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관련글

제페토의 숲/김희준

시치 2021. 1. 1. 14:02

제페토의 숲/김희준(1994. 9. 10 ~ 2020. 7. 24)

 

 

거짓일까 바다가 격자무늬라는 말,

 

고래의 내장에서 발견된 언어가 촘촘했다 아침을 발명한 목수는 창세기가 되었다 나무의 살을 살라 말을 배웠다

 

톱질 된 태양이 오전으로 걸어왔다

 

가지 마, 나무가 되기 알맞은 날이다 움이 돋아나는 팔꿈치를 가진 인종은 초록을 가꾸는 일에 오늘을 허비했다 숲에는 짐승 한 마리 살지 않았다 산새가 궤도를 그리며 날았다

 

지상의 버뮤다는 어디일까

숲에서 나무의 언어를 체득한다

 

목수는 톱질에 능했다 떡갈나무가 소리 지를 때 다른 계절이 숲으로 숨어들었다 떡갈나무 입장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목수는 살목범(殺木犯)이었으므로

 

진짜일까 피노키오, 피노키오 떡갈나무 피노키오 개구쟁이 피노키오 피노키오, 피노키오 귀뚜라미 떡갈나무 요정은 피노키오를 도와주지요 삐걱삐걱삑삑삐걱삐걱삑삑삐걱삐걱삑삑 삐걱삐걱삑삑 개구쟁이 피노키오 나무인형 피노키오 피노키오 피노키오

 

숲으로 가게 해주세요

 

나무는 물기가 없었다 바람은 간지러운 휘파람이 되었다 빽빽하게 그린 나무의 결이 달랐다 동급생 사이에 전염된 그림, 면역체계를 찾으려면 격자무늬를 수혈 받아야 한다

 

소리를 가져간 피노키오 숨이 언어인 피노키오 참말 하는 피노키오 떡갈나무 피노키오 삐걱삐걱 피노키오 진짜일까 피노키오 나무인형 피노키오

 

모든 책이 은밀해졌을 때 나는 쫓겨났다

저 너머를 건너는 거짓말이 길어졌다

 

피노키오가 인간을 키운다 다각형 몸이 심해에 잠긴다 고래가 뒤척일 때 인간은 나무가 되었다 나무는 나를 읽어낸다

 

해체된 태양이 떠오르는 남쪽에서부터 창세기가 시작되고

나는 제자리걸음을 한다

 

사라진 숲의 버뮤다에 새들이 궤도를 바꿔 날았다​

 

 

 

― <시산맥> 2019년 여름호 / 2021 제14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賞 수상詩 /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문학동네, 2020)

 

​* 김희준(1994. 9. 10 ~ 2020. 7. 24) : 1994년 경남 통영 출생. 국립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재학 중(현대문학전공)이었음. 2017년 <시인동네>를 통해 등단. 2020년 아르코청년예술가 창작준비지원금 수혜. 유고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문학동네, 2020)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2020년 27세의 나이로 요절함.

 

 

<선정 이유>

 

숲의 언어를 떠나 새로운 문장으로 비상하는 시인의 존재론

 

이번 제14회 웹진 『시인광장』 ‘올해의 좋은 시’ 후보로는 1차로 100선에 선정된 시인들에게 이메일로 추천을 의뢰하여 최종 선정된 모두 10편의 본선 작품들이 올라와 있었다. 미학적 품격과 예각성을 두루 갖춘 훌륭한 작품들 앞에서 그들 간의 우열을 논하거나 경중을 따지는 일은 부질없어 보였다. 그만큼 시단의 쟁쟁한 중견과 신인들이 보여준 생동하는 음역(音域)은 각자의 경험적 구체와 미학적 위상을 폭 넓게 거느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러 번 읽어가면서 심사위원으로서는 ‘올해의 좋은 시’의 ‘올해’라는 의미심장한 일회적 시간성과 ‘좋은 시’라는 보편적인 가치론적 범주의 통합을 깊이 염두에 두었다. 그 결과 김희준의 「제페토의 숲」을 새삼 주목하였고 오랜 생각 끝에 이 작품을 ‘올해의 좋은 시’ 수상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누구나 금세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제페토의 숲」은 ‘피노키오’를 주인공으로 하는 유명한 서양 동화의 모티프를 빌려와 그것을 선명하게 인유(引喩)하고 있는 작품이다. ‘제페토’는 피노키오라는 나무인형을 만든 노인의 이름이다. 1883년 이탈리아 동화작가 카를로 콜로디가 쓴 『피노키오의 모험』이 그 원적(原籍)이다. 두루 알려져 있듯이, 목수 할아버지 제페토는 나무를 깎아 피노키오라는 인형을 만들었는데 요정이 마법을 부려 피노키오는 마치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뜻하지 않게 길어진다는 설정이 지금도 우리의 기억에 아련하다. 「제페토의 숲」에서 자형(字形)을 누인 글자들은 한결같이 ‘피노키오’의 이러한 원형 서사를 온축하면서 개구쟁이 나무인형 피노키오와 그를 도와주는 귀뚜라미 요정을 반복적으로 등장시킨다. 귀뚜라미 요정은 피노키오가 여러 시공간에서 난경(難境)을 겪을 때마다 나타나서 피노키오를 구해준다.

