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마세요
돌아갈 곳이 있겠지요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구멍 숭숭 뚫린
담벼락을 더듬으며
몰래 울고 있는 당신, 머리채잡힌 야자수처럼
엉엉 울고 있는 당신
섬 속에 숨은 당신
섬 밖으로 떠도는 당신
울지 마세요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2005년>
- ▲ 일러스트=이상진
당신한테서 밀감 향기가…
아미타불심곡(범어)
밀감이 익는 멀고먼 따뜻한 남쪽 나라.
제주도는 동해 바닷가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내게 외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무잡잡한 시골 소녀가 아까워하며 한쪽씩 떼어 먹던 '서귀포 밀감'.
향긋한 밀감 마을에서 사람들은 밀감 같은 사랑을 나누겠지.
이홍섭(43) 시인의 〈서귀포〉를 읽으면 어렸을 적 아껴 먹던 밀감 맛이 되살아난다.
달콤새큼한 밀감 맛은 내게 묘한 위안을 주었다.
우울할 때 밀감을 한쪽씩 떼어 물면 위로가 되었다.
슬플 때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우고 나면 왠지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처럼.
이 시를 읽다 보면 '울지 마세요' 말하며 누군가 살그머니 밀감 한 바구니를 내미는 것도 같고,
'몰래 울고 있는 당신'이 더듬는 검은 현무암 담장을 배경으로 자디잔 흰 귤꽃들이 잔별처럼 흔들리며 괜찮다…괜찮다…, 그러는 것도 같다.
강릉 출신의 이홍섭 시인이 어른이 되어 서귀포를 다녀온 후 쓰게 되었다는 이 시에는 동쪽과 남쪽과 서쪽을 떠도는 한 생애의 유랑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섬 속에 숨은 당신/ 섬 밖으로 떠도는 당신'의 이름은 인생. 떠도는 인생에 대한 탁월한 메타포인 이 시가 이홍섭을 통해 세상에 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동쪽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리라.
'가도 가도 서쪽'인 불가(佛家)의 이상향인 서방정토(西方淨土)가 서쪽으로 돌아가는 서귀포(西歸浦)에 포개져서 아득한 공명을 일으킨다.
이 시가 실린 시집 제목은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인데, '서쪽'에 대한 시인의 향수는 관념적, 종교적 지향 이전에 그의 태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리라.
오래 전 어느 겨울날 인사동 거리를 헤매며 술집을 찾아가던 벗들에게 살그머니 밀감 봉지를 내밀던 그를 기억한다.
추운 날 손을 호호 불며 마지막 떨이를 하려는 좌판 할머니에게서 밀감을 몽땅 산 시인은 말했다.
"밀감이 참 고와서…." 참, 이런 고운 시 하나! '한 아이가 돌을 던져 놓고/ 돌이 채 강에 닿기도 전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던/ 돌 같던 첫사랑도 저러했으리'(〈달맞이꽃〉 부분). 연시(戀詩)가 시의 절정이자 궁극이라 믿는 그가 세상과 사람에게 살그머니 말 걸 때면 세상이 참 조용해진다.
엉엉 울어도 그 속의 따뜻한 고요가 살아난다.
올망졸망한 자식이 셋, 그 아주머니는 그로부터 스무 해 리어카는 비었는데
읽는 순간, 가슴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둑방 하나를 한 순간에 무너지게 하는 시가 있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소재가 시에 등장하게 되면, 독자와 시인 간의 공감대 라는 다리는 더욱 쉽게 출렁거린다. 과거의 어머니나 현재의 어머니나, 옆집의 어머니나 우리 집 안방에 계신 어머니나 자식에 대한 사랑과 희생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홍섭 시인의 <리어카>라는 시에서도 그런 어머니가 등장한다. 남대천에 살면서 늦가을에는 배추를 내다 팔고, 콩을 내다 팔고, 겨울이면 얼기설기 이은 시래기를 내다 파는 어머니. 내 입술은 말라가도, 아이들 입에 오물조물 뭔가 씹히는 것만 봐도 배부른 어머니. 이 시에서 하드를 입에 문 아이들의 입과 연신 침을 묻히며, 햇빛 아래서 타고 있는 어머니의 입술. 올망졸망한 세명의 아이들을 실은 리어카와 빈 리어카는 대조를 톡톡히 이룬다.
