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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과 리라>에 기대서 읽어본 짧은 시들/박남희

시치 2021. 9. 4. 22:55

<활과 리라>에 기대서 읽어본 짧은 시들/박남희

 

 

 

1.옥타비오 파스가 바라본 시의 본질

 

   나는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생길 때 종종 옥타비오 파스의 시론서 『활과 리라』를 펼쳐보게 된다. 이 책의 첫 장에는 ‘시와 시편’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 시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집산되어 있다. 그런데 그의 정의는 한마디로 요약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수식어로 나열되어 있다. 그 앞부분을 일부 인용하자면 이렇다.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이다. 시의 기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시적 행위는 본래 혁명적인 것이지만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해방의 방법이기도 하다. 시는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시는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자 저주받은 양식이다. 시는 격리시키면서 결합시킨다. 시는 여행에의 초대이자 귀향이다. 시는 들숨과 날숨이며 근육 운동이다. 시는 공空을 향한 기원이며 무無의 대화이다. 시의 양식은 권태와 고뇌와 절망이다. 시는 기도이며 탄원歎願이고 현현顯現이며 현존現存이다. 시는 악마를 쫒는 주문이고 맹세이며 마법이다. 시는 무의식의 승화이자 보상이고 응집이다. 시는 계급과 국가, 인종의 역사적 표현이면서 역사를 부정한다. 시 속에서 모든 객관적 갈등들이 해소되고 인간은 마침내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것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을 얻게 된다. 시는 경험이며 느낌이고 감정이며 직관이고 방향성이 없는 사유이다. 시는 우연의 소산이자 계산된 결과물이다. 시는 세련된 형식을 사용하여 말하는 기술이자 원시적 언어이다. 시는 규칙에 복종하며 동시에 다른 규칙들을 창조한다. 시는 선대를 흉내 내는 것이며 실제의 모방이고 이데아의 모방에 대한 모방이다. 시는 광기며 황홀경이고 로고스이다.

 

   남미의 위대한 시인이고 시론가이고 수필가이고 외교관이기도 한 옥타비오 파스는 시를 정의한 이 글을 통해서 우리에게 살아서 꿈틀거리는 영감을 선사해 준다. 시를 이야기 하는 그의 화법은 대비적이고 반어적이면서도 그 속에는 직관적 사유가 숨어있다. 그가 서로 상반된 언어를 대비시켜서 시를 바라보는 것은 그가 지독한 마르크스주의 문학가이면서 한편으로는 프랑스 초현실주의의 세례를 받은 시인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시를 정의한 첫 구절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이다”는 진술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현재 탐색하고 있는 많은 시적 세계를 암시해준다. 우리는 삶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시로 쓰고, 시를 통해서 카타르시스나 구원의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삶에 새로운 힘을 얻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시는 포기해야 할 것들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짧은 시를 통해서 깊은 울림을 얻게 되는 것도 불필요한 언어를 포기할 줄 아는 포기의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시적 행위를 혁명적이면서도 내면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적인 내면에 숨어있는 인문학적 순수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에 의하면 시는 이 세계의 현실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양식이면서 동시에 시적 변용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우리가 창작하고 향유하는 시가 대중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면서 시를 모르는 자들에게 저주 받은 양식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시는 우리들을 모든 비시적인 것들과 격리시키고 시적인 것들과 결합시켜준다. 인생이 여행이자 귀향이듯이 시 역시 삶과 언어의 여행이자 귀향이다. 그런가하면 시는 호흡과 육체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옥타비오 파스가 시를 정의한 것들 중에서 “시는 공空을 향한 기원이고 무無의 대화이다”고 한 것은 다분히 불교적이며 동양적이다. 이는 그가 외교관으로 있으면서 인도와 일본에 체류했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시는 인간이 소원하는 것들을 향한 기도이면서 탄원도 되지만, 시 자체가 존재의 현현이고 현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간단히 풀어본 옥타비오 파스의 시론만으로도 우리가 쓰고 있는 시들 대부분을 충분히 포용해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옥타비오 파스의 시론을 통해서 짧은 시들을 읽어내는 일은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2. 짧은 시들 속에 들어있는 메타언어

 

   이번에 살펴본 짧은 시들 중에서 많은 시들이 메타시적 주제를 드러내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시인이나 시를 주제나 소재로 삼고 있는 메타시들은 시를 쓴 시인의 시관을 어느 정도 드러내 주는 경우도 있고, 시인의 시적 방법론이나 시를 대하는 자세 등을 시로 보여주는 등, 시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보여준다. 먼저 이병률 시인의 시를 읽어보자.

