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관련

공문(孔門) 십철(十哲)

시치 2018. 4. 16. 13:29

공문(孔門) 십철(十哲)


덕행으로 뛰어난 제자     :  안회   민자건   염백우   중궁

언변에 뛰어난 제자       :  재여   자공 

정사(政事)에 뛰어난 제자  :  염구   자로

문학에 특출한 제자       :  자유   자하

 

공자와 14년의 방랑을 한 여러명의 제자 중에 안회, 자공, 자로가 제일 공자와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안회가 죽은 뒤 공자는 하늘이 자신을 망치게 한다며 한탄을 했다고 합니다.

 

자공은 현명하고 사업을 잘해 공자를 경제적으로 도와주었으며 협객출신인 자로는 누구를 막론하고 공자의 험담을 하는 자가 있으면 이유 불문하고 입을 뭉개버려 공자에게 여러 번 주의를 받았지만 막무가내였고. 이에 공자는"자로가 나의 문하생이 된 후부터는 나에 대한 험담이 사라졌어."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고 합니다.

 

공자의 제자들

 

안 회


안회는 노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연이며 공자의 수제자로서 공자 제자의 으뜸으로 꼽으며 안자라 존칭하며, 후세에는 아성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가난 속에서 불우한 일생을 마쳤으나, 그 학식이나 인격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그는 공자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사부님의 인격은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아지고, 뚫을수록 더욱 굳어진다. 그리고 그 모습은 앞에 계신가 하면 어느 사이에 뒤에 계신다. 사부님께서는 요령 있게 사람을 잘 가르쳐 주셨다. 나의 지식을 학문에까지 넓혀 주셨고 나의 행동이 道에 벗어나지 않도록 禮로 잡아주신 덕분에 나는 학문을 그만 두고 싶어도 그만 둘 수가 없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힘을 다하게 됐다.

어떤 때는 초연히 서 있는 사부님에게 가까워지는 듯하다가도 어느새 더욱 멀고 높이 떨어져 보여 아무리 따라 가고자 해도 미칠 수가 없었다."(자한편)

공자는 "나는 안회가 앞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았으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모습은 본 일이 없다."(자한편)고 칭찬했고, "안회는 몇 달 동안이라도 仁에 어긋남이 없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하루나 한 달쯤 행하다가 그만 둔다"(옹야편) 하며 극구 칭찬했다.

그리고 공야장편에서 공자가 자공에게 "너와 안회 중 누가 더 나을 것 같으냐?"하고 묻자, 자공이 대답하길 "제가 어찌 안회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듣고서도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겨우 둘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너는 그는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아울러 나도 그를 따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안회는 나이 32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에 공자는 "! 하늘이 나를 망치게 하는구나! 하늘이 나를 망치게 하는구나"(선진편) 하며 탄식을 할 정도로 그를 아꼈던 것이다. 공자의 장탄식은 자한편에서 꽃에

비유하여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싹이 특 때는 아름다우나 꽃 중에는 꽃이 피지 못하는 꽃도 있구나! 그리고 또 꽃은 피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구나.

민자건

자건은 그의 자()이고 이름은 손()으로 공자보다 15세 아래다. 일찍이 노나라 계씨가 자건을 비()의 태수로 삼으려고 사신을 보내 오자, 그는 계씨의 무도함을 알고 사신에게 "계씨 대부에게 정중하게 사절한다고 전하시오. 만일 거듭 권유하러 다시 보낸다면 나는 제나라로 가고 말 것입니다."(옹야편)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고결한 사람으로 일뿐만 아니라 효도 또한 남달리 지극했다. 이에 공자도 "민자건이야말로 진정 효자다. 그의 부모 형제를 비난하는 사람이 없으니까."(선진편) 하며 칭찬했다.

염백우

이름은 경(), 백우는 자(). 공자는 그를 가리켜 덕행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나 '논어'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옹야편 한 군데밖에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그가 문둥병으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 공자가 병문안을 오자 그는 피했다. 그러자 공자는 창문을 통해 그의 손을 잡고 "이럴 수가…… 이것도 천명인가? 이런 사람이 무서운 병에 걸리다니……." 하며 위로했다.

중 궁

중궁은 염옹의 자(). 그는 덕행이 높고, 노나라의 실권자 계씨 가문의 일을 다 맡아서 처리할 정도로 관리력도 뛰어났다. 그러나 그는 말재주가 없어 사람들에게 약점으로 비춰졌다. 그러나 공자는 공야장편에서 "말재주는 있어서 무엇에 쓰겠느냐." 하며 중궁의 약점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안연편에서 중궁이 공자에게 "스승님 仁이란 무엇인지요?"라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회에 나가 사람과 사귈 때는 귀빈을 만난 듯이 존경하고, 백성을 공과 사로 부릴 때는 제사를 받들 듯이 경건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신중하게 대해야 한다.
仁이란 남을 위한 것이다. 고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켜서는 안 된다. 이렇게만 한다면 제후를 섬기는 위정자라도 남의 나라에 원한을 사는 일이 없고 가정에서 원망을 듣지도 않는다."

