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관련글

홍성란 시인 <시와 함께. 겨울.계간평>

시치 2022. 12. 7. 15:26

 
시선 · 그 시를 읽고 나는 쓴다
『시와 함께』2020 · 겨울호 · 005


모든 끝은 시작이다


홍성란




난 원래 이른바 자유시가 전공이고 그것도 아는 분은 알겠지만 난해한 시를 썼고 최근에는 시인지 일기인지 모르는 시를 발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자유시를 그야말로 자유롭게 쓰고 다소 개판을 치는 입장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정형시인 시조에 관심을 두다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 세상일은 알 수 없다더니 내가 그 꼴이다. 아무튼 ①최근에 나는 잡지에 발표되는 자유시는 거의 읽지 못하는 상태이고 그건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최근에 발표되는 시들이, 특히 젊은 시인들의 시가 소통이 안 되고 너무 수다스럽고 문맥이 안 통해서 나 같은 시인은 도무지 읽을 힘도 없고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시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런 혼란, 무질서, 사설, 넋두리, 수다가 지겹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시조에 관심을 두는 것인지 모른다. (…중략…)
그는 삶의 느낌을 썼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시를 해설할 뿐이고 ②모든 해설은 해석이고 해석은 시각이고 시각은 입장이다. 그러니까 이런 해석은 나의 시각이고 나의 입장이기 때문에 다른 입장에선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이승훈, 「시조 읽기의 즐거움」(2009년 유고) 중에서


방장方丈 이승훈 선생의 유고遺稿를 가슴에 묻어둔 지도 십여 년이 흘렀다. 나는 과분하게 시집해설을 받았으나 당시 출판사를 확정하지 못해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김종철 선생의 배려로 문학수첩에서 시집을 내게 되었으니 개작과 신작을 포함해야 한다는 고민이 생겼다. 결국 이승훈 선생의 해설을 세상에 펼쳐 보이지 못하고 2013년에 신작 시집 『춤』을 내었다. 이제는 별이 되신 존경하는 두 분을 추억하며 이 글을 쓴다.
뜬금없이 세상에 내놓지 않은 유고를 인용하는 까닭은 단순하다. 선생의 글 가운데 내가 밑줄 긋고 번호를 넣은 ①과 ②를 인용하기 위해서다. 시집은 쌓이는데 읽기는 따라잡을 수가 없다. 방장께서 말씀하신 ‘혼란, 무질서, 사설, 넋두리, 수다’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명민하지 못한 나의 눈이 따라가지 못하는 시집에게 미안하다. 이런 생각이 오락가락하는 중에 짧고 단순해 보이는 『시와함께』(2020년 가을)의 시조가 마음에 스민다.


정성 다해 가꾸어도 알 수 없는 긴 여행을, 맹세한 두 남녀는 하나되어 떠났다


그 사이 비, 바람 불고 한 사람은 길을 잃었다

-이우걸, 「인생」 전문


젊은 날, 긴 여행을 함께 떠나기로 맹세한 두 남녀가 있었나 보다. 해로偕老. 두 사람은 한평생 같이 살며 함께 늙기를 바랐던 것일까. 그 사이, 그 맹세 위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으니 그것은 시련이었을까. 하나되어 떠났으되 한 사람은 길을 잃었다니 남은 한 사람이 있다는 것. 한 사람 먼저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할 길을 떠난 것일까. 남은 한 사람에게 길을 함께 잃지 않은 일은 운運인가 불운인가. 정성 다해 가꾸어도 알 수 없는 결말,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 그렇지 않은가.
인용한 ②처럼 방장 이승훈식으로 말하자면, 시인은 연륜이 넘겨준 체험과 상상을 묘사하고 서술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방식으로 시를 해설한다. 모든 해설은 해석이고 해석은 시각視覺이고 시각은 입장이다. 그러니까 이런 해석은 나의 시각이고 나의 입장이기 때문에 다른 입장에선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입장을 안목眼目이라고 바꿔 본다. 물론 이것은 나의 해석이요 나의 시각이고 안목이지만 예컨대,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는 것은 풍요와 생명력을 상징한다고 보는 일이다. 바람이 불어야 우주의 숨결이 일렁이고 비가 와야 대지 위의 만물은 축복처럼 소생 성장한다. 그러니 때때로 우리에게 우순풍조雨順風調, 행복한 나날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그런 가운데 삶의 기복, 운과 불운이 교차하기도 한다. 좋은 일이거나 나쁜 일이거나 끝날 것 같지 않던 일도 결국 끝나고 만다. 새로운 시작을 숨겨둔 이 ‘끝’이라는 것은 하늘의 섭리. 섭리처럼 “맹세한 두 남녀는 하나되어 떠났다” 해도 한 사람 먼저 길을 잃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 이법理法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했던가. 누군가 ‘약속은/허물기 위해 짓는 집’이라 했다. 정성 다해 가꾸어도 알 수 없는 두 남녀의 긴 여행을 마흔일곱 글자로 함축含蓄. 시력 오십 년 대방가大方家는 허무를 말하지 않고 말하였으니, 어떻게 이 허무를 극복할 것인가. 모든 끝은 시작이다.