 

      생선 가시를 발라 움푹한 접시 주변에 기대 놓았다

        살이 벗겨진 가시는 ‘시’라는 글씨가 되어 서 있었다

              저 가시가 목으로 넘어가지 않고

        접시에 옮겨지다 흘리지 않고

        저렇게 시로 버티고 있는 것이 침착하고 대견하다

              하긴 나는 누군가에게 물렸던 것이고

        그 누군가는 시였고

             물렸는데 그것은 독이 든 이빨인 채로 박혀

       지금까지 빠지지 않는 것이고

 

              ―이병률,「시(詩)」 전문

 

   제목부터가 ‘시詩’로 되어 있는 이 시는 화자가 생선가시를 발라서 접시 주변에 기대 놓은 상황에서 시라는 글자를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화자는 시처럼 보이는 가시를 보면서 “저 가시가 목으로 넘어가지 않고/ 접시에 옮겨지다 흘리지 않고/ 저렇게 시로 버티고 있는 것이 침착하고 대견하다”고 느낀다. 시인으로 표상된 화자는 눈앞에 보이는 가시 시詩를 통해서 자신의 시를 본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물고기가 낚시 바늘에 물린 것처럼 시인인 자신도 시에 물려서 시인이 되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시라는 가시가 “독이 든 이빨인 채로 박혀/지금까지 빠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는 시인과 시가 만나서 자금까지 헤어지지 않고 운명적으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 상황에 대한 메타적 사유를 시로 쓴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자

        우물 안 개구리처럼 이끼를 즐기자

        아무 목숨이나 잡아먹지 말자

        우물 안 개구리처럼 차갑게 살자

        우물 안 개구리처럼 푸른 하늘만 보자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별을 노래하자

        하늘에 대고 둥근 나팔을 불자

        꼭 하나, 내 우물은 내가 파자

        별에게서 가장 먼 깊은 우물이 되자

        그리고 옆으로 곁으로 우물을 잇대자

        모든 별이 다 들어올 수 있게 한 우물만 파자

        우주 안 개구리가 되자

 

                 ―이정록,「나에게 쓰는 쪽지」 전문

 

   이정록의 시는 이미 시인으로 살고 있는 자신에게 주는 십계명 같은 시이다. 우리 속담에서 ‘우물 안의 개구리’는 세상을 좁은 눈으로 바라보며 편협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풍자적으로 일컷는 말인데, 시인은 이러한 경구를 과감하게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에 적용시킨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이기를 즐기고 아무 목숨이나 잡아먹지 말고 차갑게 살고 푸른 하늘만 보고 별을 노래하자는 시인의 다짐은 오래 전 윤동주가 노래한 「서시」,「별 헤는 밤」 등의 정서에 닿아있다. ‘우물’이나 ‘별’이라는 소재 역시 윤동주가 자신의 시에 즐겨 사용하였던 소재라는 점에서 이 시는 이정록 시인이 쓴 인생록 같은 ‘참회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분명 제가 뱉은 말이지만

        입술 한 번 뻥긋한 적 없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꽃망울이 열리듯

        겹겹 홀쳐맨 사향주머니가 흘리는 향기 같은 말

        상륙전까지는 무섭도록 조용하지만

        찬란한 끝장을 갈망하는 태풍의 눈 같은 것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제 귀에 조차 안 들리는 말이다

        소라껍질 속에 갇힌 파도소리처럼

        물기란 물기 다 증발해 버린 오래 묵은 속울음 같은 말

        제 몸 속을 뜨겁게 달리고 있지만

        스스로 발소리를 숨기는 피돌기 같은 것

 

                 ―이인원,「혼잣말」 전문

 

