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하였으며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꼽추」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태아의 잠』(1992), 『바늘구멍 속의 폭풍』(1994),
『사무원』(1999)이 있으며
김수영문학상(1995), 현대문학상(2001), 이수문학상(2004),
미당문학상(2004)을 수상하였다.
곱추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 뿐이었다
가끔 등뼈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점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상계동 비둘기
비둘기들은 상계역 전철 교각 위에 살고 있다
콘크리트 교각을 닮아 암회색이다
전동차가 쿵, 쿵, 쿵, 울리며 지나갈
때마다
비둘기들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교각처럼 쿵, 쿵, 쿵, 자연스럽게 흔들린다
비둘기들은 교각 위에 나란히 앉아
자기들
집과 닮은 고층 아파트들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듯
비둘기들도 상계역 주변 거리를 내려다본다
도로변 곳곳에
음식물 쓰레기와 물웅덩이가 있다
사람들이 노점에서 주전부리를 즐기는 동안
비둘기들도 거리에서 푸짐한 먹거리를 즐긴다
자동차들이
쉬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지만
비둘기들은 가볍게 경적과 속도를 피하며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듯 느긋하게 모이를 고른다
가랑이
사이로 비둘기가 활보하는 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막연히 남의 구두가 지나갔겠거니 생각한다
비둘기들은 검은 먼지와 매연을
뒤집어쓰고
언제나 아스팔트를 보호색으로 입고 다녀서
상계역에 비둘기들이 사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방금 딴 사과들이 가득한 상자를 들고
사과들이 데국데굴 굴러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
그녀는 서류뭉치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고층사무실 안에서
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빛깔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은 사과들을
사과 속에 핏줄처럼 뻗어 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
스스로 넘치고 무거워져서 떨어지는 웃음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사과를 나르던 발걸음을
발걸음에서 튀어오르는 공기를
공기에서 터져나오는 햇빛을 햇빛 과즙과 햇빛 향기를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지금 디딘 고층이 땅이라는 것을
뿌리처럼 발바닥이 숨쉬어온 흙이라는 것을
흙을 공기처럼 밀어올린 풀이라는 것을
나 몰래 엿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웃음을
그녀의 내부에서 오랜 세월 홀로 자라다가
노래처럼 저절로 익어 흘러나온 웃음을
책상들 사이에서 잠깐 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걸음을
출렁거리며 하늘거리며 홀로 가는 걸음을
걷지 않아도 저절로 나아가는 걸음을
*추수꾼: 윌리암 워즈워드의 시 ' The Solitary Reaper ' 에서 인용
(제 4회 미당 문학상 수상작)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마흔이 넘은 그녀는
아직도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옛날하고 똑같다!
오빠, 신문에서 봤어.
오빠 시집도 읽었어, 두 권이나!
얼굴은 낯설었으나 웃음은 낯익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중년의 얼굴에서
옛날에 보았던 소녀가 뛰어나왔다.
작고 어리던 네가
다리 사이에 털도 나고 브래지어도 차는
크고 슬픈 몸이 되었구나.
네 가녀린 몸을 찢고
엄마보다 큰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이 나왔구나.
긴 세월은 남편이 되고 아이들이 되어
네 몸에 단단히 들러붙어
마음껏 진을 빼고 할퀴고 헝클어뜨려놓았구나.
삼십 여 년 전의 얼굴을 채 익히기도 전에
엄마와 아내를 찾는 식구들이 쳐들어오자
소녀는 얼른 웃음을 거두고
중년의 얼굴로 돌아갔다.
오빠, 갈게.
손 흔들며 맑게 웃을 때 잠깐 보이던 소녀는
돌아서자마자 수다를 떨며
다 큰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며
다시 흔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김기택 시집 "소" 중에서 『문학과지성사』
사무원
이른 아침 6시부터 밤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에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害管理臺帳經과 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 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 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다.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가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長座不立'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에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 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다
창문이 모두 아파트로 되어 있는 전철을 타고
오늘도 상계동을 지나간다.
이것은 32평, 저것은 24평, 저것은
48평,
일하지 않는 시간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또 창문에 있는 아파트 크기나 재본다
전철을 타고 가는 사이
내 어릴 적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어떤 모습이었을까?
무엇을 하며 놀았을까?
나를 어른으로 만든 건 시간이 아니라 망각이다.
아직 이 세상에 한 번도 오지 않은 미래처럼
나는
내 어린 시절을 상상해야 한다.
지금의 내 얼굴과 행동과 습관을 보고
내 어린 모습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러나 저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노인들의
어릴 적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하듯이
기억은 끝내 내 어린 시절을 보여주지 못한다.
지독한 망각은 내게 이렇게 귀띔해준다.
너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 얼굴이었을 거라고.
전철이 지하로 들어가자
아파트로 된 창문들이 일제히 깜깜해지더니
또 다른 아파트 창문 같은 얼굴들이 대신 나타난다.
내 얼굴도 어김없이 그 사이에 끼여 있다.
어릴 적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고요하다는 것
고요하다는
것은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고요를 현미경으로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당신은 곧 수많은 작은 소리 세포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숨소리......
바람소리 속에 숨어 있는 갖가지 떨리는 소리 스치는 소리
물소리 속에서
녹고 섞이고 씻기는 소리
온갖 깃털과 관절들 잎과 뿌리들이 음계와 음계사이에서
서로 비비며 움직이는 소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여운이 끝난 자리에서 살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그 희미한 소리와 소리
사이에서
새로 생겨나고 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너무 촘촘해서
현미경 밖에서는 그저 한 덩이
커다란 돌처럼 보이겠지요.
그러므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은 아주 당연하답니다.
하지만 한 모금 샘물처럼 이 고요를 깊이
들이켜보세요.
즐겁게 폐 속으로 들어오는 음악을 들어보세요.
고요는 가슴에 들어와 두근거리는 심장과 피의 화음을 엿듣고
허파의 리듬을 따라 온몸 가득 퍼져갈 것입니다.
뜨겁고 시끄러운 몸의 소리들은 고요 속에 섞이자마자
이내 잔잔해질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흔들어도
마음은 돌인 양 꿈쩍도 않을 것입니다.
멸치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잡히는 이 멸치에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파마하는 여자
어떤 머리로 해 드릴까요, 언니. 바람이 불지 않아도 항상 휘날리는 바람머
리로 할까요? 올해의 히트 상품, 파도머리는 어때요?
이마에 부딪쳐서 머리
위로 시원하게 넘어가는 물보라가 일품이죠. 언니는 얼굴이 넓으니까 파도를
높이 빗어올리면 정말 바다
같겠어요. 올 가을 신상품이요? 황금들판인데,
요즘 한창 뜨는 중이예요. 황금빛 염색 갈피갈피에 일렁이는 가을바람 무늬
를
넣지요.
여자들은 머리에 파마캡을 두르고 여성지를 보거나 요구르트를 빨며 앉아
있다. 오늘 파마한 머리가 성공적으로
푸른 싹을 틔우도록 산부인과의 임신
부들처럼 조심조심 움직이고 있다. 새로 태어날 멋지고 잘 생긴 머리를 태교
하듯 열심히
생각하는 중이다. 새 나무 그늘 아래에서 살게 될 얼굴을 그려
보고 있다. 추석이 지나면 여자들 머리에서는 늦가을 황금들판이 출렁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