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 사랑시

[스크랩]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38]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박 라 연

시치 2008. 11. 6. 16:32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38]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박 라 연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 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 일러스트=이상진
 
 
 
"가끔 전기가 나가도 좋아… 당신과 함께라면"
김선우·시인
 
 
 

 

 

 
 
 
"가끔 전기가 나가도 좋겠어. 당신과 함께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
건강한 에로스로 출렁이는 이 말은 우리의 몸과 정신을 자극한다.
 
전기가 나가 어두워진 방을 상상하는 우리의 몸은 사랑스러워지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당신과 함께라면 기꺼이 가난을 헤쳐가겠다는 사랑의 의지가 몸의 사랑을 완전에 이르게 한다.
사랑의 힘으로 한 땀 한 땀 우리의 낮과 밤을 깁겠노라는 이것은 일종의 선전포고이다.
 
물질에 대한 탐욕이 비정상적으로 팽배해지는 세상에서 사랑의 갑옷을 입은 현대판 평강공주는 여린 듯 당차다.


이 시는 박라연(57)이 결혼 후 10년쯤 지나 쓴 신혼일기다.
스물일곱에 결혼할 때 남편은 가난했지만 그녀는 쌀이랑 연탄만 안 떨어지면 족하다 생각했다.
그러다 늦깎이로 온달 설화를 소재로 시 쓰기에 매달리던 즈음, 한 친구가 시인의 집을 보러 가자고 했단다.
 
찾아간 자그마한 시인의 집은 감동적이었다.
넝쿨장미가 활짝 핀 담장 너머 대추나무가 있는 산동네 소박한 시인의 집은 그림처럼 밝았다.
박라연이 매달려있던 시에 부족한 2%를 채워줄 무언가가 벼락처럼 찾아 들었다.
사랑만 있으면 두려운 것이 없던 자신의 신혼살림과 온달 설화와 가난한 산동네를 환하게 하던 시인의 집이 주는 따뜻한 영감이 한 편의 시 속에 어우러졌다.
 
박라연은 이 시로 그 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이 되었다.
정릉에 있던 그 '시인의 집'이 신경림 시인의 집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한 편의 시가 세상에 오는 비밀에 관한 이야기면서, 세상에 와서 무르익는 사랑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다.
'없는 것이 많아' 아랫목은 더욱 따뜻하고, 색색의 꽃씨를 모으는 꽃밭이 되느니.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 같은 물질적 가치만 달 줄 아는 '저울'을 버릴 때 사랑의 신화가 시작된다.
 
그대에겐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을 사랑방'이 있는지?
박라연의 시를 읽고 있으면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진다.
사랑이 감사한 것은 물론,
누추도 쓸쓸함도 감사하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입력 : 2008.11.04 22:44
 
 
 
 
 

철학과 순수로 6년만에 온 시인 박라연

 

새 시집 ‘우주 돌아가셨다’ 펴내

 

 

 

 

 

 

 

시인 박라연이 시집 ‘공중속의 내 정원’ 이후 6년만에 새 시집 ‘우주 돌아가셨다’(랜덤하우스중앙)을 펴냈다.

 

철학적 성찰이 돋보이는 이번 시집은 순수함을 갈구하는 시인의 마음이 담겨있다.

“시인이 되고서 오히려 더 때가 묻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더러운 삶을 정화하는 의미에서 열심히 썼습니다.

이번 시편들은 저를 다스려가는 시간의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표제시 ‘우주 돌아가셨다’는 다소 거창한 느낌을 주지만 시를 들여다 보면 빙긋 웃게 된다.

시의 모티프는 친부의 죽음. 공교롭게도 아버지의 함자는 우주였다.

 

시인은 아버지, 즉 우주인 신이 죽으면서 세상의 모든 나쁜(?) 신도 함께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부시의 신, 빈 라덴의 신을 품으시고/고 김선일의 참수장면을 품으시고/입적하신/변신이었다는 것’.

 

(우주 돌아가셨다1의 중)

 

“생전에 해준 게 없다고 미안해 하시더니 좋은 시 하나를 쓰게 해주고 가셨네요.

사람들이 해학적으로 받아들였으면 하는데 모두 너무 어렵게 보는 것 같아요.

시는 호기심을 유발하는 기능도 있잖아요.”

 

 

박라연은 영화 ‘실미도’를 보고 타인의 아픔을 절감했다며 그 눈물이 시 ‘너무 늦은 질문’을 낳았다고 말했다.

누군가 힘겹게 성취한 것들을 쉽게 지나쳐 버리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있었다고 한다.

