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관련

청원행사선사(靑原行思禪師)와 정거사(淨居寺)

시치 2019. 12. 3. 01:12



靑原行思


청원행사선사(靑原行思禪師)와 정거사(淨居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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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화선사를 찾아가는 길목, 전촌진(田村鎭)의 마을길은 좁고 바로 시장 앞이어서 버스가 빠져나오는데 한참이나 애를 먹었었지만, 마조스님의 홍규도량을 참배하고 길안시(吉安市) 청원산(靑原山) 풍경구에 있는 정거사(淨居寺)로 가는 길은 힘들지 않았다. 16일 오후 2시경 모택동의 근거지였던 장군현(將軍縣)을 거쳐 관조진의 태화대교를 통과하여 태정(泰井)고속도로에 들어설 때까지 평강(平江)과 평화스러운 들녘, 시골마을의 풍경을 차창 너머로 바라보면서, 20여 년 전 비포장도로를 따라 힘들고 어려운 순례길을 밟으셨던 선원장스님의 당시 모습을 생각해 보며, 이번 선종사찰 참배를 위한 길이 너무 넓고 편안하여 미안한 마음과 함께 감사함으로 가득 차 오름을 느꼈다.

정거사(淨居寺)는 일명 범천사(梵天寺)라고도 불리는데, 강서성 길안시 동남 5키로미터 지점의 청원산 풍경구 안에 위치해 있다. 사찰 전체가 고목으로 우거져 있으며 양 옆에 코끼리봉과 사자봉을 거느리고 있는 산세 가운데에 도량이 자리 잡아 아름다운 도량풍광을 보여준다. 청원산(靑原山)이라 쓰여 있는 산문을 들어서면 “조계종파(曹溪宗派)” 글자가 박힌 받침대 위에 세워진 깃대 끝에 “청원범찰(靑原梵刹)”이라 쓴 깃발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정거사는 당조 경룡3년(709년)에 창건된 사찰로서 육조혜능스님의 2대 제자 중 한 분이며 중국 선종7조라 불리는 청원행사(靑原行思:?-741)스님의 수행도량이다. 청원스님의 문하는 중국 선종 5가 칠종(五家七宗) 가운데 3개 종파인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과 법안종(法眼宗)을 일으키고 완성시켜 중국 불교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청원계보를 보면,

조동종은 석두희천(石頭希遷)→약산유엄(藥山惟儼)→운암담성(雲巖曇晟)→동산양개(洞山良价)→조산본적(曹山本寂),

운문종은 석두희천→천황도오(天皇道悟)→용담숭신(龍潭崇信)→덕산선감(德山宣鑑)→설봉의존(雪峯義存)→운문문언(雲門文偃),

법안종은 현사사비(玄沙師備)→나한계침(羅漢桂琛)→법안문익(法眼文益)이다.

정거사는 사찰 창건 당시부터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사찰을 둘러싸고 있는 붉은 담장과 푸른색에 붉은색이 섞인 듯한 기와지붕의 특이한 분위기는 울창한 나무들의 싱그러움과 함께 경건한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다. 그리고 사방으로 흐르는 개울 위의 세 개의 돌다리‘
금강불괴교(金剛不壞橋)’를 건너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길이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역시 당대 이후 많은 문인 묵객들이 꼭 찾아 선시를 짓고 그림으로 정거사를 감상하는 곳 가운데 대표적인 장소라고 한다.


 



돌다리를 건너 대웅보전에 들어가 부처님께 삼배를 올린다. 법당 안에 스님들이 예불을 올리고 있어 참배를 마치고, 바로 대웅전 뒤에 있는 7조탑(七祖塔)으로 향한다. 전각의 천장까지 닿을 정도의 7면 7층탑이 자리하고 있고 그 옆에 청원스님의 황금색 좌상이 빛을 발하고 계신다. 스님의 좌상과 7조탑의 1층부터 맨 위층까지 탑 각면의 감실에 그려놓은 초조 달마대사, 2조 혜가대사, 3조 승찬대사, 4조 도신대사, 5조 홍인대사, 6조 혜능대사의 진영와 조동종 42명의 조사급 선사들의 초상에 합장하여 예를 올리고‘7조 홍제선사(七祖弘濟禪師)’청원스님께 머리를 숙여 선종의 융성을 이루게 해주신 스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린다.


7조탑 탑전


칠조탑



7조 홍제(弘濟)선사와 선종청원파종(禪宗靑原派宗)



청원행사스님은 남악회양(南嶽懷讓)스님과 함께 육조혜능대사의 2대 제자로서 남종선의 양대 산맥을 이루신 분이다. 길주(吉州) 안성(安城) 사람으로 속성은 유(劉)씨였으며 어려서 출가하였다. 육조스님의 상수(上首)제자로 법을 잇는 계기가 된 “청원계급(靑原階級)”이란 일화가 생각난다. 

