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東豆川) Ⅰ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혀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 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동두천, 문학과지성사, 1979>
厚浦
바다는 조용하다, 헛소문처럼
장마비 양철지붕을 후둘기다 지나가면
낮잠도 무성한 잔물결에 부서져 연변 가까이
떼지어 날아오르는 새떼들
보인다, 어느새 비 걷고
그을음 같은 안개 비껴 산그늘에는
채 씻기다만 버드나무 한 그루
이따금씩 원동기소리 늘어진 가지에 와 걸리고 있다
바람은 城砦만 구름들 하늘 가운데로 옮겨놓는다
세월 속으로, 세월 속으로, 끌고 갈 무엇이 남아서
적막도 저 홀로 힘겨운 노동으로
문득 병든 무인도를 파랗게 질리게 하느냐
누리엔 놀다가는 파도가 쌓아놓은
덕지덕지 그리움, 한 꺼풀씩 벗어야 할 허물의
쓸쓸한 시절이 네 마음속 캄캄한 석탄에 구워진다
뼈가 휘도록, 이 바닥에서, 너는,
그물코에 꿰여 삶들은, 모른다 하지 못하리
凶漁에 엎어져도 우리 함께 견뎠던 여름이므로
키 큰 장다리 제 철 내내 마당가에 꽃을 피워 더 먼
바다를 내다보고 섰는데
스스로 받아 챙기던 욕망은 다 그런 것일까
멈칫멈칫 나아가다 恃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자다깨다자다깨다 눅눅한 꿈들만 어지럽게
헤매며 길을 잃는다
그래도, 눈을 들어 보리라, 저 산들과
산들이 끊어놓은 자리
다시 이어져 달려나가는 눈물겨운 수평선을
華嚴에 오르다
어제 하루는 화엄 경내에서 쉬었으나
꿈이 들끓어 노고단을 오르는 아침 길이 마냥
바위를 뚫는
천공 같다, 돌다리 두드리며 잠긴
山門을 밀치고 올라서면 저 천연한
수목 속에서도 안 보이는
하늘의 雲板을 힘겹게 미는 바람소리 들린다
간밤에는 비가 왔으나, 아직 안개가
앞선 사람의 자취를 지운다, 마음이 九折羊腸인 듯
길을 뚫는다는 것은
그렇다, 언제나 처음인 막막한 저 낯선 흡입
묵묵히 앞사람의 행로를 따라가지만
찾아내는 것은 이미 그의 뒷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엇이 이 산을 힘들게 오르게 하는가
길은, 누군들에게 물음이
아니랴, 저기 산모롱이 이정표를 돌아
의문부호로 꼬부라져 羽化登仙해 버린 듯 앞선 일행은
꼬리가 없다, 떨어져도 떠도는 산울림처럼
이 허방 허우적거리며 여기까지 좇아와서도
나는 정작 내 발의 티눈에 새삼스럽게 혼자 아픈가
길섶 풀물에 든
낡은 經소리 한 구절 내내 떨쳐버리지 못해
시큰대는 발자국마다 마음 질척거리는데
화엄은 화음 속에 얼굴 감추고 하루종일
굴참나무 잔가지에 얹히는 經典을 들어 나를 후려친다
칼새의 방
십여 년 전인가, 나는
상봉동의 바위산에 올라가
닥지닥지 눌러앉은 서울의 집들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때 집이 없었으므로
