릴 대로 헝클린 우리의 오늘을 보여줌과 동시에 반성적 성찰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진중한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더 노력하여 우리 시조의 내일을 열어가는 큰 시인이 되길 빈다.
-이근배·이우걸 시조시인
2025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달을 밀고 가는 휠체어/박락균
물비늘 일으킬 때 주저앉는 여름밤
내려온 눈썹달이 당신 뒤를 밀어주면
휠체어 해안선 따라 바퀴가 걸어간다
당신의 마디마디 달의 입김 스며들어
번갈아 끌어주는 밀물과 썰물 사이
눈동자 물결에 멈춰 어둠을 다독인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뭍에서 사는 동안
파도만큼 출렁여 눈 뜨고 산 새벽시장
발자국 병상에 누워 허공을 걷는 어머니
당선 소감:부모 세대의 아픔 모두 공감했으면
반평생 몸담은 교직을 떠나 독서하며 소일하다 몇 년 전에 중학교 은사님의 권유로 시조에 입문했고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 전통 시가로 정형률을 중시하는 시조는 생각한 것보다 접근하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율격에 맞춰 급변하는 현시대에 맞는 감각을 세워 놓고 언어를 절제하기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우리말을 가꾸려 하는 내 글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풍요로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수평선 너머 검은 기운이 넘쳐 날 때 개장을 앞둔 해수욕장은 분주했습니다. 아내와 해변을 천천히 거니는데 구름 사이로 하얀 달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가롭게 일상을 즐기는데 달그림자 속에 어머니 모습이 아른거렸습니다. 하반신 장애로 휠체어 생활하는 어머니를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온갖 어려움을 견디며 사시던 우리 어머니는 집안에 도움을 주기 위해 새벽시장에서 물건을 팔아 생활하고 잠시도 편안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어느덧 빠르게 흘러 어머니는 삶을 정리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인생의 즐거움을 맘껏 누리지 못하는 애틋한 마음을 시조에 담고자 했습니다. 부모 세대의 아픔과 그 시대의 슬픔을 역동적인 율격으로 그려 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삶에 대한 감동과 여운을 작품에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부족한 제 작품을 선정해 주신 서울신문사 심사위원님께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시조에 눈을 뜨게 해 주고 문학의 활력을 키워 준 조경선 선생님께도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열띤 문학 토론을 하는 시란 동인 여러분, 따뜻한 격려로 시적 용기를 준 아내, 말없이 응원을 보낸 두 딸과 이 기쁨을 누리고 싶습니다.
-박락군▲1960년 경기 고양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시대정신이 바라는 서정 미학
이근배·한분순
이미지 확대
신춘문예 백년은 시조에 특히 기여했다. 우리 고유 정형시에 그나마 주어지는 공적인 격려가 돼 왔다. 묵인되는 당선 공식이 있는 듯 관성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 곁들여서 사회는 다시 격랑 시절이다. 올해 신춘문예의 시조 부문 당선작 ‘달을 밀고 가는 휠체어’는 그런 시대적인 특별함을 포괄하며 미학 본질에 성실하다.
문명 편린으로 애틋함의 표징처럼 여겨지는 휠체어가 심상을 장악하며, 달을 옛시조 음풍농월 풍류 객체에서 생애를 격려하는 주체로 치환한다. 시조 현대화라는 강령을 섬밀한 서술로 작위적이지 않게 확보하는 것이다. 율격에선, 낱말들을 읽는 호흡에 맞춰 놓음으로써 운문성에 유려히 닿는다. 배경의 바다는 모태를 닮아 있으며 심정적인 모국으로 확대되면서, 존재에게 건넨 위로는 곧 시대에 위로가 된다. ‘어머니’ 특질을 투지 여정으로 다룬 충만한 독백은 거대 서사 웅변만큼 위력적이다.
당선권 ‘오래된 선풍기’는 결기에 서정을 더하면서 일상과 시대를 편직한다. 다만 최소화된 어휘가 최대화된 내용을 만드는 장르의 간결미와 종장 특유 극적인 비약은 덜하다. 명료한 깨달음에 미장센의 절묘함을 겹친 역량은 환대될 것이다.
함께 당선권에 든 ‘널배를 밀고 온 달의 잠꼬대’는 긴 이야기성 포만감으로 다섯 수를 이끈 저력이 있다. 운율은 기계적인 초중종장 글자 숫자 맞추기를 극복, 인간 본능이 호응할 리듬을 획득한다. 옛 어투는, 외래어와 신조어로 억지스럽게 현대성을 만듦만큼 주의할 작풍이지만, 연애시 흡인력에 시대 정신을 함의로 포갬은 기예롭다.