재 여

자는 재아 또는 자아이며, 공자의 제자 중에서 가장 언변이 능한 사람이다. 그러나 공자는 이 웅변가의 게으름을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고 더러운 흙담장은 덧칠을 할 수 없다."고 표현해 재여와 같이 말과 행동이 틀린 인간은 꾸짖을 필요조차도 없다고 지적하였다.

"전에 나는 사람을 대할 때 말하는 것을 듣고 행동도 그와 같은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제는 재여의 행동을 보는 것만으로 사람의 행동을 살핀 다음에야 믿게 됐다."고 말했다.

공야장편에 소개했던 그대로 재여는 팔일편에서도 공자로부터 말에 대한 지적을 받았다. 노나라의 애공이 재여에게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에 심은 나무는 왕조에 따라 다르니 무슨 까닭이오?" 하고 묻자 재여는 잘 모르면서도 그럴듯하게 대답하였다.

"옛날 하나라 때는 소나무를 심고, 은나라 때는 잣나무를 심고, 주나라 때는 밤나무를 심었는데, 이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공자는 한숨을 쉬며, "이미 저지른 일이라 말해도 소용없고,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 말려도 소용없으며, 지나간 일이라 탓할 수도 없구나!" 하며 아예 포기를 했다. 그 외에도 공자의 지적은 옹야편 등에 나타나 재여의 웅변술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자 공

이름은 단목사이며 자공은 그의 자이다. 논어에 자공의 얘기가 제일 많이 나올 정도로 대단히 영리하고 사교에 능해 돈벌이의 천재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공자도 선진편을 통해 "자공은 천운을 기다리지 않고도 부를 누렸는데 그의 슬기로운 판단은 거의 다 적중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안회처럼 道를 즐기는 것보다는 못하다."고 충고를 했다.

 

자공의 소개는 이 책에서 많이 했으므로 생략하고, 그후 자공은 공자가 세상을 뜬 이후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각각 대부의 벼슬까지 올랐다가 제나라에서 죽었다.

염 구

자는 자유이며,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 노나라의 계강자 밑에서 벼슬을 하다가 공자의 뜻을 저버리는 바람에 배반자 소리를 듣기도 했다. (선진편, 옹야편 참고)

자 로

3천 명의 제자 중에서도 가장 이채를 띤 제자는 바로 자로였다. 성은 중(), 이름은 유(), 자로는 그의 字다. 그는 성격이 곧고 급하며 괄괄해 대처럼 부러지기는 해도 구리처럼 휘지 않는 위인인 동시에 남에게 지기를 싫어해 곧잘 아는 체하다가 공자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

"너에게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다."(위정편)

공자도 그의 성격은 좋아했다. 자로는 원래 협객이었다. 협객은 원래 용감한 행동을 좋아하듯이 자로는 공자의 명성에 질투심을 느끼고 닭과 돼지를 몰고 공자의 학습장에 나타나 공자의 학습장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자 공자는 자로에게 온화한 미소와 함께 "자네는 무엇을 좋아하나?" 하고 묻자, 자로는 의기양양하게 "나는 무기를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이에 공자가 "학문도 좋아하나?"라고 물었다. 자로는 기세를 올리며 "학문이 밥먹여 주는가?" 라고 대답했고, 공자는 이 기세를 꺾어 나갔다.

"어진 임금에게 간신이 없다면 정()을 잃고, 선비로서 교우가 없으면 듣지를 못하는 것과 같으며, 나무는 줄을 타고 곧아지고, 말에는 채찍이 필요하며, 활에는 화살이 필요하듯이 사람에게도 방자한 성격을 바로잡는 교학이 필요하다."

교학 정신의 근본인 공자의 말에 우쭐해 있던 자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남산의 대나무는 바로잡지 않아도 스스로 자라고, 이것을 사용하면 코뿔소 가죽도 뚫듯이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 굳이 학문을 닦을 필요가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자로의 이른 유치한 비유는 공자에게 있어서 어린아이 손목을 비트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닌가.

"그대가 말하는 남산의 대나무에 쐐기나 화살촉을 박아 학문을 연마한다면 가죽만을 뚫겠는가?"

공자의 멋진 대답에 자로는 얼굴을 붉히면서 무릎을 꿇고 공자의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다. 자로는 여기서 공자와의 논쟁만으로 항복한 것은 아니었다. 공자와의 첫대면 때부터 자기 세계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공자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때 공자의 나이는 40세 전이었고 자로의 나이는 31세였다고 한다.
그후 자로는 공자를 끔찍하게 생각했다. 누구를 막론하고 공자의 험담을 하는 자가 있으면 이유 불문하고 입을 뭉개버려 공자에게 여러 번 주의를 받았지만 막무가내였다. 이에 공자는"자로가 나의 문하생이 된 후부터는 나에 대한 험담이 사라졌어."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또 자로는 공자가 전쟁을 싫어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꾸중을 각오하고, "만약 스승님이 원정군의 총사령관이 되신다면 누구를 참모로 쓰시겠습니까?" 하고 엉뚱한 질문을 던져 공자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했으나, 공자는 "글세?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두들겨 잡고, 배도 없이 강을 건너려고 하며, 죽음도 불사하고, 덤벙대는 사람과는 함께 갈 수 없겠지."(술이편) 하며 자로의 사랑 확인을 무참히 꺾어버렸으나, 공자는 그래도 이런 자로를 좋아했다.