눈 높이까지 차오른 저 집들의 어디에
나도 마음 누일 방 한 칸 있었으면 했다, 가솔들을 끌고
몇 개월마다의 이사와 가파르던 숨결
그리고 십 년 후에 나는 내 집 근처 약수터 야산 밑으로
이삿짐에 얹혀 트럭에 실려가는
한 聖가족을 본다, 저기 누군가
아직도 이 도시에서는 모세처럼
식솔들을 끌고 해마다 출애굽하는 가장들이 있는 것이다
어디에 있을 방 한칸을 찾아
절박했지만, 그러나 방 한 칸 없어 절망조차 없던
그때는 마른 풀 가득한 빈 들의 시절이었을까
인생은 그런 것인가, 방 한 칸의 희망을 완성하고
저렇게 나이 들고 무료하면 하릴없이
여기 와서 빈 물통 채우면서
나도 고함이나 한번 크게 질러보는 것인가
빈 것은 빈 것이 아니라고 우기던
겨우 그런 나이를 지나서
저 아래 빈 방인 저의 무덤 곁으로
다시 언덕을 내려가는 것일까
어차피 빈 방이 없어도 저기 저 바위가 제 식탁이라는 듯
모이를 줍고 있는 칼새 한 마리
누가 뿌린 것도 아닌데 제법 만족한 식사를 끝내고
칼새는 바위에 부벼 제 부릴 닦으며 즐겁게 재잘거린다
저렇게 앉아 있는 모습이 칼새 같지가 않다, 득의한 제왕처럼 날개짓도 한번 크게 쳐보이면서
아직 집이 없으므로 절망의 둥지는 틀지 않고
칼새는 다만 자유롭게 서성거리면서
유타시편(詩篇)·Ⅴ
저기 흘립한 바위 너머의 아득함은 아득함인 채
산을 능선을 핑계 삼아 경계 이쪽만
제 풍경인 양 보여준다
가려져 있는 길과 호수도 우리가 익히 안다는 것일까
볼 수 없는 등성이 너머 저쪽 인연에 기댄 삶이여
몸은 여기 있고 마음은 거기 가닿는 이 고립이
첩첩 산 너머 푸르름 일깨운다
거기서 누가 창문을 여는가, 담배연기
흩어지니 이 공기 속의 매캐함과
거기서 누가 술잔을 따르는지, 저녁 으스름이 켜드는
별빛의 홍등 아래 물새들 첨벙거리는 소리 들려와
호수를 따라나서면 어느새
침엽수림의 군단은 어둠 저켠으로 가라앉아 있다
구릉 사이로 쏟아지던 만년빙하(萬年氷河)여, 눈 녹은
호수에 쉬던 구름이여
까닭 없이 막막하고 아득하지만
내일이면 나도 여기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둘러보면 저 실핏줄 같은 개울물도 눈가의
소금길 씻어
먼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우리는 전인미답의 길을 밟고 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양의 미로를 잠시 잊었을 뿐, 물냄새로
제 길을 거슬러 고단하게 가고 있는
연어들의 떼
그러니 마음을 연결하고 이끄는 것은 눈에
보이는 길 아니다
끊길 듯 세로(細路)를 이어 별들과 별들 사이로 벋어 있는
성층 위의 한 겹 하늘, 위로 또한 물, 겹겹이
적시고 건너야 할
얽히고 설킨 길들만 여기 서서
저문 뒤에도 오래 바라볼 뿐!
소태리 點景
-현산에게
그대 마음 처마에도 닿아 출렁거릴 물푸름, 가없이 뻗어나가는
이곳 동네 이름 소태리라는 곳이다
나는 지금 둘로 나뉘었다가 하나이기도 하는 건너편
곶을 당겨놓고
방파제 안쪽 주점에 앉아 있다. 소태리
파도 비듬이 망사 옷깃에 슬리듯 수수바람머리로 붐빌 때.