   이인원 시인은 자신의 시를 ‘혼잣말’로 정의하고 있다. 그가 느끼는 자신의 시는 “분명 제가 뱉은 말이지만/입술 한 번 뻥긋한 적 없”는 시이다. 언뜻 보면 모순이 되는 진술이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 꽃망울이 열리듯/ 겹겹 홀쳐맨 사향주머니가 흘리는 향기 같은 말”이라는 진술을 보면 이해가 간다. 특히 언어가 되어 시로 “상륙전까지는 무섭도록 조용하지만/ 찬란한 끝장을 갈망하는 태풍의 눈 같은 것”이라는 진술에는 시를 향한 시인의 매서운 열정이 들어있다. 2연의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제 귀에 조차 안 들리는 말이다”라는 말 속에는 시가 교훈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는 시인의 시관이 들어있다. “물기란 물기 다 증발해 버린 오래 묵은 속울음 같은 말”이 시라는 진술은 시인으로서의 견인주의적인 결기와 성숙이 느껴진다. 세상에는 목소리가 큰 시들도 많은데, 이인원 시인의 시는 뜨거운 열정이 담긴 언어의 발소리를 안으로 숨기는 ‘혼잣말’ 같은 시이면서도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시다.

 

      비 내리고 꽃 진다

        빈 우체통처럼 당신이 그립다

        물안개처럼 사라진 단어들

        바다는 늘 멀리 있으니

        불온한 꽃이여

        금단의 총성을 울려다오

        쓰러진 말[言]들

        물의 사막을 건너는 낙타, 목마르다

 

                ―오민석,「물의 사막을 건너는 낙타」 전문

 

 

   이 시는 ‘물의 사막’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듯이 아이러니와 역설이 바탕이 되어 있는 시이다. 시의 전체적인 정황으로 보면 이 시는 알레고리 시로 읽힌다. 왜냐하면 ‘물의 사막을 건너는 낙타가 시인이라면 그 사막에서 피어나는 ’불온한 꽃’은 시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빈 우체통처럼 그리워하는 당신은 꽃이고 시이다. 1행에서 비가 내리고 꽃이 진다는 것은 일반적인 자연 현상이지만, 생명의 원천인 비가 내리는데 가장 아름다운 생명인 꽃이 지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이것은 현재 시가 처해있는 우리 시단의 상황과 유사하다. 세상에 물질은 점점 풍요로워지는데 시는 점점 가난해지고 외면 받고 있는 현실은 아프다. 시인이 물을 사막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목마른 물의 사막에서 꽃처럼 자라던 말들은 결국 “쓰러진 말[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시인들의 시관을 옥타비오 파스의 시관에 견주어보면 서로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옥타비오 파스의 말처럼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해방의 방법”이 시라면 자신의 시의 내면을 바라보는 시인의 메타시적 태도 역시 별로 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3. 짧은 시 속에 들어있는 사랑의 풍경들

 

   인간의 삶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중요한 시적 소재로 빈번히 등장하는 것이 ‘사랑’이다. 시인들이 쓴 사랑 시를 읽어보면 은밀한 성적 교감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경우도 있고, 김소월처럼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시도 있고,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열정이나 체험을 시로 쓴 경우도 있고, 자연의 섭리 속에서 사랑의 원리를 찾고 있는 시들도 있다. 이번에 평자가 읽은 짧은 사랑 시들도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입은 흔드는 것인데

 

        그 저녁엔 입을 너무 많이 써서 가슴이 다 닳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때

 

        그 말은 흔들어야 했는데

 

        보내고

 

        흔들리는 방

 

        이 물속에선 지느러미를 쓴다

 

                 ―신영배, 「입과 지느러미」 전문

 