"자기 몸에 누더기를 걸치고서도 사치스런 옷을 입은 사람과 나란히 서서 태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자로뿐일 거야." 하며 칭찬한 것이 그 좋은 예다.

따라서 자로도 이런 공자를 거의 신적으로 존경했다. 그래서 자로는 '악은 일시적으로 번성하고 최후에는 벌을 받는다고 배웠다. 그런데 왜 공자님 같은 분이 악에 고통을 받아야만 하나?' 하고 하늘을 원망하였고, '성인 군자가 왜 가정적으로 불우해야만 하고 늙어서까지 험한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하는가?' 하며 슬피 울었다. 그는 천하를 위해서 슬피 운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공자 한 사람만을 위해서 울었던 것이다.

그후 자로는 위나라 대부 공리의 가신으로 있을 때, 정변이 일어나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전에 이미 공자는 정변 소식을 듣고 자로는 죽었겠구나 하며 예측을 했다. 그의 급한 성격을 공자는 항상 걱정했었기 때문이다.

자로는 이때 창에 목이 반쯤 끊겨 숨지면서도 갓끈이 끊어지자 "군자는 죽을 때 죽더라도 갓을 벗을 수는 없는 법이다"라고 말하면서 갓끈을 똑바로 매고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 62세였고, 그의 시체는 무참하게 토막이 나 소금에 절여져 공자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의 곧은 성격과 급한 성격만큼이나 적도 많았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고 볼 수 있다.

얼마 후 위나라의 사자가 소금으로 절인 자로의 시체를 공자 앞에 내놓자 공자는 이것을 보고 대성통곡하면서 집 안에 있는 소금으로 만든 음식물을 모두 쏟아버렸다고 한다.

자 유

성은 언(). 이름은 언이며, 그는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서 문학적인 소양이 가장 풍부해 일찍이 노나라 무성의 성주가 되어 큰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어느 날, 공자가 자유가 다스리고 있는 무성으로 가는 도중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음악을 즐기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흐뭇한 기분으로 무성에 도착해 자유에게 "닭을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있을까?: 라고 말했다.

이에 자유는 공자의 뜻을 알아차리고 "전에 제가 스승님으로부터 군자가 禮와 樂의 道를 배우면 백성도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되고, 백성이 禮와 道를 배우면 다스리기 쉽다고 하시던 말씀대로 따랐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자 하

성은 복, 이름은 상이며 자하는 자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서 공자의 가르침을 후세에 전하는 데 크게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도 문학 방면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제일인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증거로 팔일편을 보면 된다. 자하는 공자가 세상을 뜬 후 공자의 사상을 널리 전파했고, 나중에 위나라 문후의 스승이 되었으나 아들이 죽자 통곡을 하다가 눈이 멀었다고 한다.

 

공문(孔門) 십철(十哲)


덕행으로 뛰어난 제자     :  안회   민자건   염백우   중궁

언변에 뛰어난 제자       :  재여   자공 

정사(政事)에 뛰어난 제자  :  염구   자로

문학에 특출한 제자       :  자유   자하

 

증자


이름은 삼(). 자 자여(子輿). 산둥성[山東省]에서 출생하였다. 증점(曾點)의 아들이다. 공자(孔子)의 고제(高弟)로 효심이 두텁고 내성궁행(內省躬行)에 힘썼으며, ()나라 지방에서 제자들의 교육에 주력하였다. 공자가 제자들을 모아 놓고나의 도는 하나로써 일관한다(吾道一以貫之)”고 말했을 때 다른 제자들은 그 말의 참뜻을 몰라 생각에 잠겼으나, 증자는 선뜻부자(夫子)의 도는 충서(忠恕)이라고 해설하여 다른 제자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효경(孝經)》의 작자라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으며, 현재 전하는 《효경》은 진한시대(秦漢時代)에 개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증자의 사상은 《증자(曾子) 18() 가운데 10편이 《대대례기(大戴禮記)》에 남아 전하는데, ()와 신()을 도덕행위의 근본으로 한다. 그는 공자의 도()를 계승하였으며, 그의 가르침은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를 거쳐 맹자(孟子)에게 전해져 유교사상사상(儒敎思想史上)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동양 5성의 하나이다.

 

유 약 

 

윤리와 질서를 중시하였던 인물로 '논어' 에서는 유자로 불려질 만큼 후대의 존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