시조가 우리 옛것 애착만을 뜻하진 않는다. 동시대성을 갖추며, 큰 우주마저 조그마한 꽃잎에 옮길 멋진 축약 체계여야 한다. 현대 시조 백년에 좋은 자극이던 신춘문예와 함께 금세기적인 르네상스를 성취하길 바란다-심사위원:이근배,한분순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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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다. 아내와 해변을 천천히 거니는데 구름 사이로 하얀
▲1960년 경기 고양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2025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2025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자화상의 오후/김정애
빈칸 생의 여백이 귓불을 뜯게 했나
느닷없는 살 조각을 붕대로 친친 메고
회색빛 푸른 눈동자 거울 앞에 앉았다
아직 남은 소음에 대해 눈빛이 묻고 있다
오후 내 낯선 색채를 캔버스에 게워내며
진녹색 코트 여미고 파이프를 문 사내
색을 고르는 일은 칼날을 세우는 일
울분 한 붓 슬픔 한 붓 거칠게 찍어 눌러
죽어도 들키기 싫은 고독을 덧칠한다
당선소감
가을해는 노루꼬리보다 짧다고 부지깽이 손이라도 빌릴 만큼 분주하게 가을걷이하시던 부모님을 기다리며 따뜻한 볕이 머무는 밭담 벼락에 기댄 예닐곱 살의 내가 있습니다.
나는 쌀쌀해지는 갈바람에 자꾸만 몸을 움츠리며 아직 일을 마치지 못한 휘청이는 두 개의 등허리를 보며 들판에 너울대는 억새꽃과도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짧아져 가는 그림자를 흙 묻은 손으로 따라 그리며 온기가 베인 담장에 등을 댄 내가 맨 처음 배운 감정은 '기다림'으로 기억됩니다.
쌓이는 원고만큼이나 짓눌리던 빈칸의 무게와 하얗게 바랜 여백으로 맞던 새해. 그렇게 열병을 앓을 만큼 앓아야 12월과 겨울을 다 보낼 수 있었습니다.
움츠러든 거울 속 자화상 앞에 다시, 펜을 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던 글. '밤은 검지만 검은색이 아니야.'
밤하늘은 파란색에 노란빛이 섞이고 검은색을 혼합했지. 빨강, 노랑, 파랑 기본색에 흰색과 검은색을 조금씩 섞어야만 조화로운 색채가 뿜어져 나오듯 시어를 고르는 일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음을 알 것 같습니다.
'제주시조시인협회' 선생님들은 저의 스승이자 내 시조의 산실입니다. 김정숙 회장님과 더불어 모든 회원과 기쁨을 나누겠습니다.
'이런 날도 이서사 살주' 따뜻한 포옹으로 안아주신 어머니 고맙습니다. 표현이 서툰 무뚝뚝한 남편과 아이들에게, 오랜 벗들과 지인들께도 당선 소감으로 고마움과 안부를 전합니다.
오늘도 스스로에 거는 주문으로 응원합니다. '그래그래 괜찮아! 잘하고 있어.'
기다림을 담보한 따뜻한 감성으로 위로가 되는 글 오래 쓰겠습니다. '신춘문예 당선'의 꿈을 이루게 해 주신 매일신문사와 심사위원 시인 강현덕 선생님께 감사의 절 올립니다.
-김정애-1968년 제주 생.- 2017 제주시조지상백일장 입선.
- 2019년 8월, 2021년 8월, 2022년 4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 제주시조시인협회 회원.-사) 제주어보전회 제주어 강사.
025-01-01 37면
2025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인사이더 식사법/오향숙
푸성귀 같은 날들 집으로 가져와서
큰 그릇에 버무리면 사람이 모여든다
내 편과 네 편의 입맛 한때는 겉돌아도
속속들이 배어든 유연한 참기름 말
제 각각 살아있는 뿌리의 속마음은
밖으로 내뱉지 않아 싸울수록 순해진다
싱거운 나의 하루 쓴맛이 녹아들어
혀가 만든 비법 하나 스며든 인사이더
싱싱한 유일한 재료 입 닫고 귀를 연다
푸성귀 같은 날들 집으로 가져와서
큰 그릇에 버무리면 사람이 모여든다
내 편과 네 편의 입맛 한때는 겉돌아도
속속들이 배어든 유연한 참기름 말
제 각각 살아있는 뿌리의 속마음은
밖으로 내뱉지 않아 싸울수록 순해진다
싱거운 나의 하루 쓴맛이 녹아들어
혀가 만든 비법 하나 스며든 인사이더
싱싱한 유일한 재료 입 닫고 귀를 연다
당선소감:주변 세심히 살피며 좋은 시조 쓰기 위해 노력
어떤 자리에도 금방 섞여 한 팀처럼 어울리는 친구가 무척 부러운 적이 있습니다. 한쪽으로 밀려나 머뭇거리는 나를 발견할 때는 적당하게 간이 밴 시간을 퍼먹으며 그 안에 섞이려 노력했습니다. 그때마다 손을 뻗어 옆자리로 당겨주는 주변의 관심은 속마음을 털어놓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한 무리 속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평소에 비빔밥을 좋아하는 이유가 내면의 낯가림을 채우기 위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음보가 모여 구가 되고 또 장으로 이어지는 3장 6구 시조의 맛이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신춘문예에 도전하며 시조라는 장르를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매년 당선 연락을 절박하게 기다리는 일은 습관이 되어 버렸지만, 그 연락을 받고 보니 날아갈 것 같았던 기분이 이내 무거운 책임감으로 밀려와 정신이 바짝 듭니다. 가까운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며 좋은 시조를 쓰기 위해 늘 노력하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홀로 독보적인 맛을 내지는 못할지라도 시조의 길에 스며들어 어울리는 시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신 조경선 선생님께 끝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시란 동인들과 응원해 준 가족과 이 기쁨을 함께 하겠습니다.