   이 시는 ‘입’과 ‘지느러미’를 흔들리는 이미지로 동일하게 유추해내는 상상력이 독특하다. 우리가 생각할 때 보통 ‘입’은 음식물을 섭취하거나 말을 할 때 사용하는 기관인데, 시인은 난데없이 “입은 흔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엉뚱한 발화는 2연의 “그 저녁엔 입을 너무 많이 써서 가슴이 다 닳았다”는, 마치 사랑의 행위를 연상시켜주는 표현을 통해서 어느 정도 정당화된다. 이 말을 좀 더 정당화 시켜주는 표현은 “그 말을 흔들어야 했”다는 표현이다. 이 표현을 빌리면 시인이 “입은 흔드는 것”이라고 한 것이 말을 흔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말로써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지 못하면 결국 사랑하는 사람은 떠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고 나면 텅 빈 가슴 같은 빈 방만 흔들리게 된다. 물속에서 물고기에게 지느러미가 언어이듯 사랑하는 대상에게 물고기가 된 존재는 언어의 지느러미를 잘 사용해야 한다. 지느러미를 잘 흔들어야 잘 헤엄칠 수 있다.

 

       한 겨울 아파트 후미진 구석에

        멈춰 서 있는 길고양이

 

        작년 겨울 얼어 죽은 새끼들을 두고 사라진

        한동안 동네에서 보이지 않던 그 녀석일까

 

        사랑했고 사랑해서 떠났고

        또 다시 사랑해서 배가 불러 있다는 유행가 가사 같은

        전쟁을 했고 휴전하다 다시 전쟁 중이라는

        텔레비전 뉴스 참사 소식 같은

 

        겨울저녁 같은 너의 근황

 

                 ―이경임, 「겨울저녁」 전문

 

   겨울저녁은 어딘가 쓸쓸한 한기가 느껴진다. 시인은 한 겨울에 아파트 후미진 구석에 우두커니 서있는 길고양이를 보면서 “작년 겨울 얼어 죽은 새끼들을 두고 사라진/ 한동안 동네에서 보이지 않던” 길고양이를 소환해 낸다. 겨울에 새끼들이 얼어 죽은 것은 어미 고양이가 새끼들을 제대로 양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러한 정황을 “사랑했고 사랑해서 떠났고/ 또 다시 사랑해서 배가 불러 있다는 유행가 가사”에 잇대어 추측하고 있다. 길고양이들의 생리를 감안하면 대부분의 길고양이들이 본능적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이 끝나면 당연한 듯 헤어지는 것이 다반사이지만, 사람의 사랑이든 고양이의 사랑이든 뱃속의 아기조차 책임질 수 없는 사랑은 시인에게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시인은 이러한 사랑과 이별을 전쟁과 휴전을 반복하는 인류의 비극적인 역사에까지 확장해서 인식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시인의 안타까움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역사는 ‘겨울저녁’ 같은 어둡고 차가운 비운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신어보지 못한 길이 나란히 놓여 있다

 

        배고픈 혓바닥 같은 회색빛 쪼리가 먼지를 탁탁 부쳐대며 다 닳은 길 핥고 간다, 진열된 몇 켤레의 샌들이 나를 본다, 병든 것이 마음인지 너덜대는 육신인지 내 살아온 문수까지 재어보는 표정이다

 

        공복空腹인 혀의 길이 멀다

        허겁지겁, 이란 의태어, 또 갈아 신는다.

 

                  ―염창권, 「가판대」 전문

 

   인간은 누구나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염창권의 시에서 ‘신어보지 못한 길’은 신발이지만, 이 시에 나타나 있는 “배고픈 혓바닥 같은 회색빛 쪼리”는 2연의 “공복空腹인 혀의 길”이라는 표현과 연결되어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읽힌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신어보지 못한 길”이나 “진열된 몇 켤레의 샌들”이 사귀어보지 못한 여성으로, ““배고픈 혓바닥 같은 회색빛 쪼리”는 여성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남성으로 읽히는 알레고리 시이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은 쉽게 실현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공복空腹인 혀의 길”이 멀다는 것을 느낀 주체는 ‘허겁지겁’이라는 의태어만 자신의 생활습관에 훈장처럼 달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사랑 시들을 읽어보면 “시는 들숨과 날숨이며 근육 운동이다.” “시의 양식은 권태와 고뇌와 절망이다”는 옥타비오 파스의 정의가 이들의 사랑 시에도 쉽게 적용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시의 호흡과 근육운동으로서의 기질은 사랑 시에서 매우 어울리는 요소이고, 권태와 고뇌와 절망의 기질을 보여주는 시라는 양식이 사랑 시에 적합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4. 짧은 시 속에 드러나 있는 종교적 상상력