하루치의 굴곡, 돌아보는 생애의 파란, 온 몸을 던져
심연 속으로 밀려나가다 이내 곰방대는 고깃배도 몇 척
시야에 섞인다, 네가 멈춘
풍경은 이 지점일까, 나는 끊어진 네 생각을
이 물길로 이어보지만 일몰 전의 광휘가 수만 물거울로
반사시켜 흩어버린다
나 한때 길 끝 진리로 헤매면서 네게도 세상 끝까지
소금으로 흘러가라 했던가, 여기서 보면 소태리
햇빛들 구리판을 두들겨 펴는 듯 수평선 쪽이 더욱 두근대지만
하루치의 허락 너무 짧아 바다의 길도 이내 지워진다
消盡이 내 길이라면 나는 모든 길 끝이
어둠 속으로 놓여나려고 뿔뿔이 저를 거두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본다, 다시 태어난들
저 바다를 완성시키려고 일몰 속에
지금처럼 이 의자에 앉아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이 풍경이 너의 풍경이고 나는 다만 내 앞에
저무는 바다가 있어 그것을 마주 대하고 있다
끊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려고 소태리 어둠이
모든 시야를 점령하러 오기 전
마지막 경계가 새어나가면서 먼 곳이 한결 뚜렷해진다
남은 노을이 나를 당겨 외로움 불거지지만
나는 애써 외로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어졌다
-98 올해의 좋은 시 , 현대문학 중에서-
소금바다로 가다
내 몸이 소금을 필요로 하니, 날마다 소금에 절어가며
먹장 모연 세월 썩는 육체를 안고 가는 여행 힘에 겹네
썩어서 부식토가 되는 나뭇잎이 자연을 이롭게 한다면
한줌 낙엽의 사유라도 길바닥에 떨구면 따뜻하리라
그러나 찌든 엽록의 세상 너덜토록
풍화시킨 쉰 살밖에 없어
후줄근한 퇴근길의 오늘 새삼 춥구나
저기, 사람이 있네, 염전에는 등만 보이고
모습을 볼 수 없는 소금 굽는 사람이 있네
짜디짠 땀방울로 온몸 적시며
저물도록 발틀 딛고 올라도 늘 자기 굴헝에 떨어지므로
꺼지지 않으려고 수차를 돌리는 사람, 저 무료한 노동
진종일 빈 허벅만 퍼올린 듯 소금 보이지 않네
하나, 구워진 소금 어느새 썩는 살마다 저며와 뿌옇게
흐린 눈으로 소금바다 바라보게 하네
그 눈물 다시 쓰린 눈금으로 뭉치려고
드넓은 바다로 돌아서게 하네
겨울의 빛
골목 안 국밥집에는 두 사내가 마주앉아
허름한 저녁을 들고 있다, 뚝배기 속으로
달그락거리던 숟갈질이 빈 반찬그릇에서 멎자
한 사내는 아쉬운 듯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붙여 물고
유리창 밖을 내다본다, 마주앉은 사내는
목덜미를 타고 내리는 식은땀은 닦아낼
겨를도 없이 남은 국물을 들이마시고
마지막 깍두기를 씹고 있다, 언제 왔는지 어둠이
깊은 심연처럼 그릇 바닥에 고여
어둑히 내다보면 구겨지는 골목으로 벗어나며
저 사내에게 갈 곳이 있다는 것일까
어느새 웃자란 수염이 차지한 뽀쪽턱을 비껴
추위에 움츠린 겨울의 街燈들이 무심한 듯
길바닥에 일렁거리지만
불빛이 감추는 망막 때문에 유리창 안쪽으로
따뜻한 것들이 기웃거리는지
아까부터 군청색 작업복의 사내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대책 없는 허술한 앞날일 뿐
잿빛 잠바도 모르는 사내들의 길 위로 어디서나
흔해빠진 길들을 차지하려고 사람들은
저렇게 바쁘게 오고 간다
과부새에게
터널 저쪽으로
한 세상이 열려 있다
어둠을 다 빠져 나가거든 기차여,
저 환한 세상은 우리가 미처 가보지 못한 곳
끝끝내 바꿔 살지 못한 레일을 달려가서
내 생(來生)이 무너지게 무너지게 기적을 울려다오
절망의 꽃인 듯 안개꽃 몇 타래 피워들고
지치거든, 사랑아
나, 여기 잠시 장사 왔다가 돌아가는 사람
쉬임 없이 서쪽으로 가는 구름에도 흔들리며
팔고 팔았던 슬픔과 웃음을 셈해 본다
돌아가는 사람에게는 짐들이 없다, 다 팔았다