 

“시는 생명체처럼 어디선가 온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뜻대로 되지도 않고요. 무엇을 써야겠다는 의식은 있지만 실제로 시어로 형상화되는 모습은 다른 것 같아요”

 

시인 김명인은

박라연의 시를 ‘폐허의 현실을 통과하면서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려 한 의지의 소산’이라고 평했다.

 
 
 
 
 


 

* 난쟁이 - 박라연

우리는 언제나 맨 앞줄에 섰다
궂은 비 내리는 곡마단에서 또 다른 일터에서
시든 잎새들을 반짝이게 하면서
낮게 삭아내린다
우리가 이처럼 낮아질 때
비로소 꽃이 피는 이웃의 잎새들
우리를 난쟁이라 부르는
저 키 큰 미류나무
밤마다 오히려 낮아져서는
우리 키를 올려다보며 흔들리고

무릎까지 흘러내린 차디찬 슬픔
문득 흰 그림자로 서 있는
어둡게 잊었던 내 키를 껴안으며
나직이 그리운 이름을 부를 때
막다른 골목에서 말갛게 떠오르는 얼굴
빨랫줄의 새하얀 속옷처럼 반갑다
우리가 또다시 떠돌이별이 되어
어두운 어두운 곳으로 흐르지만
흐르면서 잊어가는 우리 슬픔 부름켜

 


 

* 무창포에서 - 박라연

추운 얼굴들 모여 모여서 젖은 이야기로 잠이 드는 밤 가라앉
으며 떠오르며 끝없이 서성이는 세상은 눈 굵은 그물로 다 가릴
수 없는 슬픔인데 출렁일수록 깊어가는 상처 따라서 안 보이는
섬 찾아 조금씩 작아지는 푸른 물방울

소금처럼 빛나는 한줌 슬픔으로 섬을 이룰 수 없는 키 작은
어부들의 영혼이 발목 붉은 도요새 되어 뿔뿔이 허공을 떠돌고
불빛 찾아 손 흔드는 낯선 안강망 어선들 어디에도 지친 닻을
내릴 곳이 없다

눈물이 강물같이 보이던 날 성욕처럼 들끓는 물거품을 바라보
며 누구는 죄를 짓고 누구는 용서하고 목쉰 파도 되어 흐느끼지
만 죽어서도 산란하는 늙은 어부의 꿈 만난다 앉은뱅이섬, 혹은
 
 
 




* 을숙도 - 박라연

몇몇은 공중에 둥지를 틀었다
가난은 깃털 같은 죄라며
아직도 뭍이 두려운 사람들
대낮에도 발이 빠진다
오랜 설움 안으로 안으로만 삭여온 녹슨 종처럼
눈물꽃 송이송이 목마른 갈대숲 적시고
삐삐꽃 쑥부쟁이 떠난 자리에
죽어도 죽지 않는 풀뿌리들 돋아나
동행을 재촉한다 모두가
잊혀진 어제는 눈발에 젖어
상처만큼 깊어지는 강물이 되어
한세상 눈시린 풍경으로 떤다
뼈아픈 그림자 허옇게 드리운 채
속죄하며 흔들리는 늪
어둡고 쓸쓸한 지상의 한 끝에서
우리를 잠시 취하게 하는 가을산의 어스름
하염없이 울고 가는 두루미떼 따라가면
밀물과 썰물이 무작정 섞여지듯
우리들 인심도 그렇게 섞일 수 있을까
그대 묻힐 땅 한 뼘 없어도
을숙도의 뿌리 끝에
해마다 새끼를 치는 희망을 치는
강줄기 따라 만나고 헤어진 이웃들
한 떼의 철새가 되어 그 저녁 하늘로 날아들면
우리도 등뼈에 묻어둔 비밀 몇 포기씩 안고
높이 더 높이 날아올라
만삭의 죄를 풀고 가벼이 아침을 따라내려오리라
외로운 직립의 투박한 을숙도 뿌리 곁으로

 


 

* 편지 - 박라연

갑자기
서로를 모른다고 해야 할 때
예전에 무심히 드린 편지
편지 쓸 때의 내 고운 생각들이
손때 묻은 서랍에서 책갈피에서
샛노란 유채꽃으로 피어나
그대를 흔들어 깨울
튼튼한 아이 하나 낳아주고 떠나온 양
마음 든든하다고 그렇다고
쓸쓸한 퇴근길 육교 위에서
새하얀 눈송이로 펄럭이는
편지

 


 