나중에 육조스님의 법석이 번성하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참례하고 말씀을 여쭈었다. “마땅히 어떻게 공부해야 계급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육조스님이 도리어 물었다. “그대는 일찍이 어떻게 공부했는가?” “성인의 법마저도 짓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계급에 떨어졌는가?” “성인의 법마저도 짓지 않거늘 무슨 계급이 있겠습니까?” 이 대답을 들은 육조스님께서는 매우 기특하게 여겨 회중(會中)에 무리가 아무리 많아도 언제나 스님을 상수(上首)로 삼았다.(禪門拈頌)

당조 개원년인 713년, 육조스님께서 입적하시기 얼마 전 어느 날 육조스님이 청원스님에게 법을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로부터 가사의발을 스승과 제자 사이에 전법의 증거물로 하였으니, 가사의발은 믿음의 표시였고 법은 마음으로 인가한 것이다. 나는 이제 깨달은 사람을 얻었으니, 어찌 뒷사람이 믿지 않을까 걱정하겠는가. 내가 옷을 가사의발을 전해 받은 뒤로 오늘까지 이렇듯 여러 번 환란을 당했는데 하물며 후대의 자손들이야 어떠하겠는가. 반드시 많은 싸움이 일어나리니, 가사의발은 산문에 남겨두고 그대는 혼자 힘으로 다른 곳에 도량을 선정하고 교화하여 선종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하라.”

청원스님은 육조스님의 법을 받고 그 말씀에 따라 길주 청원산 정거사에 머물면서 선종의 현풍을 드날렸다. 그러므로 그 호를 청원(靑原)이라 하고, 세상 사람들은 그 문도를 청원하(靑原下)라 불렀다. 

육조스님이 열반에 들려하실 때
석두희천(石頭希遷;700-790)스님이 여쭈었다. “스승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는 누구에게 의지하오리까?”육조스님께서 대답하셨다. “생각 사(思)를 찾아가라.” 육조스님께서 입적하신 뒤에 석두스님은 항상 조용한 곳에 단정하게 앉아 죽은 듯이 고요한 모습을 보이니, 제일좌(第一座)가 물었다. “그대의 스승은 이미 가셨는데 공연히 앉아서 무엇을 하느냐? “나에게 생각 사(思)를 찾으라고 유언하셨습니다.”“그대의 사형에 행사(行思)라는 이가 있는데, 지금 길주에 살고 있다. 그대의 인연은 거기에 있다. 조사는 바로 말씀하셨거늘 그대 스스로 몰랐을 뿐이다.”(傳燈錄)

육조혜능선사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
남악회양스님과 청원행사스님이 남종선의 호남, 강서의 양대 산맥이 되었고, 그 밑에서 마조도일, 석두희천스님이 나와서 선풍을 크게 떨치며, 이어 선종유파들이 말하는“일화개오엽(一華開五葉)”이라 일컫는 임제, 위앙, 조동, 운문, 법안의 오가선(五家禪)이 펼쳐지게 된다. 특히 청원스님의 문하에서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 등 세 종파가 나와 후세 사람들이 이 세 개 종파를 선종청원파종(禪宗靑原派宗)라 하였다.



청원행사스님은 당조개원 28년(741년) 11월13일 법당에 좌정하신 채 67세를 일기로 입적하셨으며, 비로각 오른쪽 뒷산에 안장하고 칠조탑을 건립하였다. 이듬해 희종이 스님에게“홍제(弘濟)선사”라는 호를 하사하고, 당현종은“칙건7조 홍제선사귀진지탑(勅建七祖 弘濟禪師歸眞之塔)”이라는 글을 내렸다.


정거사 칠조탑에서 7조 청원스님의 법음을 듣고 물러나와
위태전(韋馱殿)을 거쳐 불학원(佛學院)의 건물을 바라본다.‘청원산정거사 경구전경도(靑原山淨居寺 景區全景圖)’가 세워져 있는 곳까지 천천히 걸어 나오며, 큰 나무 숲에 둘러싸인 정거사의 풍광을 바라보며 가슴에 환희와 시원함을 느꼈다. 육조스님의 법력이 중국 강남땅 깊은 산록에까지 거의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음을 확인하고, 이곳 청원산의 불음이 세세토록 끝없이 이어가기를 부처님께 발원하였다. 


 


 




유물, 유적


천왕전, 대웅전, 비로전, 탑전, 칠조탑.


조계종파(曹溪宗派 : 왕양명의 글씨)석각비, 이강의 시비, 대월교, 조어대, 탁석천, 청동 솥, 100근 무게의 철제 향로, 1000근 무게의 범종.


산문 패방의 조관(祖關 : 안진경의 글씨), 황정견의 시비, 문천상의 사찰 편액 ‘청원산(靑原山)’, 방아지의 ‘천재산중(天在山中)’석각비는 청원산 사절(四絶)이라 부르며 서법연구 사료로 높은 평가를 받는 귀중한 유물.


청원행사선사가 심은‘천년 나한송’과‘측백나무’ 2그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