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어느새 뱀을/전동균

시치 2020. 7. 16. 15:15

 

어느새 뱀을/전동균

 

 

이제 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에요

도둑들, 뚜쟁이들, 사기꾼들은 나를 친구라고 불러요

 

마른 나뭇잎의 선명한 무늬를 갖고 싶었죠

하루에 한 번쯤은 거짓 없는 눈으로

하늘을 열고 싶었어요

 

알아요, 알고 있어요, 나는 버려졌고

버려짐으로써 해방되었다는 것을

내가 가야할 곳은 이미 사라졌거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엄마 장례식날 고무줄 놀이하는 아이처럼 살래요

햇볕 한 줌 못 뿌리면서

꽃 한 송이 못 피우면서

어떻게 사랑을 노래할 수 있겠어요

 

내 안에 담긴 것, 내 곁에 있는 게 무엇인지

말하지 마세요 제발

 

거미줄에 걸린 벌레의 파닥거림,

아무리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속옷의 얼룩을 보는 게 나의 기쁨이니

어느새 뱀을 좋아하게 되었으니

 

 

-현대시학20205-6월호

 

전동균

경북 경주 출생. 1986소설문학신인상 시 부문 당선.

시집 오래 비어 있는 길』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거룩한 허기

우리처럼 낯선』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