 

   종교 시 중에서도 불교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시들은 타 종교에 비해서 깨달음이나 수행의 특성이 강조되어 있어서, 시가 추구하는 철학적 깊이와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 때문인지 시인들의 시를 살펴보다보면 불교적 상상력이 들어있는 시들이 흔하게 발견된다. 이번에 평자가 만나게 된 텍스트들 중 이덕규 시인의 시는 겉으로 보기에는 불교적 색채가 별로 없는 시로 읽히면서도 그 깊이에 묵직한 불교적 상상력이 내장되어 있어서 이채로웠다.

 

      뒤란이 소란스러워 돌아가 보니 머리에 오색 관을 쓴 새 한 마리가 젖은 깃을 털고 있었다

        맑은 정오였는데 항아리에 이슬 내린 물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눈이 퀭한 짐승이 그 안에 비친 검은 그림자를 들여다보았다

        산 너머 사리 바다에서 물고기 우는 소리가 종일토록 넘어왔다

        먼 길을 돌아 일 년 만에 지상에 내려온 누님 발등이 소복이 부어있었다

 

                   ―이덕규, 「백중(百中)」 전문

 

   백중은 음력 7월15일로, 일 년 중에서도 바닷물의 수위가 가장 높은 사리 때를 가리킨다. 불교에서는 이날을 중요한 기념일로 생각하여 천도제를 드리는데, 이날이 불교에서 큰 명절로 자리잡은 것은 부처의 십대 제자 중 한사람인 목련존자가 자신의 어머니를 아귀지옥에서 구하기 위해 부처의 가르침대로 하안거가 끝나는 백중 자자일(자신의 부족함을 참회하는 날)에 여러 스님에게 공양을 했다는 ‘우란분경(盂蘭盆經)’의 이야기와 연관이 있다.

 

   이덕규의 시 「백중(百中)」 은 총 5연으로 되어 있는데, 각 연의 중심 이미지는 다르지만 그 상이한 이미지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병치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1연에서 화자가 뒤란에서 발견한 ‘오색 관을 쓴 새’는 아마도 목련존자의 어머니처럼 지옥에서 극락왕생을 한 존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먼 길을 돌아 일 년 만에 지상에 내려온” 발등이 부은 누님은 부모님을 위해 공양한 목련존자 같은 누님이 아닐까 생각된다. 2연의 정오에 항아리에 이슬 물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이나 4연의 사리 바다 역시 백중사리와 연관이 있다. 특히 4연의 “산 너머 사리 바다에서 물고기 우는 소리”는, 3연의 발등이 붓도록 ‘검은 그림자’로 상정되는 부모님을 위해 기도를 했던 누님을 상징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숲가의 저 나무들

        고요를 격동시키는 잎잎의 수런거림들

        하나의 흔들림 속에

        천수(千手)가 넘나든다

 

        나무는

        유심함을 다 알아버린 무심결이다

 

                  ―유종인, 「나무」 전문

 

   예로부터 나무는 인간을 닮아서 많은 시인들이 의인법을 써서 나무를 인간처럼 형상화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나무는 가지가 무수히 많아서 인간관계나 인연을 상징하는 시적 상관물로 가용되기도 한다. 유종인의 시 「나무」는 가지가 많은 나무의 특성을 천수관음보살의 이미지와 연결시켜서 ‘유심’에서 ‘무심’에 이르는 불교적 마음상태를 형상화하고 있다. 천수관음은 관음보살의 변화상(變化像)으로 천 개의 손을 움직여서 일체중생을 구한다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마음의 평정상태(등지等持)를 무심(無尋)과 유심(有尋)으로 구분하여 유심등지(有尋)와 무심등지(無尋等持)를 이야기 한다. 여기서 유심등지는 말과 대상과 지식을 분별하여 아는 지혜를 가리키고, 무심등지는 기억이 정화되었을 때 마치 의식자체가 없어진 것 같이 되어 무심상태에서 대상만이 홀로 빛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인이 나무를 “유심함을 다 알아버린 무심결”로 보는 것은 나무를 “잎잎의 수런거림”을 다스리는 천수관음보살 정도로 바라보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 시의 주제는 옥타비오 파스가 시를 “공空을 향한 기원이며 무無의 대화”로 본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일용직 새들이 강으로 가는 소리 들린다 강변에 세숫물 떠다놓았다 고라니는 백사장에 벌써 발자국을 몇 켤레나 벗어놓고 숲에 들었다