가볍다, 미처 못 누린 시간도 저처럼 가볍다면
봄날 죽지 떨군 새 한 마리
꽃진 가지 위에서 우짖지 않았을걸
내년에도 이맘때쯤
찾아와 울 과부새도 있다
오늘은 새 혼자 울게 하고, 새 혼자 그치게 하라
軍浦
차를 타고 넘어가다 보면
바람이 헤매는 세상 낯선 들머리에 선 듯
그대 길 끊어지고, 납빛 매연 철버덕이는
서쪽 천막을 뚫고 전동차 간다
그러면 몸은 돌아와 떨리듯 다시 뼈저리는
군포, 네 슬픔 짐작하겠다
포구는 어디 있는가
개들이 列兵처럼 떼지어 건너가는 개류지 너머
바라보면 야산 아래로
집들은 나직이 코를 박고, 발정난 공장 굴뚝들이
하늘을 향해 연기를 게워대는 거기,
건물과 건물 사이로 구부린 담이며 빛 바랜 벽보들이
탈색한 채 담아내는 욕망들조차
시간은 하나도 지워버리지 못하고
축축이 변방으로 가두고 젖는
쇠목소리만 지치도록 귓속에 耳嗚 난다
한때 빛나던 정신의 청남빛 높이
허공에 뜬 가로수들 죄다 옆구리에
목발을 끼고 메마른 모습으로 버팅길 때
황토 흙먼지에 놓으려 했던 것들이
있었던가, 우리는 이미 늙은 것인가
가슴속 몇만 볼트의 고압선을 품고 활활
태우며 가고 갔던 저 불꽃 같은 젊음도 사그라져
어둠의 길 열리니 여기도 내 여울이리라
어지럽게 떨어져 포말이고 말 세월이
힘을 다해 피우듯 한 등씩 가로등 켜진다
군포, 흔적 없이 네가 스며들어 흐려졌던 곳
차가운 바람머리로 돌아서면
매운 정신 하나 번개 치듯
아직도 마음 한사코 맨살로 벗겨내므로
몸이 몸을 그리워하듯 너를 그리워하겠다
길
길은 제 길을 끌고 무심하게
언덕으로 산모퉁이로 사라져가고
나는 따라가다 쑥댓잎 나부끼는 방죽에 주저앉아
넝마져 내리는 몇 마리 철새를 본다
잘 가거라, 언덕 저켠엔
잎새를 떨군 나무들
저마다 갈쿠리손 뻗어 하늘을 휘젓지만
낡은 해는 턱없이 기울어 서산마루에 잇다
길은 제 길을 지우며 저물어도
어느 길 하나 온전히 그 끝을 알 수 없고
바라보면 저녁 햇살 한 줄기 금빛으로 반짝일 뿐
다만 수면 위엔 흔들리는 빈 집일 뿐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혀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 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동두천, 문학과지성사, 1979>
厚浦
바다는 조용하다, 헛소문처럼
장마비 양철지붕을 후둘기다 지나가면
낮잠도 무성한 잔물결에 부서져 연변 가까이
떼지어 날아오르는 새떼들
보인다, 어느새 비 걷고
그을음 같은 안개 비껴 산그늘에는
채 씻기다만 버드나무 한 그루
이따금씩 원동기소리 늘어진 가지에 와 걸리고 있다
바람은 城砦만 구름들 하늘 가운데로 옮겨놓는다
세월 속으로, 세월 속으로, 끌고 갈 무엇이 남아서
적막도 저 홀로 힘겨운 노동으로
문득 병든 무인도를 파랗게 질리게 하느냐
누리엔 놀다가는 파도가 쌓아놓은
덕지덕지 그리움, 한 꺼풀씩 벗어야 할 허물의
쓸쓸한 시절이 네 마음속 캄캄한 석탄에 구워진다
뼈가 휘도록, 이 바닥에서, 너는,
그물코에 꿰여 삶들은, 모른다 하지 못하리
凶漁에 엎어져도 우리 함께 견뎠던 여름이므로
키 큰 장다리 제 철 내내 마당가에 꽃을 피워 더 먼
바다를 내다보고 섰는데
스스로 받아 챙기던 욕망은 다 그런 것일까
멈칫멈칫 나아가다 恃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자다깨다자다깨다 눅눅한 꿈들만 어지럽게
헤매며 길을 잃는다
그래도, 눈을 들어 보리라, 저 산들과
산들이 끊어놓은 자리
다시 이어져 달려나가는 눈물겨운 수평선을
華嚴에 오르다
어제 하루는 화엄 경내에서 쉬었으나
꿈이 들끓어 노고단을 오르는 아침 길이 마냥
바위를 뚫는
천공 같다, 돌다리 두드리며 잠긴
山門을 밀치고 올라서면 저 천연한
수목 속에서도 안 보이는
하늘의 雲板을 힘겹게 미는 바람소리 들린다