▲ -오향숙-전남 해남 출생-2023년 1월 중앙시조 백일장 장원-시란 동인
[심사평:통섭의 사회 지향하는 울림, 오랜 여운 남겨
시조는 정형시다. 3장6구 정형 형식에 맞게 흠 없는 완결성을 요구한다. 형식상 흠잡을 수 없다 해도 내용이 빈약하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단 한 명의 당선작을 뽑는 신춘문예 규정에 따라 미세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된다. 심사위원도 아쉬울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마지막까지 심사위원 앞에 남은 작품은 ’인사이더 식사법’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배려, 통섭의 사회를 지향하는 울림이 시조가 지닌 미덕으로 가시지 않은 여운을 오래 머물게 했다. ‘푸성귀 같은 날들 집으로 가져와서/ 큰 그릇에 버무리면 사람이 모여든다’ 우리의 삶이 ‘푸성귀 같은 날들’ 이라니, 어찌 아니겠는가.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서로를 작살내는 작금의 현실을 보라. 이 시조에서는 ‘입맛 한때는 겉돌아도’ 서로를 껴안는다 라고 했다. ‘시란 무엇입니까? 메타포다’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싸울수록 순해진다’ ‘입 닫고 귀를 연다’ 이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당선의 문을 넘지 못했지만 ‘움직이는 냉장고’외 2편, ‘선지국밥집’외 2편, ‘어느 엄마의 실버들 넋두리’ 외 2편의 응모작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당선 시인에게 축하를 드리며 시조의 건강한 발화를 기대한다.
▲ -김영재-1974년 <현대시학> 등단-현 계간 <좋은시조> 발행인
-시집 <유목의 식사> <목련꽃 벙그는 밤> 등
-한국작가상, 이호우시조문학상 등 수상
2025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날개/최태식
소원 판매점에는 기도값이 각각이다
산중턱에 자리한 바람이 줄을 설 때
양초는 제 몸에 쓰인 문구에 집중한다
절박한 크기마다 생각이 많아져서
정갈하게 모셔 놓아 소원이 즐비한 집
기도발 소문에 끌려 사람들 모여든다
몸 낮춘 자리마다 촛불은 뜨거워져
쉽게 살 수 없는 꿈 저마다 간절한데
묵중한 내일 앞에서 오늘은 빈 몸
아픔이 많아 그 시간을 피하기 위해 낯선 곳으로 자꾸 나를 떠미는 날들이었습니다.
오늘의 당선에 만족하지 말고 더욱 정진하여 한국 시조단에 뚜렷이 이름 석 자를 남기는 시인으로 성장하길 기원한다.
김동균: 1973년 강원도 영월 출생, 2024년 중앙시조 백일장 11월 장원. 시란 동인.
부족한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택해주신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감사 드립니다.
예년에 비해 응모 편수도 많았지만, 시조의 정형을 잘 이해한 작품들도 많이 늘어 시조를 꾸준히 공부하는 사람의 증가세를 방증해 주었다.
당선소감]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니체의 말 되새길 터
니체의 말을 되새깁니다.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심사평] 시적대상·화자 관계 오롯이…문학의 사회적 기능 보여줘
선자들이 최종적으로 거론한 작품은 ‘아지오 구둣방’ ‘마침내 슈퍼문’ 그리고 ‘어떤 광합성’이었고, 그 결과 김영곤의 ‘어떤 광합성’이 당선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혹시라도 당선 소식이 오면 울어야지 먼저 김칫국을 마시며 세웠던 소심한 계획도 건망증 때문에 잊어버렸지만 작아서 더 여린 사물들의 말을 받아쓸 수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맙다.
이번에 응모된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독자의 마음을 울리는 감정이나 사유가 결여되어 있거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가 부족하여 메시지가 다소 평면적으로 느껴졌다.
앞으로도 실과 바늘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를 만들어내는 뜨개질처럼 간결하면서도 독창적인 시조 작품들이 다양하게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현달 기울다가 벽에서 일그러질라
급하게 서두르면 평면 사이 어려운
길 하나 사이에 두고 금 쩍 가면 난감하지
파도가 밤새도록 벼린 날 집어삼켜
현 위치 가늠 못 해 어느 때 낮이 올지
끝과 끝 서로 맞닿아 부메랑이 되어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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