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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의 直指<116〉■ 조주종심 선사② - 뜰 앞의 잣나무 ■③- 발우나

시치 2011. 4. 16. 15:39

무비스님의 直指<116〉■ 조주종심 선사② - 뜰 앞의 잣나무 ■③- 발우나 씻어라 |* 直指 연재(불교신문)
文殊法供養會 | 조회 82 |추천 0 |2010.11.21. 08:55 http://cafe.daum.net/yumhwasil/8ROv/119 

〈116〉일상사 그대로가 진리의 삶이며 수행

 
열심히 하는 모습이 아름다울 뿐

꼭 그것이라야 된다는 건 아니다 



■ 조주종심 선사② - 뜰 앞의 잣나무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庭前栢樹子 僧云 和尙 莫將境示人 師云 我不將境示人 僧云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庭前栢樹子

 

조주선사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화상께서는 경계를 가져서 사람에게 보이지 마십시오.”
“나는 경계를 가지고 사람에게 보이지 않느니라.”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해설 : 조주선사의 가르침은 당시로서는 매우 독특하였다. 즉 선문답의 독특하고 빼어난 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씀으로써 선사의 말씀은 거의 모두가 뒷날 화두로 기록되었다. 120세라는 오랜 세월을 사시기도 하였지만 법어가 화두로 기록된 것도 선사들 중에서 가장 많다.

여기에 소개된 ‘뜰 앞의 잣나무’, 즉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는 말도 조주선사는 조사, 즉 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중국에 건너온 그 뜻을 그대로 드러낸 대답이건만 질문을 한 그 스님은 자기 나름대로 경계와 주인을 사량하고 분별하여 달리 생각함으로 뒷날 풀지 못할 화두로 기록되게 되었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혹자는 잣나무가 아니라 측백나무라고 주장하면서 조주선사가 주석하던 도량에 아직도 측백나무가 그대로 많이 남아 있다고 증거를 대기도 한다. 세월이 흘러서인가, 아니면 생각이 많아서인가 이렇게까지 어긋나고 있다. 조주선사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아마도 한밤중에 그 나무들을 다 베어버렸을 것이다.

■ 조주종심 선사③- 발우나 씻어라


趙州因僧問 學人乍入叢林 乞師指示 師曰喫粥了也未 僧云 喫粥了 師云 洗鉢盂去 其僧大悟

조주 선사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학인은 이제 막 총림에 들어왔습니다. 스승님의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죽은 먹었는가?”
“죽은 먹었습니다.”
“발우나 씻어라.”
그 스님이 크게 깨달았다.

 

해설 : 어떤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수행의 길을 물었다. 수행의 길이란 견성성불의 방법이기도 하다. 또한 진리에 입각한 삶의 길이기도 하다. 조주선사의 대답은 참으로 간단하고 쉬우며 누구나 당연히 하는 일상사다. 가르치지 않아도 언제나 잘 하는 바로 그런 일이다. 구태여 배울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는 아주 하찮은 일이다. 곧 식사를 하고 그릇을 씻는 일이다. 선가에서는 아침에 반드시 죽을 먹었다. 아마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곧 바로 가서 물었던 것이다.

“아침 죽을 먹었느냐? 먹었으면 죽 먹은 그릇을 씻어야지.”

그것이 무엇인가. 그저 숨쉬는 일이다. 오줌 싸고 똥 누는 일이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잠자는 일이다. 그 수행자는 수행이란 것이 무슨 특별한 것이나 되는 줄 알았다. 진리에 입각한 위대한 삶이 아주 기이하고 기상천외한 일이나 되는 줄 알았다. 아니다. 그가 조주 선사를 만나기 전부터 그동안 늘 해오던 일상사다.

그렇다. 일상사가 진리의 삶이며, 불법이며, 도며, 수행이다. 구태여 일상사 밖을 향해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 불교가 이와 같은데 착각하여 다른 것에 기웃거리며 쓸데없는 일에 열심이다. 그저 열심히 하는 모습이 아름다울 뿐 꼭 그것이라야 된다는 법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