간밤에는 비가 왔으나, 아직 안개가
앞선 사람의 자취를 지운다, 마음이 九折羊腸인 듯
길을 뚫는다는 것은
그렇다, 언제나 처음인 막막한 저 낯선 흡입
묵묵히 앞사람의 행로를 따라가지만
찾아내는 것은 이미 그의 뒷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엇이 이 산을 힘들게 오르게 하는가
길은, 누군들에게 물음이
아니랴, 저기 산모롱이 이정표를 돌아
의문부호로 꼬부라져 羽化登仙해 버린 듯 앞선 일행은
꼬리가 없다, 떨어져도 떠도는 산울림처럼
이 허방 허우적거리며 여기까지 좇아와서도
나는 정작 내 발의 티눈에 새삼스럽게 혼자 아픈가
길섶 풀물에 든
낡은 經소리 한 구절 내내 떨쳐버리지 못해
시큰대는 발자국마다 마음 질척거리는데
화엄은 화음 속에 얼굴 감추고 하루종일
굴참나무 잔가지에 얹히는 經典을 들어 나를 후려친다
칼새의 방
십여 년 전인가, 나는
상봉동의 바위산에 올라가
닥지닥지 눌러앉은 서울의 집들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때 집이 없었으므로
눈 높이까지 차오른 저 집들의 어디에
나도 마음 누일 방 한 칸 있었으면 했다, 가솔들을 끌고
몇 개월마다의 이사와 가파르던 숨결
그리고 십 년 후에 나는 내 집 근처 약수터 야산 밑으로
이삿짐에 얹혀 트럭에 실려가는
한 聖가족을 본다, 저기 누군가
아직도 이 도시에서는 모세처럼
식솔들을 끌고 해마다 출애굽하는 가장들이 있는 것이다
어디에 있을 방 한칸을 찾아
절박했지만, 그러나 방 한 칸 없어 절망조차 없던
그때는 마른 풀 가득한 빈 들의 시절이었을까
인생은 그런 것인가, 방 한 칸의 희망을 완성하고
저렇게 나이 들고 무료하면 하릴없이
여기 와서 빈 물통 채우면서
나도 고함이나 한번 크게 질러보는 것인가
빈 것은 빈 것이 아니라고 우기던
겨우 그런 나이를 지나서
저 아래 빈 방인 저의 무덤 곁으로
다시 언덕을 내려가는 것일까
어차피 빈 방이 없어도 저기 저 바위가 제 식탁이라는 듯
모이를 줍고 있는 칼새 한 마리
누가 뿌린 것도 아닌데 제법 만족한 식사를 끝내고
칼새는 바위에 부벼 제 부릴 닦으며 즐겁게 재잘거린다
저렇게 앉아 있는 모습이 칼새 같지가 않다, 득의한 제왕처럼 날개짓도 한번 크게 쳐보이면서
아직 집이 없으므로 절망의 둥지는 틀지 않고
칼새는 다만 자유롭게 서성거리면서
유타시편(詩篇)·Ⅴ
저기 흘립한 바위 너머의 아득함은 아득함인 채
산을 능선을 핑계 삼아 경계 이쪽만
제 풍경인 양 보여준다
가려져 있는 길과 호수도 우리가 익히 안다는 것일까
볼 수 없는 등성이 너머 저쪽 인연에 기댄 삶이여
몸은 여기 있고 마음은 거기 가닿는 이 고립이
첩첩 산 너머 푸르름 일깨운다
거기서 누가 창문을 여는가, 담배연기
흩어지니 이 공기 속의 매캐함과
거기서 누가 술잔을 따르는지, 저녁 으스름이 켜드는
별빛의 홍등 아래 물새들 첨벙거리는 소리 들려와
호수를 따라나서면 어느새
침엽수림의 군단은 어둠 저켠으로 가라앉아 있다
구릉 사이로 쏟아지던 만년빙하(萬年氷河)여, 눈 녹은
호수에 쉬던 구름이여
까닭 없이 막막하고 아득하지만
내일이면 나도 여기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둘러보면 저 실핏줄 같은 개울물도 눈가의
소금길 씻어
먼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우리는 전인미답의 길을 밟고 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양의 미로를 잠시 잊었을 뿐, 물냄새로
제 길을 거슬러 고단하게 가고 있는
연어들의 떼
그러니 마음을 연결하고 이끄는 것은 눈에
보이는 길 아니다
끊길 듯 세로(細路)를 이어 별들과 별들 사이로 벋어 있는
성층 위의 한 겹 하늘, 위로 또한 물, 겹겹이
적시고 건너야 할
얽히고 설킨 길들만 여기 서서
저문 뒤에도 오래 바라볼 뿐!