 

                 ―안도현, 「경행(經行)」 전문

 

   경행(經行)은 불가에서 걸으면서 경전을 송독하는 의식으로, 요즘은 주로 사원 내에서 행해지는 불교의식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일용직 새’를 등장시켜서 강변에 세숫물을 떠다놓게 하고 수행자로 상징되는 고라니가 백사장에 벌써 발자국을 몇 켤레나 찍어놓고 경행을 한 후 숲에 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시는 단순히 강변풍경을 그려 보여주는 시가 아니라 요즘 불가의 행태를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는 알레고리 시이다. 그것은 고라니가 수행하는 강변 세숫대야의 물을 떠 놓은 주체가 경행을 하는 당사자인 고라니가 아니라 ‘일용직 새’라는 것에서 드러난다. 이 시는 짧은 시를 통해서 촌철살인의 깨달음을 독자에게 전해준다.

 

      이별은 순간이다

        그 순간을 이겨낸 자만이

        슬픔을 바닥에 깔고 앉을 수 있다

        나는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생을 버텨왔다 그러나

        멀리서 새벽 종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어머니가 마루에 앉아 뜨개질을 하신다

        엉덩이 밑에서 건져 올린 슬픔을

        한 올 한 올 뜨고 계신다

 

                 ―이재훈, 「마루」 전문

 

   불교가 수행과 깨달음의 종교라면 기독교는 믿음과 구원의 종교이다. 이재훈의 시 「마루」에서 기독교적 색채가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이재훈 시인의 목사님의 자제이고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시인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평자는 화자가 멀리서 들려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이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신의 뜻을 따르려는 ‘돌아온 탕자’의마음가짐처럼 보였다. 물론 화자가 무릎을 꿇는 것은 신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통한 변화 때문이라기보다는, “엉덩이 밑에서 건져 올린 슬픔을/ 한 올 한 올 뜨고 계”시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의 뜨개질 덕분일 것이다. 아마도 시인으로 상정되는 화자는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어머니와의 이별을 예감했을 것이다. 이 시의 종소리는 밀레의 만종처럼 숙연해지는 그 무엇을 화자에게 던져준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인도하시던 부모님의 헌신이 그 종소리 속에 녹아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재훈 시인에게 있어서 ‘마루’는 무릎을 꿇어야 할 당위적인 장소인 것이다.

 

5.표현과 발상이 신선한 짧은 시들

 

   짧은 시의 묘미는 역시 절묘한 표현과 발상의 신선함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으로 짧은 시를 쓰는 서정춘 시인의 시가 높게 평가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안도현 시인의 시 「너에게 묻는다」나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이나 정현종의 시 「섬」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도 단지 시가 짧아서가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신선한 상상력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선보이는 짧은 시들 중에도 그런 시들이 보인다.

 

      하루의 망치로 쾅쾅 나를 박아 넣으면 까맣게 바닥에 남을 한 점의 머리

 

        비행기가 지나가면 하늘이 길게 잘려서 어둠 한 끝이 돌돌 말려 올라간다

        지붕 위에 비스듬히 누워, 먼 별빛을 보던 밤이 갑자기 머리를 긁적이며,

        방금 뭐가 지나간 것 같은데……

 

        악몽이 잠의 창문을 열고 들여다보며 내 속의 아이들을 부른다. 밥 먹고 울어야지

 

        턱 밑에 장도리를 걸고 뽑아올리면

        나는 한참을 두리번거린다

 

        인생이 잠시 들러 아침을 주고 젊음을 사가는 매점처럼 사랑은 환하다

 

                   ―신용목, 「대부분의 나」 전문

 

