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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의 直指<114〉■위산영우 선사 1 /정병을 차버리다. 2 /참 부처가

시치 2011. 4. 16. 15:26
무비스님의 直指<114〉■위산영우 선사 1 /정병을 차버리다. 2 /참 부처가 여여하다 |* 直指 연재(불교신문)
文殊法供養會 | 조회 50 |추천 0 |2010.11.13. 20:55 http://cafe.daum.net/yumhwasil/8ROv/117 

<114> ■ 위산영우 선사 1 /정병을 차버리다

 

潙山 在百丈 爲典坐 百丈 將選大潙主人 乃請首座 對衆下語 出格者 當與住持 卽指淨甁云 不得喚作淨甁 汝喚作什麽 首座曰 不可喚作木木突也 丈 不肯 乃問師 師 踢倒淨甁 丈 笑曰第一座 輸却山子了也

 

위산 선사가 백장 선사의 회상에서 전좌라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 백장 선사가 대위산의 주인을 선발할 적에 수좌를 청하여 대중들에게 말을 하게 하였는데, “출격자에게 마땅히 주지를 주겠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곧 정병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것은 정병이라고 부를 수 없으니 그대들은 무엇이라고 부르겠는가?” 수좌가 말하였다. “나무 덩어리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백장 선사가 수긍하지 않고 이에 위산 선사에게 물었다. 위산 선사가 정병을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백장 선사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제일좌가 대위산을 부수어버렸다.”라고 하였다.

 

해설 ; 위산영우(潙山靈祐,771-853) 선사는 황벽 선사와 함께 백장 선사의 제자로서 선종의 5종중에서 위앙종(潙仰宗)을 창시한 조사다. 위산(潙山)은 중국 호남성 장사부 영향현에 있는 산 이름이다. 소(小)위산과 구별하여 대(大)위산이라고도 한다. 선사는 이곳에 주석하였으므로 호가 되었다. 대원(大圓)은 당나라 대종(代宗)이 내린 시호다. 이름은 영우(靈祐)라고 하며 복주 장계의 조씨(趙氏)의 아들이다. 15세에 출가하여 본군(本郡) 건선사(建善寺)의 법상(法常)에게 중이 되고, 23세에 백장회해 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원화(元和) 말년(806-820)에 백장 선사의 명을 받아 장사로 가던 도중에 대위산을 지나다가 잠간 머무르니 군민이 다투어 모여 들었다. 드디어 절을 짓고 선과 교를 40여 년 동안 설하다가 대중(大中) 7년(853) 정월에 아무런 병도 없이 앉아서 입적하니 세수가 83세였다. 뒤에 그의 제자 혜적(慧寂) 선사는 앙산(仰山)에서 선을 선양하여 위산영우와 앙산혜적의 파를 위앙종(潙仰宗)이라 부르게 되었다.

수월관도에는 이 정병(淨甁)을 관음보살의 자비심과 감로의 법(法)의 비를 상징하여 늘 곁에 두고 있다. 진리의 목이 마른 사람들에게 법의 비를 내리어 적셔준다는 뜻이다. 선사들에게 정병이란 음료수를 담아서 늘 곁에 두고 사용하는 물병이다. 스승이 사용하는 물병을 제자가 발로 차서 넘어뜨린 것은 스승도 부정하고 스승이 시험하는 그 문제까지도 부정한다는 뜻이다. 스승의 법을 계승하여 한 산중의 주인이 되려면 스승의 법을 능가해야한다. 자고로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하여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났을 때 그 집안과 그 문중은 희망이 있고 날로 번성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의미를 상징하여 보여준 것이리라.

 

 

 

■ 위산영우 선사 2 /참 부처가 여여하다

 

潙山 因仰山 問 如何是眞佛住處 師云 以思無思之妙 返思靈焰之無窮 思盡還源 性相 常住 理事不二 眞佛如如 仰山 言下 頓悟

 

위산 선사에게 앙산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참 부처가 머무는 곳입니까?”

위산 선사가 말씀하였다.

“생각하되 생각함이 없는 묘로써 신령한 불꽃의 무궁함을 돌이켜 생각하여 생각이 다하고 근원에 돌아가면 성품과 형상이 항상 머물며 이치와 현상이 둘이 아니며 참 부처가 여여하니라.”

앙산 스님이 그 말을 듣고 몰록 깨달았다.

 

해설 ; 참 부처가 사는 곳은 어떤 곳인가. 위산 선사는 생각하되 생각함이 없는 그 미묘한 작용을 먼저 말하였다. 우리들의 생각이란 한 순간도 멈추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작용한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되 조금도 흔적이 없다. 만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흔적이 있고 형상이 있다면 하루 동안 생각한 것만으로도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온갖 좋은 생각이나 나쁜 생각이나 간에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 그러므로 생각하되 생각함이 없다는 표현을 할 수 있다.

그러한 작용을 가지고 신령스럽게도 끊임없이 올라오는 무궁무진한 생각의 근본자리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실로 아무 것도 없다. 참으로 신묘한 도리다. 생각의 근본 뿌리는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자리다. 찾을 수 없으므로 그 자리는 텅 비어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이 근본이다. 없는 자리를 근본으로 함으로 성품과 형상은 언제나 그대로다. 설사 천변만화를 거듭하더라도 상주불변하는 그 자리다. 이치도 사상도 또한 두 가지가 아닌 하나의 도리다. 그러한 본래의 자리를 참 부처가 여여하다고 한다.

현상이 아무리 복잡다단하게 펼쳐져 있더라도 이와 같은 근본이며 본체인 경지를 이해한다면 무엇에도 동요가 없을 것이다. 무엇에도 동요가 없는 것을 여여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