마지막, 이 시를 읽는 독자가 눈치 채야 하는 것이 있다. 남대천이라는 지역적 특징이다. 남대천은 11월만 되면 연어 떼가 올라와 산란을 꿈꾸는 곳이다. 아직도 어머니가 남대천을, 그리고 빈 리어카를 버리지 못한 이유는 언젠가 다시 돌아올 연어 떼처럼, 품을 떠난 올망졸망했던 자식들이 다시 올망졸망한 새끼들을 데리고 돌아올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은 아닐런지. |
故 嚴 . . 에게
내일 8월28일 오후 2시 태백예총회관에 강원대학교 소설가 전상국 교수님이 문학을 전공하는 문학도 25명을 데리고 태백에 내려오신다고 하였다. 사실 이 글은 이홍섭의 시집<숨결>을 읽고 편지의 형식으로 독후감을 써서 너에게 보내려고(너의 홈폐이지에 올리려고) 쓰기 시작하였는데 쓰다 보니까 이렇게 확장되어서 마치 시집의 발문정도의 분량의 글이 되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너는 읽었지만 나의 시도 한 두 편 자연스럽게 끼워 넣는 이상한 글로 완성시켰다. 그러나 어차피 잘된 일이다. 이 글을 팔팔한 문학도에게 한 장씩 나누어주고 그냥 천천히 읽을 것이다. 글줄이나 쓴다는 시인들은 대체로 말을 잘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 또한 말을 잘 못하니 문학을 전공하는 팔팔한 청춘들과의 대화의 장소에서 허튼 말실수나 펑펑 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니까....
정연수 시인이 강릉대학원 수업 중에 만난 이홍섭, 친필 사인이 되어 있는 이홍섭 시인의 <숨결><현대문학북스刊>이라는 시집을 읽었다. 거의 두 달만에 나에게 전해진 조금은 식은, 그렇지만 따스한 시인의 숨결이 아직까지 느껴지는 그런 시집이었다. 두 달동안 정연수 시인이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이 시집을 받는 순간 시집의 내용이 태백의 아류로 변해 있는 것은 아닐까, 태백시인(나도 태백 시인이니까)의 좀처럼 뚫릴 것 같이 않는 꽉 막힌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 야릇한 감정이 들었었다. 그렇지만 시집을 받아들면 일차적으로 코끝을 스치는 감흥 같은 것, 아니면 희망 같은 것, 또 그게 아니면 첫 장을 넘길 때의 두근거림 같은 것, 이런 것들로 인해 나는 시집을 펼치면서 사치로운 사람이 된다. 전에는 서점에서 책 구경으로 소일하는 시간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호화로운 시간이었다. 서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만큼의 사치가 어디 있을까? 요즘엔 사고 싶은 책을 사면 서둘러 나온다. 각박해진 나의 심성 때문일 것이다. 좋은 책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인한 희열이라든가, 첫 장을 넘길 때의 설레임 같은 것이 줄었다. 서글프다.
1998년 그의 첫 시집 <강릉, 프라하, 함흥> 이라는 시집을 읽었을 때에는 강원도에 이런 시인도 있었나 했었는데 제2시집 <숨결>을 읽고는 드디어 그에게 매료되고 말았다. 여러 편의 시중에서도 네가 대학원 다니면서 연구하겠다고 했던 이성선 시인에 관한 시를 반복해서 읽고는 너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몇 해 전에는 눈이 몹시도 많이 내린 겨울 태백산, 그래서 태백산의 유명세를 거침없이 뽐내던 태백산을 이성선, 최명길 시인과 태백문단의 몇 몇 시인들과 같이 오르던 그 아련한 등정이 지금도 새롭게 기억되는데 태백산 정상 근처에는 지금도 굳건한 직립의 고통으로, 고독한 연민으로 서 있을 주목이 나를 호되게 후려치는 것이다.