 

구약성경의 요나처럼 제페토 할아버지가 고래 뱃속에 삼켜졌다는 내용도 우리의 기억에 흐릿하게 떠오른다. “바다가 격자무늬라는 말”이나 “고래의 내장에서 발견된 언어”는 목수 할아버지가 어린 나무인형을 발명한 순간을 포괄적으로 암시한다. 이때 ‘말/언어’는 역시 구약성경 ‘창세기’의 설계처럼 생명을 창조하는 사역에 말씀이 개입한 사건을 퍽 선명하게 은유하고 있다. 톱질을 통해 “나무의 살을 살라 말을” 배운 제페토 할아버지는 짐승 한 마리 살지 않는 숲에서 “나무의 언어”를 온몸으로 체득한 다음 떡갈나무를 살목하였다. 이때 ‘떡갈나무’는 원작 동화에서 피노키오가 매달려 죽은 나무이기도 하고, 다른 버전에서는 피노키오를 만든 원목(原木)으로 지칭되는 나무이기도 하다. 어쨌든 피노키오는 제페토의 기쁨이었고 할아버지는 피노키오를 찾다가 고래에 삼켜졌지만 피노키오가 제페토를 구출하면서 나무인형으로 돌아가자 요정이 나타나 피노키오를 인간 소년으로 만들어준다. 이러한 원형 서사는 「제페토의 숲」 배면으로 숨어들어 “소리를 가져간 피노키오 숨이 언어인 피노키오”로 나타나고 있다.

 

작품의 맨 앞에 ‘거짓일까’를 배치하고 중간 중간에 ‘진짜일까’를 반복적으로 배치하면서 시인은 ‘참말/거짓말’을 대응시키는 발화 방식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끔 해준다. 결국 ‘말’과 ‘언어’의 집성(集成)인 ‘책’을 통해 나무에게 읽혀진 ‘나’는 제페토이자 ‘시인 김희준’의 표상이었을 것이다. 참말과 거짓말의 경계를 지우면서 수행하는 존재론적 역전의 순간을 호명하면서 김희준은 다시 창세기를 끌어와 “사라진 숲의 버뮤다”에서 새들이 궤도를 바꿔 날아가는 순간을 그려낸다. “나무가 되기 알맞은 날”이 그때 새롭게 밝아오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버뮤다는 ‘시인 김희준’이 새롭게 떠나 비상해갈 활주로이자 궁극적으로 숲의 언어를 떠나 새로운 문장으로 몸을 바꾸어가야 할 ‘시인’으로서의 귀착지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처럼 「제페토의 숲」은 김희준의 열망과 절망, 떠남과 귀착, 창조와 소멸의 중층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시인’으로서의 불가피한 존재론을 그려낸 작품이다. 숲의 언어를 떠나 새로운 문장으로 비상하는 시인의 존재론이 그 안에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이 점, 항구적으로 그녀를 ‘시인’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아시는 분은 아시지만 김희준 시인은 올해 불의의 사고로 고인이 되었다. “저 너머를 건너는 거짓말”처럼 우리에게 남겨진 그녀의 유고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2020)은 올해 2020년을 각별한 기억으로 착색한 채 우리 곁에 놓여 있다. 젊고 솔직하고 당당하고 발랄하면서도 슬픔의 문양을 엮어 우리에게 존재론적 결기와 허기를 동시에 불어 넣어주었던 시인 김희준. 그녀에게 마지막 해였을 ‘올해’의 좋은 시로 이 작품이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란다. 김희준(1994~2020)의 시가 우리의 기억에 남게끔 배려해주신 『시인광장』의 ‘올해의좋은시상’ 관계자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유성호 문학평론가ㆍ한양대 교수ㆍ올해의좋은시상 심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