소태리 點景
-현산에게
그대 마음 처마에도 닿아 출렁거릴 물푸름, 가없이 뻗어나가는
이곳 동네 이름 소태리라는 곳이다
나는 지금 둘로 나뉘었다가 하나이기도 하는 건너편
곶을 당겨놓고
방파제 안쪽 주점에 앉아 있다. 소태리
파도 비듬이 망사 옷깃에 슬리듯 수수바람머리로 붐빌 때.
하루치의 굴곡, 돌아보는 생애의 파란, 온 몸을 던져
심연 속으로 밀려나가다 이내 곰방대는 고깃배도 몇 척
시야에 섞인다, 네가 멈춘
풍경은 이 지점일까, 나는 끊어진 네 생각을
이 물길로 이어보지만 일몰 전의 광휘가 수만 물거울로
반사시켜 흩어버린다
나 한때 길 끝 진리로 헤매면서 네게도 세상 끝까지
소금으로 흘러가라 했던가, 여기서 보면 소태리
햇빛들 구리판을 두들겨 펴는 듯 수평선 쪽이 더욱 두근대지만
하루치의 허락 너무 짧아 바다의 길도 이내 지워진다
消盡이 내 길이라면 나는 모든 길 끝이
어둠 속으로 놓여나려고 뿔뿔이 저를 거두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본다, 다시 태어난들
저 바다를 완성시키려고 일몰 속에
지금처럼 이 의자에 앉아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이 풍경이 너의 풍경이고 나는 다만 내 앞에
저무는 바다가 있어 그것을 마주 대하고 있다
끊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려고 소태리 어둠이
모든 시야를 점령하러 오기 전
마지막 경계가 새어나가면서 먼 곳이 한결 뚜렷해진다
남은 노을이 나를 당겨 외로움 불거지지만
나는 애써 외로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어졌다
-98 올해의 좋은 시 , 현대문학 중에서-
소금바다로 가다
내 몸이 소금을 필요로 하니, 날마다 소금에 절어가며
먹장 모연 세월 썩는 육체를 안고 가는 여행 힘에 겹네
썩어서 부식토가 되는 나뭇잎이 자연을 이롭게 한다면
한줌 낙엽의 사유라도 길바닥에 떨구면 따뜻하리라
그러나 찌든 엽록의 세상 너덜토록
풍화시킨 쉰 살밖에 없어
후줄근한 퇴근길의 오늘 새삼 춥구나
저기, 사람이 있네, 염전에는 등만 보이고
모습을 볼 수 없는 소금 굽는 사람이 있네
짜디짠 땀방울로 온몸 적시며
저물도록 발틀 딛고 올라도 늘 자기 굴헝에 떨어지므로
꺼지지 않으려고 수차를 돌리는 사람, 저 무료한 노동
진종일 빈 허벅만 퍼올린 듯 소금 보이지 않네
하나, 구워진 소금 어느새 썩는 살마다 저며와 뿌옇게
흐린 눈으로 소금바다 바라보게 하네
그 눈물 다시 쓰린 눈금으로 뭉치려고
드넓은 바다로 돌아서게 하네
겨울의 빛
골목 안 국밥집에는 두 사내가 마주앉아
허름한 저녁을 들고 있다, 뚝배기 속으로
달그락거리던 숟갈질이 빈 반찬그릇에서 멎자
한 사내는 아쉬운 듯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붙여 물고
유리창 밖을 내다본다, 마주앉은 사내는
목덜미를 타고 내리는 식은땀은 닦아낼
겨를도 없이 남은 국물을 들이마시고
마지막 깍두기를 씹고 있다, 언제 왔는지 어둠이
깊은 심연처럼 그릇 바닥에 고여
어둑히 내다보면 구겨지는 골목으로 벗어나며
저 사내에게 갈 곳이 있다는 것일까
어느새 웃자란 수염이 차지한 뽀쪽턱을 비껴
추위에 움츠린 겨울의 街燈들이 무심한 듯
길바닥에 일렁거리지만
