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관련글

황인찬의 「법원」평설 / 송승환, 김행숙

시치 2020. 12. 31. 20:35

황인찬의 「법원」평설 / 송승환, 김행숙

 

 

법원/황인찬

 

 

아침마다 쥐가 죽던 시절이었다 할머니는 밤새 놓은 쥐덫을 양동이에 빠뜨렸다

그것이 죽을 때까지, 할머니는 흔들리는 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죄를 지으면 저곳으로 가야 한다고, 언덕 위의 법원을 가리키며 할머니가 말할 때마다

그게 대체 뭐냐고 묻고 싶었는데

 

이제 할머니는 안 계시고, 어느새 죽은 것이 물 밖으로 꺼내지곤 하였다

저 차갑고 축축한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할머니는 대체 저걸 어떻게 하셨나

 

망연해져서 그 차갑고 축축한 것을 자꾸 만지작거렸다

 

대문 밖에 나와서 앉아 있는데 하얀색 경찰차가 유령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시집 『구관조 씻기기』 2012년

.........................................................................................................................................................................................................................................................

 

황인찬의 시 「법원」은 사태에 대한 명명이 언어의 내부가 아니라 언어의 바깥에서 발화된 것임을 예증한다. 할머니는 덫에 걸려 바동거리는 쥐를 양동이에 빠뜨리고 쥐가 죽을 때까지 바라본다. 쥐가 살기 위해 몸을 뒤틀 때마다 양동이의 물은 흔들린다. “흔들리는 물”은 쥐라는 생명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태의 현장이자 삶이 곧 죽음으로 전환되고 있는 장소이다. 할머니는 “흔들리는 물”을 가리키며 “죄를 지으면 저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할머니가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쥐가 인간의 곡식을 탐한 까닭에 짓는 죄를 가리킬 수도 있고 할머니가 살아 있는 쥐를 죽이는 까닭에 짓는 죄일 수도 있다. 죄의 의미 파악을 잠시 미루고 “흔들리는 물”을 명명하는 시인의 언어에 주목하자. 시인이 “흔들리는 물”의 사태를 돌연, 그러면서도 담담하게 “언덕 위의 법원”이라고 명명하자마자 사태의 국면은 돌변한다.

 

쥐가 죽으면서 “흔들리는 물”의 사태를 새롭게 명명한 “언덕 위의 법원”은 시의 흐름에서 매우 낯선 ‘바깥의 언어’다. 그것은 시인의 언어기도 하지만 시인이 목격한 할머니의 언행을 되살아냄으로써 시인이 받아쓴 할머니의 언어, 타자의 언어다. 그리하여 “언덕 위의 법원”은 일상적이고 표면적인 사태, “흔들리는 물”을 재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일상 언어의 내부에 틈입하여 일상 너머의 볼 수 없었던 세계를 드러내 보인다. 저 사태의 내부에 침잠하고 있는 삶과 죽음과 죄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언어의 내부에 갇힌 일상 세계의 깊이 없는 삶과 그것을 통찰하지 못하고 사는 삶의 한계를 노출한다. 삶은 보이는 것과 일상 언어의 표면적 의미로만 구성되지 않음을 각성시킨다.

 

“흔들리는 물”이 “언덕 위의 법원”으로 명명되자마자 일상과 현실 세계의 장막이 사라지고 삶 이후의 세계가 도래한다. 삶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법원”이 출현한다. 이때 삶과 죽음의 경계는 사라지고 죽음은 삶의 연속선상에 놓인다. “법원”은 현실 세계의 범법을 판단하는 장소가 아니라 삶의 세계에서 저지른 죄를 심판하는 죽음의 장소가 된다. “법원”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죄를 판단한다는 점에서 주체의 죄를 심판하는 타자의 윤리를 전제한다. 그 타자의 윤리가 발생하는 “법원”은 할머니의 전언에 의하면 “흔들리는 물”에 있다. 타자의 윤리는 삶이 죽음으로 전환되는 장소에 현존하고 주체의 삶에 보이지 않게 관여한다. 타자의 윤리는 죽음의 세계에서 주체가 살고 있는 삶의 세계로 출현하여 주체의 죄를 판단하는 심급으로 작동한다. 타자의 윤리는 주체로 하여금 삶의 윤리에 대해 성찰하도록 한다. 시인이 “망연해져서 그 차갑고 축축한 것을 자꾸 만지작거”리게 한다. 그런 점에서 할머니가 말한 “죄”는 현실 세계의 성문법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세계에서 망자(亡子)의 죄를 선고하는 일종의 율법에 속한다.

 

죽은 쥐. “언덕 위의 법원”에 상정되고 죄의 유무가 심판된 존재이다. “저 차갑고 축축한 것”은 분명히 살아 있던 존재의 죽음 자체이며 시인에게 도래할 미래의 삶이다. 쥐는 돌아가신 할머니도 상기시킨다. 쥐와 할머니는 모두 시인의 삶과 연계되어 있다. 삶에는 죽음과 죄의 심판이 내재되어 있으며 보이지 않는 세계와도 연계되어 있다. 쥐의 사체는 보이지 않는 죽음의 세계와 법원의 현존을 드러낸다. 시인은 운구차를 연상시키는 “하얀색 경찰차”를 바라보며 삶과 죽음과 죄에 대해 성찰한다. 시인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삶과 자신에게 도래할 미래의 삶을 현재에 모두 함께 산다. 그 순간은 시인이 바깥의 언어를 통해 사태를 새롭게 명명함으로써 획득한 말과 시간의 깊이이다. 그것은 주체의 삶이 죽음과 타자의 삶과 연계되어 있으며 타자의 윤리와 함께 구성된다는 깨달음을 준다.

 

송승환 (시인, 문학평론가)

 

 

할머니의 세월을 생각해본다. 아침마다 양동이에 쥐덫을 빠뜨리고 그것이 죽을 때까지 흔들리는 물을 가만히 바라보던 할머니. 죄를 지으면 저곳으로 가야 한다고, 언덕 위의 법원을 가리키던 할머니. 일상의 잔혹에는 무감각하고 권력의 상징에는 공포심을 내면화한 영혼, 그것은 근대사와 현대사가 훈육하고 길들인 우리의 영혼이다. 그러나 쉿, 법원이라는 이름의 상징 권력에 포획되면, 물에 빠진 쥐처럼 버둥거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그런 소문이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던 세월이 있었다. 근대사의 유령 같은 그 세월의 그늘 속에서 우리는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


2020년 코로나19 펜데믹의 정세 속에서 다시 베스트셀러로 회귀한 까뮈의 소설 『페스트』를 읽는데 죽은 쥐가 밖으로 기어 나왔다. 이제 할머니도 안 계시는데, “저 차갑고 축축한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황인찬의 질문을 떠올렸다.

 

김행숙 (시인)

 

다음검색

저작자 표시 컨텐츠변경 비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