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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시치 2024. 1. 10. 20:44

 

감정 일기/송상목

매일 아침 여덟 시면 슬픔을 마주친다

그와 인사하고 같은 전철을 타고

버스에 올랐다 내리고

빌딩을 오르고 나면

정오가 된다

정오는 기쁨을 만날 시간

나는 잠시 슬픔과 작별하고

수저를 든다 기쁨이

키스해온다

지저분한 기쁨이 기분 나쁘지 않다

키스는 짧고

오후는 길다 나는 다시 슬픔을 본다

슬픔은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다 매일 같이 다니기 힘든 듯이

나는 빌딩을 쌓으며 슬픔의 눈치를 살핀다

슬픔은 슬퍼하면서도 빌딩 쌓기를 멈추지 않는다

아무래도 슬픔이 쌓아가는 것은 빌딩만이 아닌 것 같다

밤은 빌딩을 내려오는 때

슬픔이 가장 먼저 달아난다

나는 기쁨을 볼 생각으로 가득해진다

기쁨은 집에 있다

마구 꼬리를 흔들며 내게 달려든다

기쁨은 꽤 나이 들어있고

눈을 끔뻑거린다 느린 속도로

슬픔이 슬쩍슬쩍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심사평:묵직한 여운삶의 음영 새긴 조형력 돋보여

​​

신춘문예는 응모자들의 연령대가 다양하고 작품들 사이의 편차도 큰 편입니다. 감상적이고 상투적인 서정시들이나 추상적 사변을 직설적으로 나열한 시들이 가장 먼저 걸러졌습니다. 자연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나 가족사를 둘러싼 시편들도 절실하기는 하지만 익숙하다는 인상을 떨쳐내기는 어려웠습니다. 소재와 주제의 독창성, 개성적 화법과 표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검토작들을 좁혀나간 끝에 다음 세 분의 작품이 남았습니다.

황주현의 꼬리라는 과거4편은 어떤 형상이나 현상을 정밀하게 관찰하고 그로부터 삶의 구조와 원리를 이끌어내는 시편들입니다. ‘무게의 중심’ ‘삐딱한 수평’ ‘꼬리라는 말’ ‘여름의 회로’ ‘별의 동선등 힘의 역학관계를 새롭게 읽어내고 배치하는 사유가 흥미롭고 정밀합니다. 다만, 발상을 풀어내는 방식과 길이가 비슷해 일정한 틀에 갇혀 있다는 인상과 설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준영의 액체의 신4편은 전체적으로 서사적 구성과 산문적 호흡을 취하고 있지만, 시적 긴장감을 잃지 않고 리드미컬한 언어로 은유적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시편들입니다. 특히, 세계의 질서나 사회적 시스템에서 배제된 인물들이 되새김질하는 고통의 감각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비약이나 어색한 표현, 불명료한 부분들이 있어서 전달력이 다소 떨어지는 듯했습니다.

송상목의 감정 일기4편은 간결하고 투명한 언어로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탐구하고 펼쳐 보여주는 시편들입니다. 소품에 가까운 시들이 섞여 있긴 했지만, 다섯 편 모두 군더더기 없이 인상적인 내면풍경을 완성해내는 솜씨나 감각을 지니고 있어서 기본기가 충실하다는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당선작으로 뽑은 감정 일기역시 천진하고 해맑은 표정 속에 삶의 음영을 풍부하게 새겨넣는 조형력이 돋보입니다. 감정을 인간의 심리적 부산물이 아니라 독립된 행위의 주체로 다루는 태도가 신선했고, 무심한 듯 건네는 말들에 묵직한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러한 섬세한 감정 연구가 앞으로 더 큰 세계에 대한 탐구와 치열한 수행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심사위원: 나희덕(시인·서울과기대 문예창작과 교수)

당선 소감:"지구력 갖춰 좋은 결실위안의 시 쓸터"

 

마지막 투고였다. 송부하면서 직감했다. 왠지 될 것 같다고.

진짜로 됐다.

올해만 이십여 곳은 되는 신문사에 신춘문예 작품 투고를 했다. 이만하면 됐다. 하고 쉬려 했다가 여전히 시가 쓰고 싶어서 계속 썼다. 그러다 새로이 다섯 편이 모였는데, 안 보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투고를 또 한 것이었다. 그게 당선되었다.

짙게 눌어붙은 열정이 읽혔기에, 그를 높이 사 졸고를 집어 들어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당선 소감을 쓰며 백여 일간 쓴 시들을 돌아보았다. 일상에 뿌리 박은 것이 많았다. 내가 이렇게 소박한 사람이었나. 놀랄 정도였다. 이어서 든 생각이 하나 있었다. 나와 우리가 오늘날 필요로 하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 -현실 논리에 치여 자신을 마모시켜 가며 살아가는 사람들, 내 눈은 그런 이들의 삶과 감정에 향해 있었다.

앞으로 얼마간은 그들과 같이 아파하고, 슬퍼하고, 웃다가 절망하고, 절망에서 끝마치지는 않는 시를 쓰게 될 것 같다.

그리하여 첫 시집은 위로의 시집이 되지 않을까 한다. 지금 여기에서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이들을 위한.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위안을 가져다줄 시.

사는 동안 되도록 많은 사람을 끌어안아 주고 싶다. 타자가 나의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순간은 언제나 감격스럽다.

처음은 우리를 보듬는 것으로, 이후는 바깥에 놓인 이들을 끌어안는 것으로. 그게 현시점의 목표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넓어지고 다양해지면 좋겠다. 지금 우리는 너무 좁아서 숨이 막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가능성에도 눈을 돌려보는 게 좋지 않을까. 각박해지지 않고, 진정한 나를 없애는 삶에 매몰되지도 않고.

결코 홀로 살 수 없는 나는 감사드릴 분이 많다.

우선 좋게 봐주신 심사위원께 감사드립니다. 근면히 쓰겠습니다.

한 학기 동안 시를 알려주신 박주택 교수님께도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소설만 읽던 놈인데, 처음으로 시의 길에 들어서고 난 뒤 시에 미쳐서 매일 쓰고 또 쓰다 보니 덜컥 뽑혀 버렸습니다.

여기 이름을 나열하지 못한 교수님들, 그리고 초중고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학교에서 배워온 내용과 전달해주신 가치관이 톡톡히 발해 시 세계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함께 달려준 경희랑달리기 크루원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지쳐도 끝까지 가는 지구력을 갖추어 좋은 결실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다음 학기에도 맛있게 먹고, 잘 자고, 몇 킬로미터고 같이 달립시다.

친구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혹시 나 말하나 싶으면, 그래요, 너 맞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우리 가족. 누나와 형, 그리고 매일 고생하시는 우리 어머니께 감사드립니다. 미흡한 제게 특별하거나 위대한 면이 있다면 그건 모두 어머니에게서 온 것일 것입니다.

여태 지나온 슬픔들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모리()라는 이름을 가졌던 슬픔에게는 미안하다는 말도 꼭 하고 싶습니다.

이번 당선의 영광 전부를 어머니께 돌립니다.

 

송상목: 충남 당진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