* 누에 - 박라연

가당찮은, 참
골목길 잡상인의 리어카에 오글오글
한많은 번데기로 뒹굴지만
새하얀 내 영혼의 집은
수만 갈래의 비단실을 뽑아내고
뽑아내고......
아직도 기다리며 사는 이웃들
이웃들의 추운 살갗을 위하여
네 고운 색실은 즐겁게 쓰러진다
이 시대의 비단실을 뽑아내겠다면서
오늘도 꾸물꾸물 모여
새파란 이념의 뽕잎을 먹는 누에들
즐겁게 쓰러질 자유가
지금은 쓰라리다
 




* 옥평리 - 박라연

토요일은 언제나
옥평리에 갔다 다리를
건너 철길 논길을 지나서
수수밭 언덕길 그곳에 가면
전학 간 순이도 좋았지만
올벼쌀 메뚜기 홍시감이 좋았다
혼자서 가는 길 쓸쓸해지면
눈감고 어디쯤 갈 수 있나 시험하다가
큰 다리 아래 숨어 흐르는 슬픔 속으로
뚝, 떨어져 눕던 아득한 그날
우체부 아저씨의 자전거에 실려왔지만
그때 나는 이미 젖어서
운동화도 머리카락도 흠뻑 젖어서
지금도 툭하면 젖어서 산다
옥평리 그 길을 다시 걸을 때
속눈썹에 감겨오는 내 살아온 날의
오솔길 철길 큰 다리 길
길모퉁이에 남아 있는 쓸쓸한 그림자
제 그림자를 밟고 떠나가는
눈뜨고 가는 길도 안 보이는 우리들
우리들 살아서 사는 길

 
 


 

* 늦깍이 - 박라연

햇빛만 따라다녔다
비탈길 오르던 아픈 스무 살
함께 자란 친구들이 지성인의 손수건을 흔들며
흔들며 떠나갈 때
빈 교정에 남아 우리는
누군가 흘린 꿈 조각을 줍는다
희고 넓은 이마로 웃고 있는
잘 자란 약력들이
눈송이처럼 추운 눈동자 속으로 녹아내리는 밤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
창문 너머 그믐달이 손잡아 끌지만
귀 붉히며 돌아서는 노란 은행잎
떨며 흔들린다 오를 수 없는 나무 아래서
잔뿌리며 사랑이며 한세상 헝클어진 넝쿨이며
늦게 늦게 우리는 자라
허물도 그만큼 늦게 벗는다
 






* 메타세퀴이아나무 아래서 - 박라연

메타세퀴이아 그대는
누구의 혼인가
내 몸의 뼈들도 그대처럼
곧게곧게 자라서
뼈대 있는 아이를 낳고 싶다

헤어질 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빈 가지를 흔든다
주고 싶은 무엇을 찾아내기 위하여
슬픔을 흔들어 털어버리기 위해서

못다한 사랑은 함부로
아무에게나 툭툭 잎이 되어 푸르고
누구든 썩은 삭정이로 울다가
혼자서 영혼의 솔기를 깁는다

내가 내 눈물로
한 그루 메타세퀴이아가 되었을 때
쓸쓸히 돌아서는 뒷모습
빗물처럼 떨어지는 슬픔을 보았지만
달려가 그대의 잎이 되고 싶지만
나누지 않아도 함께 흐르는 피
따뜻한 피가 되어 흐른다
 
 
 






* 작은 물방울의 노래 1 - 박라연

봄 언덕 달빛 나무 숲 흔드는 초록의 소리
예전엔 누군가 떨군 그리움인 줄 알았다
시방은 바위 같은 꿈
하늘에서 잠시 만나 서로의 눈물 속에 머물다가
해가 뜨면 헤어지는 찬란한 이별
우리 무엇이 되어 흐르면
뼈도 없는 그대 살 속에 스밀 수 있을까.
 
 




* 지리산 고로쇠나무 - 박라연

1
오얏골에 봄이 오면
사람들의 죄 씻어주기 위하여
일제히 눈뜨고 팔 벌리는
늙은 고로쇠나무
아무런 생각 없이 예수가 되어
물관부의 오른쪽과 왼쪽에
칼을 꽃고 피 흘린다
우리 아픈 점액질은 밤마다
산을 물어뜯고
더 이상 흘릴 피가 없어서
한철 내내 속이 쓰린 나무들
전생애의 옷을 벗는다
벗어버린 고로쇠나무 몇몇 씨앗들이
빛을 향해 뻗쳐오르고
오르던 푸른 팔들이
하늘 끝에 감전됐다 싸늘히
슬픈 눈빛으로 빛나던 수액들은 지금
흐르고 싶다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반야봉 낮은 기슭으로