이홍섭의 첫 시집에서 그는
"철새를/지상에서 밀어 올리는 힘은/팔 할이 연민" (철새는 날아간다)이라고 고백 한 바 있다. 그러면서 그는 "저 외로운 날개 밑에는 /얼마나 많은 연민이 숨어 있는가" 묻고 있다.
연민, 연민, 연민!... 얼마나 아름다운 말이며 무서운 독설인가.....
이홍섭류의 연민, 그리고 연민의 이성선을 눈물로 본다.
흰 장갑
-故 李聖善 시인
서울에서도
제일 번화한 대치동 사거리였다
잠깐만 보고 가려고....
설악산에서
막 올라온 선생은
마치 주례라도 보고 오신 듯
하얀 장갑을
끼고 나타나셨다.
그로부터 보름 뒤
선생은
또 홀연히 사라지는 주례처럼
저 세상으로 가신 것이었는데
나에게 차마 궁금했던 것은
그 하얀 장갑을
어디다 두고 가셨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게 하 궁금해 못 견딜 때는
지나가는 구름이거나
길가의 눈 덮인 돌멩이거나
아니면
다 떨어진 런닝구라도 붙잡고
이성선표 흰 장갑이라
꾸역꾸역 이름 붙여보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어떤 문학잡지에서 이홍섭의 시를 읽고는 생의 바닥을 치는 시라고 생각했는데,
마라도
막배는 떠나고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
태어나 처음으로
빗물에 삶은 라면을 먹으니
지나간 날들이
다 백척간두와 같다
한 발을 더 내디디면 바다였을,
이곳에서는 스님도
고기를 잡고
전복을 딴다, 머리를 깍아본들
이 망망대해에서
무엇을 구할 수 있으랴
이곳에서 모든 배는 막배다
다시 막배가 온들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빗물에 삶은 라면을 꾸역꾸역 넘기며
무심히 바라보는 바다
막배 한 척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라도를 떠나고 있다.
그의 시 <모래무지>에서 "좋은 시는/바닥을 치는 시야, 그지?" 라고 그가 후배에게 던졌던 말처럼, 생의 바닥을 치는 시란 지린내 나는 일상의 낯익음과 어떻게 싸우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수없이 해보는 주문이지만, 시가 더욱 더러워지고 잡스러워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가 말하는 좋은 시에도 근접할 수 있은 게 아닐까 싶다. <나희덕의 발문 중에서>
그의 첫 시집에서 연민의 징후로 쓰여진 시<철새는 날아간다>가 그의 대표작이 되었지만 제2시집 <숨결>에서도 연민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날아가는 철새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가의 가르침은 이런 인간적인 연민에 대해 경계한다. <붓다>는 일찍이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있는 연민을 부드러운 족쇄라 부르고 연민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조그만 거미가 거미집에 매달려 있는 형상에 비유했다. 그리고 道(聖)를 위해서는 그 연민까지도 잘라버리라고 말했다. 이홍섭은 팔 할이 연민인 그의 시적 심성으로 보면 연민으로 인한 갈등과 번민은 가히 미루어 짐작이 될 만하다.
누구나 돌아갈 곳이 있다. 풀도 김수영의 말처럼 바람 따라 눕고 산새들도 나무에서 잠이 든다. 우리들도 기여코 돌아 갈 마음의 고향이 있는데, 망망대해로 돌아 가야하는 괭이 갈매기 이야기에 괜히 콧등이 찡해 오는 것이었다.
경포호수
철새들이
다시 날아오를 준비를 하며
엔진도 고치고
요란하게 날개도 퍼덕여보는 동안
돌아갈 곳이라야
망망대해뿐인 괭이갈매기는
어쩌다
철새들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마냥 흰 가슴에
제 얼굴을 푹 파묻고는
괜스레 두 발로
브레이크를 꾹
밟아보는 것이다.
이홍섭 시인은 지금 비승비속의 언덕, 세간의 방에서 살고 있다. 그는 불가와의 각별한 인연들이 <숨결>이라는 제2시집의 골격이 되었는데 연민으로 바라보는 따스한 속가와 빗물로 빈 항아리를 채우는 승가에서 근원의 허기와 갈증으로 몸 뒤트는 이홍섭은 非僧非俗의 경계에서 계속 영혼을 따스하게 데우며 스스로 위안 받고 있는 것이다.