불빛이 감추는 망막 때문에 유리창 안쪽으로
따뜻한 것들이 기웃거리는지
아까부터 군청색 작업복의 사내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대책 없는 허술한 앞날일 뿐
잿빛 잠바도 모르는 사내들의 길 위로 어디서나
흔해빠진 길들을 차지하려고 사람들은
저렇게 바쁘게 오고 간다
과부새에게
터널 저쪽으로
한 세상이 열려 있다
어둠을 다 빠져 나가거든 기차여,
저 환한 세상은 우리가 미처 가보지 못한 곳
끝끝내 바꿔 살지 못한 레일을 달려가서
내 생(來生)이 무너지게 무너지게 기적을 울려다오
절망의 꽃인 듯 안개꽃 몇 타래 피워들고
지치거든, 사랑아
나, 여기 잠시 장사 왔다가 돌아가는 사람
쉬임 없이 서쪽으로 가는 구름에도 흔들리며
팔고 팔았던 슬픔과 웃음을 셈해 본다
돌아가는 사람에게는 짐들이 없다, 다 팔았다
가볍다, 미처 못 누린 시간도 저처럼 가볍다면
봄날 죽지 떨군 새 한 마리
꽃진 가지 위에서 우짖지 않았을걸
내년에도 이맘때쯤
찾아와 울 과부새도 있다
오늘은 새 혼자 울게 하고, 새 혼자 그치게 하라
軍浦
차를 타고 넘어가다 보면
바람이 헤매는 세상 낯선 들머리에 선 듯
그대 길 끊어지고, 납빛 매연 철버덕이는
서쪽 천막을 뚫고 전동차 간다
그러면 몸은 돌아와 떨리듯 다시 뼈저리는
군포, 네 슬픔 짐작하겠다
포구는 어디 있는가
개들이 列兵처럼 떼지어 건너가는 개류지 너머
바라보면 야산 아래로
집들은 나직이 코를 박고, 발정난 공장 굴뚝들이
하늘을 향해 연기를 게워대는 거기,
건물과 건물 사이로 구부린 담이며 빛 바랜 벽보들이
탈색한 채 담아내는 욕망들조차
시간은 하나도 지워버리지 못하고
축축이 변방으로 가두고 젖는
쇠목소리만 지치도록 귓속에 耳嗚 난다
한때 빛나던 정신의 청남빛 높이
허공에 뜬 가로수들 죄다 옆구리에
목발을 끼고 메마른 모습으로 버팅길 때
황토 흙먼지에 놓으려 했던 것들이
있었던가, 우리는 이미 늙은 것인가
가슴속 몇만 볼트의 고압선을 품고 활활
태우며 가고 갔던 저 불꽃 같은 젊음도 사그라져
어둠의 길 열리니 여기도 내 여울이리라
어지럽게 떨어져 포말이고 말 세월이
힘을 다해 피우듯 한 등씩 가로등 켜진다
군포, 흔적 없이 네가 스며들어 흐려졌던 곳
차가운 바람머리로 돌아서면
매운 정신 하나 번개 치듯
아직도 마음 한사코 맨살로 벗겨내므로
몸이 몸을 그리워하듯 너를 그리워하겠다
길
길은 제 길을 끌고 무심하게
언덕으로 산모퉁이로 사라져가고
나는 따라가다 쑥댓잎 나부끼는 방죽에 주저앉아
넝마져 내리는 몇 마리 철새를 본다
잘 가거라, 언덕 저켠엔
잎새를 떨군 나무들
저마다 갈쿠리손 뻗어 하늘을 휘젓지만
낡은 해는 턱없이 기울어 서산마루에 잇다
길은 제 길을 지우며 저물어도
어느 길 하나 온전히 그 끝을 알 수 없고
바라보면 저녁 햇살 한 줄기 금빛으로 반짝일 뿐
다만 수면 위엔 흔들리는 빈 집일 뿐
'시인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재삼시모음 (0) | 2006.09.17 |
---|---|
복효근시모음 (0) | 2006.09.15 |
유홍준시모음(2) (0) | 2006.09.07 |
[스크랩] 송찬호 시모음 (0) | 2006.09.06 |
[스크랩] 김기택 시모음 (0) | 2006.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