   이 시의 주제는 사랑이다. 그런데 이시를 이곳으로 가져온 것은 이 시에 등장하는 표현들이 신선하고 발상이 새롭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책상머리에 엎드려 슬픔을 잠재우는 모습을 “하루의 망치로 쾅쾅 나를 박아 넣으면 까맣게 바닥에 남을 한 점의 머리”로 묘사하고 있다. 2연에서 비행기가 지나간 것은 사랑이 지나 간 것을 암시하는 것이고 “하늘이 길게 잘려서 어둠 한 끝이 돌돌 말려 올라”가는 것은 사랑이 마무리 지어지는 모습을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시인은 이별의 슬픔을 “지붕 위에 비스듬히 누워, 먼 별빛을 보던 밤이 갑자기 머리를 긁적이며,/ 방금 뭐가 지나간 것 같은데……”라고 대수롭지 않게 표현하고 있지만, “악몽이 잠의 창문을 열고 들여다보며 내 속의 아이들을 부른다. 밥 먹고 울어야지”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악몽까지 꿀 정도로 사랑의 슬픔이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턱 밑에 장도리를 걸고 뽑아올리”는 행위는 일어나지 않는 화자를 강제로 일으키는 행위이다. 이렇게 강제로 일으켜진 화자는 자신의 사랑을 돌이켜보며 “인생이 잠시 들러 아침을 주고 젊음을 사가는 매점처럼 사랑은 환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서 사랑이 환하다는 것은 그 이면에 반어적인 의미가 숨어있다. 어쩌면 사랑은 인생이라는 매점에서 젊음을 주고 사오는 일용품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시인의 전언이 느껴진다.

 

      구석자리에 앉아도

        중심인물中心人物이다

        지구는 둥그니까.

 

                 ―유안진, 「안목眼目이 크면」 전문

 

 

        이제 조금 배웠다

 

        밤에 혼자 있는 사과에 불 밝혀주는 방법

        겨우 잠든 사과를 깨우지 않고 불을 꺼주는 방법

 

                 ―이원, 「□」전문

 

   위에 인용한 두 시는 아주 짧은 시이지만 그 짧은 시 속에 탁월한 시인의 안목이 개입되어 있다. 우선 유안진 시인의 시 「안목眼目이 크면」은 제목에 잇대어 내용을 잃게 해주는 시이다. “안목이 크면//구석진 자리에 앉아도/중심인물中心人物”이라는 발상은우리의 관습적인 통념을 흔들어 깨워준다. 특히 “지구는 둥그니까”라는 시인의 생각에는 세상에는 구석이 없다는 사유가 내포되어 있다.

 

   이원의 시 「□」는 □가 무엇인지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진다. □를 한자어로 보면 이것은 입구자가 된다. 그렇다면 이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밤에 혼자 있는 사과’를 여성으로 본다면, 입으로 어떻게 해주는 것이 불을 밝히는 것이고 불을 꺼주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좀 야한 상상력을 끌고 오면 해석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러한 해석은 그리 개운한 해석은 아니다. 그래서 평자는 이 시의 □를 방으로 보려고 한다. ‘밤에 혼자 있는 사과’로 상징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의 불을 밝혀주려면 사랑할 수 있는 방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겨우 잠든 사과를 깨우지 않고 불을 꺼주는 방법”도 방이 존재해야 가능하다. 여기서 방은 단지 사랑할 물리적 공간만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방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넉넉히 수용할만한 마음의 방이다. 이런 해석은 물론 평자의 자의적인 것이지만, 이런 재미있는 시를 쓴 이원 시인의 시를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어내는 한 가지 방법은 될 것이다.

 

   촌철살인의 짧은 시들을 읽으면서 마지막으로 음미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옥타비오 파스의 말이다. “시 속에서 모든 객관적 갈등들이 해소되고 인간은 마침내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것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을 얻게 된다. 시는 경험이며 느낌이고 감정이며 직관이고 방향성이 없는 사유이다.” 평자의 방향성 없는 글을 끝까지 읽어준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이 글을 마친다.

 

 

           *계간 <시인시대> 2021년 여름호(<다시 읽는 짧은 시 깊은 울림>에 대한 평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