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모음

장순하 시조모음

시치 2006. 10. 4. 21:02
장순하 시조집[이삭줍기] ▶<해설: 이지엽>
게시물 포워드
작성일: 2005/01/16, 07:52:21
작성자: 샘지기 (http://sijosam.com

*유방(乳房)의 장 외 20편*

                                          장 순 하


*유방(乳房)의 장*
  -백색부(白色賦).1

난 몰라,
모시 앞섶 풀이 세어 그렇지

백련(白蓮) 꽃봉오리
산딸기도 하나 둘씩

상그레 웃음 벙그는
소리 없는 개가(凱歌)!

불길을 딛고 서서
옥으로 견딘 순결

모진 가뭄에도
촉촉이 이슬 맺어

요뇨(  )히 시내 흐르는
내일에의 동산아!

                          (인용은 첫째 수)


*행주치마의 장*

뉘 있어 가난하다 하랴
넘치는 인정과 슬기

사랑은 자주 고름
나폴대는 허리 물려

질끈동 다스렸어라
아! 눈부신 행주치마!

                          (인용된 부분은 끝 수)


*소복의 장*

소꼽 동무 같던 新郞
철들자 가버린 뒤

어이없이 흰나빈
비녀 끝에 와서 앉고

애잔히 박꽃은 피어
날은 이미 저물었다.

다 이르지 못할 사연
말은 해 무엇하랴

잎 진 가지 끝에
남은 감 익을 무렵

새빨간 고추를 널어
지붕 위를 덮었다.

                    (인용된 부분으로 2, 3수)


*묵계(默契)*

뭔가 있지 있지 싶은 우수절(雨水節) 이른 아침
신선한 한 젊은이 모자 벗어 손에 들고
한 발짝 물러선 곳에 다수굿한 새색시.

그들은 의논스레 날 넌지시 건너다보고
나는 벌써 요량한 듯 가벼이 점두(點頭)했다.
그렇지, 까치저고릿적 그 전부터의 친구들.

하여, 내 하늘 한 귀에 둥지 틀고
두세 마리 새끼 쳐서 요람 위에 얹어두고
신접난 젊 것들은 죽지 쉴 새 없구나.

어제 저 어린것들 재 너머로 날려보내고
저것들도 머리 세어 제 곳으로 돌아가면
난 다시 대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겠지.


*의식(意識)*

이런 날에는 양지바른 돌담 밑에서 골마리 까고 앉아 이 사냥이나 하는 게 제격이다.
이란 놈은 나에게 면류관 씌워 먼지 앉은 훈민정음을 뒤적이게 하다가, 노래 부르며 황룡사(皇龍寺) 모퉁이 돌아가는 처용(處容) 형님이 되게 하다가, 달 잠긴 여울에 나가 금빛 목욕하고 감중련(坎中連)의 금동여래(金銅如來)가 되게 하는데, 그 좋은 것들이 막 되어 가는데,
방정맞은 벼룩 한 마리 톡 튀어 몽땅 잡쳐 놓는다.

벼룩은 날 끌고 가 삼경(三更) 치는 종루(鐘樓) 위에 목매달아 놓았다가,
입술 붉은 춘향아씨 가슴 위에 엎어 놓고 십장(十杖)을 치다가, 시청 청소차 태워 변소도 치게 하다가, 그 아슬아슬한 것들 다 시키다가
과녁 앞, 눈 가려 세우고 시위를 당긴다.

여기는 동대문 시장 생선전인가? 서울역 삼등 대합실인가?
세종대왕이 이놈 한다. 처용이가 탈바가지 속에서 흘겨본다. 금동여래가 미소한다. 총구(銃口)에서는 초연(硝煙)이 피어난다. 원, 투, 드리, 포우, 파이브, 식스, 세븐, 에이트, 나인, 나인을 세어놓고
놈들은 한망적게도 마슬이나 갔는가?


*지쳐 누운 길아*

어디에나 길은 있고
어디에도 길은 없나니

노루와 까막까치
제 길을 열고 가듯

우리는 우리의 길을
헤쳐가야 한다

땀땀이 실밥 뜨듯
잇고 끊긴 오솔길

신발 끈 고쳐 매며
한 굽이는 왔다마는
호오호 밤부엉이가
어둠을 재촉한다

날 따라 다니느라
지쳐 길게 누운 길아

한심한 눈을 하고
한숨 몰아 쉬는 길아

십자가 건널목에는
신호등도 없어라


*징검다리*

바람이 흘리고 간 시영내 징검다리
구름 흐르는 물에 사변(思辨)의 발 담근 채
반백(斑白)의 분별을 이고
고즈넉이 앉았다.

점도 선도 아닌 논리 밖의 저 실존
한낱 돌멩이도 놓일 데 놓이고 보면
시 한 수 허자(虛字)랑 섞여
관주(貫珠) 비점(批點) 되는 그것.

어느 세월이라 갖신 꽃신 밟았으리
나무꾼 신메마니 짚신짝도 뜸하거니
한물에 쓸리고 나면
다시 놓을 뉘 있을지.