밤비
남들 회사 갈 때
나 절에 간다
내 거처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언덕 한켠
나의 본업은
밤새워 내리는 밤비를
요사채 뒤뜰 항아리에 가득 담는 일
하지만
내리는 밤비는
항아리를 채우지 못하니
나의 부업은
나머지 빈곳을 채우는 일
나는
항아리를 껴안고
비 내리는 꿈속을 헤맨다.
이홍섭의 몸과 영혼은 僧(聖)도 아니고 俗도 아닌, 바로 그 경계 언덕쯤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僧(聖)과 俗의 경계... 함민복은 "모든 경계에서 꽃이 핀다" 라며 꽃이 만들어 낸 경계조차 괴로워했는데.. 나는 지금 어느 경계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속에 발을 담그고 몸집이나 따끈하게 데우는 나는 僧(聖)의 근처에 갈 엄두도 못 내고 있으니.....
그림자
내가 죽으면
그림자는 어디로 가나
기린처럼
목이 길었던
내 그림자
한 번도 내 앞에 서지 못했으되
언제나
나보다 먼 곳을 바라보던
渴愛의 눈동자
어둠 속에서
함께 울던 그 많은 날들을 두고
내가 죽으면
그림자는 어디로 가나
초원을 성큼성큼 걸어
나 없는 곳으로 가나.
초원을 성큼성큼 걸어가 나 없는 곳이 바로 僧과 俗의 경계란 말인가. 聖에 도달하려는 의도 자체가 고난의 시작이며 지난한 자기와의 투쟁일 테니까....
이홍섭은 성과 속의 경계를 흔쾌한 마음으로 헤메고 다니는데 애초부터 그는 성과 속의 경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알고 있음으로 인해 파생되는 완곡한 고독과 끝이 없는 갈등을 <밤길>이라는 시에서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밤길
손전등도 없이 캄캄한 산길을 오르는데
노스님은 자꾸만 문둥이 얘기만 하신다
갈수록 길은 더 어두워지고
물소리는 점점 더 커지는데
노스님은 어둠 속으로 손을 쑥 내밀며
손발 없는 문둥이가 되고 싶다 하신다
얼굴 없는 문둥이가 되고 싶어하신다
일평생 운수납자로 살아오신 노스님
이 아득한 밤길을 잘도 오르시건만
어쩌자고 문둥이가 되고 싶으신 걸까
다시 내려가야 할 밤길을 걱정하며
열심히 길을 더듬는 서른 중반의 청맹과니와
어둠 속으로 열심히 팔뚝 질을 해대는 노스님
오늘따라 밤하늘의 별들은 너무 멀리 있고
컴컴한 산길은 멀기만 한 것이다.
이홍섭 시인 특유의 잔잔하고 나지막한 <숨결>, 이 가느다란 숨결 같은 시들이 더욱 빛난다. 그것은 이홍섭은 "내 거처는 非僧非俗의 언덕 한켠"이라고 말한 확언의 시구에서처럼 그의 몸과 영혼은 聖도 아니고 俗도 아닌, 바로 그 경계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며 비승비속의 경계에서 다량의 시들이 쏟아 내어졌기 때문이다. 누구나 非僧非俗의 중간 언덕쯤, 아니면 승가의 요사채 뒤뜰쯤, 아니면 사천왕사의 통로 그 정도쯤에서 살아가기를 희망 할 것이다. 나는 한번도 그 실행(聖을 위한 오체투지라고 해야겠다.)을 위해 오체투지하듯 그렇게 몸을 던진 적이 없으니 뜨거운 문학적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빌미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이홍섭의 <숨결>이라는 한 권의 시집, 아니 시집 이상의 깨우침, 聖과 俗의 경계가 어디쯤 일까하고 자꾸 되물어 보는 것이다.
나는 때론 아픈 도사리였으니까.
도사리라는 우리말이 있다.
*도사리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다
*익는 도중에 바람이나 병 때문에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를 도사리라고 한다
나도 때론 아픈 도사리였다
윤종영 : 1996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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