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뱀을/전동균
이제 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에요
도둑들, 뚜쟁이들, 사기꾼들은 나를 친구라고 불러요
마른 나뭇잎의 선명한 무늬를 갖고 싶었죠
하루에 한 번쯤은 거짓 없는 눈으로
하늘을 열고 싶었어요
알아요, 알고 있어요, 나는 버려졌고
버려짐으로써 해방되었다는 것을
내가 가야할 곳은 이미 사라졌거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엄마 장례식날 고무줄 놀이하는 아이처럼 살래요
햇볕 한 줌 못 뿌리면서
꽃 한 송이 못 피우면서
어떻게 사랑을 노래할 수 있겠어요
내 안에 담긴 것, 내 곁에 있는 게 무엇인지
말하지 마세요 제발
거미줄에 걸린 벌레의 파닥거림,
아무리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속옷의 얼룩을 보는 게 나의 기쁨이니
어느새 뱀을 좋아하게 되었으니
-《현대시학》 2020년 5-6월호
전동균
경북 경주 출생. 1986년 《소설문학》 신인상 시 부문 당선.
시집 『오래 비어 있는 길』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거룩한 허기』
『우리처럼 낯선』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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