                              (인용은 둘째 수)


*대파국(大破局) 앞에서*

이제 지구는 너무 늙어
제 몸조차 못 가눈다

박살난 건물들은
해골처럼 앙상하고

철골은 엉크러져서
배배 틀며 춤을 춘다.

생명이란 생명들을
말끔히 거둔 산야

물기란 물기들을
남김없이 말린 바다

불 꺼진 등대 밑에서
황포돛만 펄럭인다.

비수 품은 조각달이
싸느라이 비치는데

소슬한 무주 공산
울부짖는 원귀 소리

대파국 한 발 앞에서
소름 끼치는 이 정적.

                            (인용은 1,2 수)


*지구 돌리기*

느릿한 지구가 또
반의 반 바퀴 돌았구나

나무들은 몸을 흔들어
한 꺼풀씩 옷을 벗는다

얼굴도 붉히지 않고
알몸이 되어 간다.

오동나무 후박나무
쟁반만한 잎도 지고

가시 돋친 아카시아
엄나무 잎도 지고

자줏빛 단풍잎 지고
노란 은행잎도 진다.

뿌리로 돌아가려고
잎은 지는 것이다

새싹 피울 자리 마련해
잎은 지는 것이다

지구를 돌리는 역사(役事)에
지레 괴는 일이다.


*지리산 하늘*

빨간 모자 파란 배낭
춤추는 봉우리들

피아골 아픈 상처
다만 야호 소리뿐

천왕봉 지붕 위에는
앙장(仰帳) 같은 한 장 구름


*첫사랑 경이*

흘금 흘금 훔쳐보고
자싯자싯 뜯어보고

뜨나 감으나
내 눈 속은
온통 패랭이 꽃밭이고

꿈꾸는
먼 산의 아지랑이
나울나울 나비였지.


*입원*

병실 침대 의사 간호사
환자복 세 끼 밥

약봉지 주사기
링겔병 타구 변기

내 의지 몽땅 앗아간
이 편의와 이 친절.


*신선한 불안*

"저예요"가 익은 귀에
"저거든요"라고 한다.

한 음절이 늘어난 사정
요모조모 헤아린다

손덤벙 발덤벙하는 이 신선한 불안감.


*온통 수수께끼*

10.26은 반역이고
12.12는 반란이다

DJP가 손잡고
YS 발목 잡는다

세도(勢道)가 PK로 가니
TK는 찬밥이래.


*유행*

야구 모자 뒤로 쓰고
배(舟)만한 신발 타고
거지 같은 힙합바지
구둣발에 싸서 신고
배꼽티 손 닾은 소매
틀리는 게 맞는 것.


*포신(砲身) 끝에 앉은 고추잠자리*

유신 헌법(維新憲法) 공포된 날
궁정동(宮井洞)을 지났습니다

집채 만한 중(重)탱크
아름드리 포신 끝에

한 마리
고추잠자리
앉아 쉬고
있데요.


*합창(合唱)*

별빛은 보라치고

가가 앙앙 가가 앙앙 수수 울울 레레 에에
가가 앙앙 가가 앙앙 수수 울울 레레 에에.


*고무신*

눈보라 비껴 나는
천―군―가―도(全郡街道)

퍼뜩 차창(車窓)으로 스쳐가는 인정(人情)아!

외딴집 섬돌에 놓인
-------------
      하나     
        둘
    세 켤레
-------------

*뜨락에서*

삽사리 선하품에 늘어진 유월 한낮

뒷짐진 오리새끼 장죽 물고 거닐다가
사랑 샌님 큰기침에 기절초풍 간 떨어져 고꾸라지고 엎어지고 천방지축 뛰는데

장닭은 고개 비틀고 키득키득 웃었다.


*우주여행*

집우(宇) 집주(宙)라 하니
우주란 곧 집이렷다

우(宇)는 공간이니 뜨락 현관 거실 침실 다용도실이라면
주(宙)는 시간이니 먹고 자고 일하기 사랑하기

이웃집 마을 가는 게
우주여행 아닌가.


*바람아, 늬 날 어쩔래*

내가 하릴없이 부채질이나 하면서 한망쩍게 앉아
있는지, 아니면 잘 익은 참외라도 골라 따고 있는
지 살피는 눈치다.

바람아 네 날 예 데려다 놓고
이제 다시 뭘 어쩔래.


⊙장순하 시조집[이삭줍기], 서울 : 태학사, 2000 ; (해설▶ 생명.의식.길의 존재론적 탐구 -장순하의 시세계 -이지엽) 인용 작품


▣해설

                    생명.의식.길의 존재론적 탐구
                            -장순하의 시세계-

                                                                  이 지 엽

(해설 一部)


장순하의 시 세계는 생명의 존엄과 깨달음의 표피와 내면을 거쳐 '길'의 존재론적 탐구의 정신을 보여준 것이다.

                      -⊙장순하 시조집[이삭줍기], 서울 : 태학사, 2000

'시조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재삼 시조모음  (0) 2006.10.04
윤금초 시조모음  (0) 2006.10.04
조 운 시조모음  (0) 2006.10.04
유재영 시조모음  (0) 2006.10.04
김정희 시조모음  (0) 2006.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