집 없는 산비둘기
빙빙 도는 사거리


어쩌다 여기 왔니
무슨 죄를 지었니


깃발 든 포클레인이
산을 밀어 버렸어


갑자기
기별 없이
퇴출당한 백수라니


나를 돌아보다
문득 깨친 화두 하나


영원한 내 것은 없다
잠시 잠깐 누릴 뿐

-윤정란, 「글쎄요」 전문


「글쎄요」라니. 어떻게 이런 제목이 왔을까. 무슨 명분으로 포클레인은 깃발을 들었을까. 산을 밀어 버리다니. 산은 초목금수草木禽獸, 온갖 생물의 집 아닌가. 인간은 어떻게 해서 비인간의 생사여탈권을 쥐게 되었단 말인가. 집을 앗긴 산비둘기가 사람의 마을로 내려와 빙빙 떠돌고 있다. 사거리. 이것 참 마땅한 일인가. 글쎄요. 그러니 이 황망한 일 앞에 “갑자기”와 “기별 없이”를 반복하며 강조하는 것 아닌가. 허둥지둥 산비둘기는 없는 집을 찾아 없는 먹이를 찾아 인간의 길 위에서 빙빙 돌고 있다. 뿐인가. 산비둘기처럼 갑자기, 기별 없이 해고통지를 받은 비정규직이거나 일용직 노동자이거나 퇴출당하여 백수가 되는 현실은 사람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산비둘기에서 백수에서 나를 돌아보기로 시점 이동하여 문득 깨달은 바 있으니,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잠시 잠깐 누리다간 물거품처럼 이슬처럼 사라질 뿐이라는 것. 누구도 배반할 수 없는 이치. 그렇다. 산비둘기뿐이겠나. 퇴출당한 백수뿐이겠나. 그러니 너나 나나 이 화려한 지위를 천년만년 지키리라는 몽상 집착執著을 벗어나야지. 그러나 이 또한 잠시 잠깐 스치는 생각일 뿐. 그렇다. 망각은 신이 준 선물이라지만 그러니 글쎄요, 라는 말이 아니 나올 수 없다.
군더더기 없이 단순해 보이는 이 시가 인간중심주의와 난개발을 환기시킨다. 무엇보다 「글쎄요」라는 제목이 시 전체를 부양浮揚, 반짝 들어 올리듯 경쾌하면서도 “잠시 잠깐 누릴 뿐”이라는, 말후일구末後一句에 생의 무상성을 가벼이 토스할 힘이 숨은 듯하지 않은가. 무슨 말이냐. 무상하나 그 무상을 잊고 살아야 살아진다는 것. 이 순간이 생애 최고의 순간인 양 몰입 열정을 바치며 산다는 것. 그게 호흡지간呼吸之間을 사는 어리석은 우리 인생이니까. 그렇다면 이 말후일구는 세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일까.


햇귀 나는 하늘가에 안동포 차려입고


닿을 듯 닿을 듯 기도하는 두 사람


손 놓고


손잡고 함께 가을물이 흐른다

-조민희, 「느티나무」 전문


우리는 눈에 보이고 또 보이지는 않으나 뭉클한 그 무엇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때 시를 쓴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인간의 한 생을 한 해라 할 때 나는 11월 어느 어름에 서성이는 걸까. 가을날 동트는 하늘을 배경으로 두 그루 느티나무가 단풍 들어 하나 둘 낙엽으로 다가선다. 하늘에 머리를 묻은 아름드리나무는 무슨 기도를 드릴까. 버릴 것 다 버리고 마음도 비운다. 한 소절 다만 당신에게 가 닿는 맑은 물소리이기를”이라 적었다. 하늘에 머리를 묻는다는 순명의 자세로 아름드리나무가 기도를 올리듯 시인은 무슨 기도를 드릴까. 버릴 것 다 버리고 마음도 비운다는 시인이 바라는 것은 “한 소절 다만 당신에게 가 닿는 맑은 물소리”이다. 물소리는 삶을 견디며 배인 탐진치貪瞋痴, 모든 어리석음과 탐욕을 정화하는 신성한 목소리는 아닐까. 정화淨化.
당산나무일까. 나지막이 시를 읽다 보면, 안동포 그 은은한 금빛으로 가을물 곱게 든 아름드리느티나무 두 그루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 곳을 바라보는 노부부의 형상으로 다가온다. 말없이 다정하거나 무뚝뚝하거나. 동트는 하늘을 광배光背로 두른 「느티나무」의 시경詩境이 보여주는 이 구체적 형상에서 신성神聖과 인생의 도道를 보는 것은 무리일까. 노시인의 안목이 붙든 이 아름드리느티나무가 비추는 경지는 무엇일까. 가까이 서 있으니 닿을 듯도 하건만 “닿을 듯 닿을 듯” 하다는 것은 서로 닿지 않아 부대끼지 않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 잘 지내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 두기’가 나무에게도 사람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때로는 손 놓고 때로는 손잡고 함께 가야 하는 것이 인생의 도라는 노거수의 예지叡智. 은은한 아침놀 빛 아름드리느티나무의 들리지 않는 말을 듣는다. 마흔두 글자, 이 단시조에서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생생한 풍경을 통해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밀을 깨닫게’ 한다는 장파張法의 말을 상기한다.


시는 특별히 언어경제를 실천해야 하는 장르다. 풀이와 놀이의 기능을 담당하는 사설시조 양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승훈식으로 말하자면, ‘무슨 말을 해도 된다는 것은 결국 아무 말도 못 한다는 뜻’이다. 내 방식으로 말하자면, 시는 말하지 않고 말하기라 했으니 절제와 함축이 미덕이라는 것이다. 절제와 함축 사이 독자가 소요逍遙할 수 있는 여백이 있다. 나는 앞서, 시집은 쌓이는데 읽기는 따라잡을 수가 없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시집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이승훈식으로 말하자면, 시는 삶의 인습과 상투형을 극복하려는 정신의 소산이다. 시인은 상투적 일상적 사고를 파괴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자이다. 시인은 참담한 고뇌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위하여 언어를 실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라는 장르의 고만고만한 옷을 입고 행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내 방식으로 말하자면, 전혀 새로운 나만의 발화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쓰기를 끝냈다. 모든 끝은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