2
시퍼렇게 잘려진 산맥 허리마다
깊어가는 죄만큼 슬픔만큼
발목에 붕대를 감고 서서 기다리는
지리산 고로쇠나무 달궁마을에서
산안개 내려와 투박한
그대 어깨를 주무를 때
눈물 흐른다 흐르는 눈물 밟으며
밤새워 걸어가면 만날 수 있을까
떠나온 산 안 잊히는 얼굴들을

 
 


 

* 왕오천축국전 - 박라연

男裝을 하고
세상을 한번 건너고 싶다
그때 그 병원에서 나를 잃었다고
차라리 그렇게 생각해줄 수 있다면
팔도강산 돼지우리에 세상 그리운 쓸쓸한 풀밭에
여장(旅裝)을 풀고
온갖 냄새를 한번 맡아보고 싶다
왕오천축국전은 아니라도 돌아오는 내
머리카락이 다른 슬픔으로 흩날릴 수 있다면
내 시가 세상 건너는 자세를
흉내라도 낼 수 있다면
너무 어려서 잃어버렸거나
너무 진지해서 갈 수 없었넌 그 길을
찾아 헤매보고 싶다
내 영혼 풀리고 풀리어서
되감아질 수 없는 시궁창에 이르러서야
만나게 될 스승 한 분 계실 것 같아
그 병원에 나를 두고
길 떠나고 싶다




* 생밤 까주는 사람(서평)

시를 만나는 기쁨이 무엇인가를 잘 가르쳐주고 있는 박라연 시인의 두번째 시집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길 하나 내고 싶다 따뜻한
마을로 가는 길을' - 숨은 마을을 찾아서, 일부

이라는 시구에서 알 수 있듯이, '따뜻한/마을'이다. 그 마을은 비록 숨어 있어서 화자에게 잘 보이지 않고, 그리하여 그 마을로 가는 길은 '너무 멀고 껌껌'하지만 시의 화자는 그곳으로의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그 마을에는 늘 한기를 느끼는 화자의 심신을 따뜻하게 해줄 온기가 충만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화자를 따뜻하게 포용할 수 있는 그 마을은 어떤 마을일까. 마침 이런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시가 있다. '평망 마을'이 그것이다. 물론 이 시는 그 마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도 묘사하지도 않는지라 그 마을의 정황과 경관을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시에서 우리는 '긴 머리'의 화자가 '가고 싶은 곳'이 '평망 마을'이라는 것은 뚜렷하게 읽을 수 있다. 바로 그런 마을에서 화자는 '아침엔 이슬 털고 일어나 밥을 짓고/저녁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침실에서라도/기꺼이 요염한 꽃이'되고 싶어한다. 이는 화자의 꿈이 '사랑밖에 모르는 작은 아녀자'가 되는 것임을 잘 암시할 터이다. 즉 박라연의 시가 일차적 목표로 설정한 공간은, 얼핏보면, 한 여자의 한 남자에 대한 순결하고 따뜻한 사랑이 구현되는 곳이다. '보랏빛 콩','아기 수련'.'민들레'.'도라지'.'제비꽃'같이 다분히 남녀간의 맑고 따사로운 사랑을 연상시키는 다정다감한 식물들이 그 공간에 '한데 얼려 나부끼고'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이런 진술은 한층 더 분명해진다. 그러나 박라연의 시의 화자가 갈구하는 사랑은 남녀의 청초한 사랑이란 좁은 틀 속에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사랑은, 많은 경우, 특정한 인물만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변에 있는 불특정 다수를 조준하고 있다. 이 무한한 사랑을 김주연은 '이웃 사랑'이라고 적절히 지적한 바 있는데, 그런 사랑은 시인의 종교적 혹은 정치적 안목에서 유래한 인위적 사랑이 아니라 시인의 천진한 천성에서 자연스레 폭발하는 사랑이다. 그러니까 시인의 사랑은 무슨 은밀한 의도를 품고 있는 선택적이고 계획적인 사랑과 무관한, 무구한 심성에서 절로 분출되는 천연의 순백한 사랑이며 그런만큼 그것은 강렬한 사랑의 양상을 띤다. 이는 시인의 사랑의 폭과 깊이가 예사롭지 않음을 뜻한다. 확실히 박라연은 사랑이 퇴색된 황량한 시대에 넓고 깊은 사랑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시인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의 화자가 지향하는 마을이 어째서 사랑의 마을인가를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일부) - 김태현
 
 
* 박라연

51년 전남 보성생
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생밤 까주는 사람> 산문집으로는 <춤추는 남자, 시쓰는 여자>
출처 : 迎瑞堂
글쓴이 : 素夏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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