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해서 시를 쓰는 이유는 시인마다 다르고 우리가 그 많은 시간을 시쓰기에 소모하는 것은 무슨 사회적- 일상적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가치에서 도망가고 도피하고 초월하기 위해서이다. 현실에서 도망가고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어디까지나 한 시대,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나 도덕적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나 도덕적 가치는 영원한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진리도 아니다. 모두가 한 시대, 한 사회를 끌고 가기 위한 신화이고 허위이다. 이른바 허위 이데올로기이다. 시인들은 만일 그가 참된 시인이라면 이런 이데올로기, 도덕적 가치가 허위라는 것을 직관으로 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이데올로기, 도덕적 가치와 싸울 힘이 없다. 시인은 정치인도 군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현실과 직접 싸울 힘이 없는 시인이 할 일은 무엇인가? 두 가지 길밖에 없다. 하나는 자살이고 다른 하나는 도망이다. 물론 현실을 수용하면서 그럭저럭 사는 길도 있다. 그러나 옛날이나 오늘이나 훌륭한 시인들은 자살 아니면 도망가는 길을 택했다. 현실이 무서워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치사해서, 너무나 속이 뻔히 들여다보여서 도망간다. 도망이 승리이고 도피가 개선이고 그런 점에서 패배가 승리이다. 도피의 역설이다.
초월은 말이 고상해서 초월이지 크게 보면 혹은 좀더 따지고보면 현실을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은 정신의 차원이기 때문에 초월도 현실 도피이고 도망이다. 물론 불교에서는 출가(出家)라는 말을 쓴다. 출가란 무엇인가? 세속을 벗어나 참된 자아, 말하자면 자아가 없다는 것, 무아(無我)를 깨닫기 위한 수행 길에 들어섬을 의미한다. 불교가 노리는 것은 무슨 정신적 초월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따르는 그 정신이라는 것을 죽이는 노력이고, 따라서 단념이고 체념이고 없애기이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의 경지에 든 스님들은 다시 세속으로 나와 어리석은 중생들을 교화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문맥에서는 현실 초월이 현실 단념을 통한 현실과의 만남이 중요하다. 말하자면 불교의 문맥에선 현실이 비현실이고 비현실이 현실이다. 유(有)가 무(無)이고 무가 유인 이른바 공(空)이 중요하다. 그러나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종교는 예술과 다르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섣불리 무슨 말을 할 수는 없고 내가 강조하는 것은종교와 예술의 차이다. 시인의 현실 초월은 정신적 초월이고 이 초월은 결국 현실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종교의 경우, 특히 불교의 경우 이 초월은 초월이 아니라 단념이고 체념이고 육체와 정신의 총체적인 포기이고 이른바 방하착(放下着)이고 이런 체념을 통해 깨달은 스님은 다시 현실로 돌아와 중생을 교화한다는 것. 그러므로 예술적 초월과 종교적 초월은 다르다. 이 것이 시인과 스님의 차이이고 미학과 종교의 차이이고 시쓰기와 수행의 차이이다. 시는 예술이고 불교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경허 스님과 보들레르가 다르다.
결국 시를 쓰는 이유는 비록 개인마다 다르지만 크게 보면 시인은 현실이 싫어서 못마땅해서 현실에 대한 욕구불만이 충족되지 않아서 시를 쓰고 결핍이, 고독이 시쓰기의 동기이다. 도망, 도피, 초월이라는 말은 이런 사정을 동기로 한다. 따라서 시는 자본주의 사회, 그것도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비록 덧없는 것이지만 이 덧없음이 유토피아와 통한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 식으로 말하면 시쓰기는 여행에의 초대이다. 어디로?
내 사랑, 내 누이
꿈꾸어 보렴 거기서
단 둘이 사는 달콤한 행복을!
한가로이 사랑하며
사랑하며 죽을 것을
나를 닮은 그 나라에서!
흐린 하늘의
안개 서린 태양은
내 영혼에 신비스런 매력을 지니고 있다
눈물을 통해 반짝이는
변덕스런 나의 눈처럼
그곳은 모두가 질서와 아름다움
호사. 고요 그리고 쾌락
세월에 닦이어
윤택나는 가구들이
우리들의 침실을 꾸미리
꽃향기를 용연향의
은은한 향기와
섞은 아주 희귀한 꽃들
화려한 천정
끝없는 거울
동양적인 광채
이 모두가 말하리
은밀히 영혼에게
제 고향의 정다운 언어로
그곳은 모두가 질서와 아름다움
호사. 고요 그리고 쾌락
--보들레르, <여행에의 초대>(민희석, 이재호 역) 부분
보들레르이 <여행에의 초대> 전반부이다. 대학 시절 나는 얼마나 이 시에 매혹되었던가? 시인은 애인에게 프랑스가 아닌 이국에 가서 살자고 노래한다. 그 나라에서 그는 '한가로이 사랑하며/ 사랑하며 죽을 것'을 꿈꾼다. 더욱 그 나라는 애인을 닮은 나라이다. 그곳에 있는 것은 질서, 아름다움, 호사, 고요, 쾌락이다. 이런 나라, 이런 곳에 아름다운 침실을 꾸미고 꽃들과 거울로 장식하고, 그것도 끝없는 거울로 장식한다. '안개 서린 눈'은 눈물에 젖은 애인의 눈물이고 용연향은 향유고래에서 채취한 향료로 사향같은 향기가 난다.
물론 이런 나라는 없다. 어디까지나 시인의 상상 속에 있고 따라서 시에만 있다. 결국 시를 쓰는 것도 이렇게 어디에도 없는 나라.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이 세상에는 없지만 어디엔가 있다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나라, 물론 이런 나라는 '여행에의 초대'처럼 아름답고 화려하고 호사스런 나라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고통과 악몽과 불인의 나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나라에서 우리가 세상을, 사물을, 삶을, 나를 새롭게, 다르게, 낯설게, 생생하게 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은 시쓰기라는 여행으로 당신들을 초대한다. 꿈꾸어 보렴, 거기 가서 단 둘이 사는 달콤한 여행을!
(제 1강 어떻게 시작할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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