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충북 보은생.
경북대 독문과 졸업.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 6호에 '금호강' '변비'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
2000년 제19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10년 동안의 빈 의자> 등
담쟁이 덩굴이 동물해부학을 들여다보다
오후 세 시, 동물병원은 고요하다
뚱뚱한 의자와
털이 잘 빗겨진 의자와
리본과 방울을 단 의자와
발톱에 빨간
메니큐어를 칠한 의자가
둘러앉아 소근거리고 있다
오늘은 출장 진료도 없었고
전화벨 소리도 조용하다
수의사 김표상
원장은
줄곧 동물 해부학을
들여다보고 있다
시를 담기 위한
여우의 뇌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창문을 넘어온 담쟁이
덩굴이
푸른 장미를 봉합하려다
실패한 수술가위와
바늘과 핀셋을
끊임없이 간섭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니, 오늘 한 번의
진료가 있었다
모호한 관념과
상상력으로
두통이 심한 환자
자, 미스터 도그씨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보세요
술, 매혹될 수밖에 없는
항아리에 말을 가득 부었다
항아리 속에서 말들이 소용돌이친다
가장자리에 닿지 않으려, 그렇게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려,
그렇게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려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말은 항아리를
끌어올리다 그대 매혹의 입술로
나는 다시 한 번 죽음을 불러낼 것이다
죽음은 옷
입혀질 것이다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죽음은 다시 어느 한 생애의 집이 될 것이다
뒤엎어진 잔이 기억을 되찾는다
한때는 복면이었고 어느 땐가는 부재자였던 그대
지금은 그대 입술에 감옥이 모여 있으니
말,닿으면 부패하는
감옥이 되는
그러나 매혹될 수밖에 없는
다시 잔을 비운다 모든 말들이
그들이 발생한 곳으로 되돌아간다
터질 듯한
매혹 거품 입술들만 남기고
고래의 꿈
나는 늘 고래의 꿈을 꾼다
언젠가 고래를 만나면 그에게 줄
물을 내뿜는 작은 화분 하나도 키우고 있다
깊은 밤 나는 심해의 고래방송국에 주파수를 맞추고
그들이 동료를 부르거나 먹이를 찾을 때 노래하는
길고 아름다운 허밍에 귀 기울이곤 한다
맑은 날이면 아득히 망원경 코끝까지 걸어가
수평선 너머 고래의 항로를 지켜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한다 고래는 사라져버렸어
그런 커다란 꿈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아
하지만 나는 바다의 목로에 앉아 여전히 고래의 이야기를 한다
해마들이 진주의 계곡을 발견했대
농게 가족이 새 펄집으로 이사를 한다더군
봐, 화분에서 분수가 벌써 이만큼 자랐는걸.....
내게는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 있다 내일은 5마력의 동력을
배에 더 얹어야겠다 깨진 파도의 유리창을 갈아 끼워야겠다
저 아래 물밑을 쏜살같이 흐르는 어뢰의 아이들 손을 잡고 해협을
달려봐야겠다
누구나 그러하듯 내게도 오랜 꿈이 있다
하얗게 물을 뿜어올리는 화분 하나 등에 얹고
어린 고래로 돌아오는 꿈
- 창작과 비평- 2006 여름호 중에서
외투
처음 우리는 거뭇한 그것이
누군가 내다버린
트렁크인 줄만 알았다
가까이 다가간 우리는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 무언가 신성한 것을
소유하고 있기나 한 듯이
일테면 성경을 싼
검은 가죽 케이스처럼,
얇은 외투 하나가
부랑자인 어느 사내를
꼬옥 감싸고 누워 있었다
턱까지 단추를 채우고
팔과 다리를 오그려
넣고
트렁크처럼 등을 부풀린 채,
이른 아침,
추운 날씨 때문에
우리는 곧 그 자리를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마치 조개이거나
달팽이 껍질이거나 한 듯이
누구나 한번쯤 그 앞에
불려가 시험을 받을 법했다
분주히 사람들이
오가는 지하도 입구에서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장지의 사람들이 땅을 열고 그를 봉해 버린다 간단한
외과수술처럼 여기 그가 잠들다
가끔씩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그곳에 심겨진 비명을 읽고 있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단단한 장미의 외곽을 두드려 깨는 은은한 포성의 향기와
냉장고 속 냉동된 각진 고기덩어리의
식은 욕망과
망각을 빨아들이는 사각의 검은 잉크병과
책을 지우는 사각의 고무지우개들
오래 구르던 둥근 바퀴가 사각의 바퀴로 멈추어지듯
죽음은 삶의 형식을 완성하는 것이다
미래를 예언하듯 그의 땅에 꽃을 던진다
미래는 죽었다 산 자들은 결코 미래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얼마나 찬란한 한계인가
그 완성을 위하여
세계를 죽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날마다 살인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은
폐허 속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망각 속에서 우리가 살인자라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풍성한 과일을 볼 때마다
그의 썩은
얼굴을 기억하듯
여기 그가 잠들다
여전히 겨울비는 내리고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꽃밭에서
탁란(濁亂)의 계절이 돌아와, 먼 산 뻐꾸기 종일 울어대다
채송화 까만 발톱 깎아주고 맨드라미 부스럼 살펴보다
누워 있는 아내의
입은 더욱 가물다 혀가 나비처럼 갈라져 있다
오후 한나절 게으름을 끌고 밭으로 나갔으나
우각(牛角)의 쟁기에 발만 다치고
돌아오다
진작부터 곤궁이 찾아온다고 했으나 마중나가진 못 하겠다
개들 고양이들 지나다니는 무너진 담장도 여태 손보지 않고
찬란한
저 꽃밭에 아직 생활의 문(問)도 세우지 못 했으니
비는 언제 오나
얘야, 빨래 걷어야 겠다
바지랑대 뻐꾸기 소리 다 말랐다
비평가가 뽑은 2002년 올해의 좋은 시에 선정된 시
만년필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 두었다 이것으로 경매
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룻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
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
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만년필은 백
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
다-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
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
가 산다
2005년<현대문학> 10월호
2005년 문예지에 발표된 162명 전문가가 좋은 2006년 최고의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