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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행사선사(靑原行思禪師)와 정거사(淨居寺) -山是山 水是水

시치 2019. 12. 3. 01:15

청원행사선사(靑原行思禪師)와 정거사(淨居寺)


宋代 청원산 정거사에 주석 했던 임제종 황룡파

청원유신선사(?~1117)의 유명한 상당 법어다.


山是山 水是水


이 老僧이 30년전 아직 참선을 하기 전에는,

산을 보면 곧 산이고 물을 보면 곧 물이었다.

(看見山就是山 看見水就是水)

그 후 어진 스님을 만나 禪法을 깨치고 나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見山不是山水不是水)

더욱 정진해 불법도리를 확철대오하고 난 지금은,

그전처럼 역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依前見山只是山水只是水).


대중들이여, 이 三般見解(세가지 견해)가 서로 같은 것이냐, 각기 다른 것이냐.

만약 이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이 노승은 그에게 拜服하겠다.


청원의 "山是山 水是水"는 이 공안을 설파한 수많은 법문과 선문답들 중 가장 힛트 한 최우수작이다. 선종 최고 저명 공안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 화두는 극히 평이해 보이지만 그 도리는 결코 간단치 않다. 우선 표면상으로만 보면 마치 한바퀴를 돌아서 다시 제자리로 온 것 같은 3단계의 구조다. 그러나 제1, 제3의 두 단계는 엄청난 질적 차이를 갖는 하늘과 땅 사이다.


제1단계는 無識(Having-no Knowledge)이고, 제3단계는 無知의 知(Having no-Knowledge)다. 沒有知識의 "무식"과 일체의 분별심을 떠나 어떠한 지식 에도 안주하지 않는 반야空觀의 絶對知인 "무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제1단계는 모든 것은라고 주장하는 세속적 진리에서 감각적, 直覺的으로 사물을 대하고 산과 물을 구별하는 알음알이다. 그러나 제3단계는 모든 것이 이라는 입장에서 모순의 한복판에 있는 "자아의 부정"을 다시 부정함으로 서 극복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순해결 후의 자아의식이며 고차적 진리다.


선은 부정을 통한 無分別智를 획득한 후의 분별을 통해 진정한 개성적 존재를 긍정한다. 山水, 天地, 僧俗을 구분하는 우리의 통속적 상식은 단순한 외형적 모양을 따른 것으로 이때의 산과 물은 분별적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산과 물, 하늘과 땅은 본래의 自性的 존재고 진정한 개성적 존재다. 선은 이 같은 개성적 존재를 "本來面目"이라고도 하고 후기 선종의 자연사 상에서는 흔히 평상심, 무분별지 無心之心이라 한다.


제3단계의 "산은 산, 물은 물"은 선의 변증법적 인식론이 설파한 고차적 진리에서의 個性 인정이다. R.G.H Sui(중국인 2세 미국생물학자겸 동양철학자)는 저서 "선과 과학-無知의 知"에서 지식을 "이성의 知"와 "直覺의 知", "무지의 知"로 분류했다.

제1단계의 "산과 산"이 인간의 직각적, 이성적 알음알이에 의한 감각의 식별이라면 제3단계의 山是山은 "無知의 지"가 인정 하는 진여당체다.


청원유신이 설파한 선종 사유방식의 3단 논법과 변증법을 좀더 살펴 보자. 공안 "山是山 水是水"는 전형적인 선종의 二道相因的 사유방식이다. 二道相因은 먼저 한 가지 意義를 정립한 후 그것을 다시 깨트려 버린다. 즉 긍정을 해놓고 즉각 부정을 하는 긍정-부정이다. 두번째 단계인 "부정"은 또 다시 새로운 의의를 정립해 처음 세운 의의를 섭취해 버린다. 이렇게 돼 긍정-부정-긍정의 변증법적인 3단논법, 즉 三般見解가 전개된 다. 중국선학은 이 같은 제1, 제3단계의 往還的, 회호적 관계를 "二道相因"이라 한다.

일찌기 위진 남북조시대의 승조대사(384~413)는 "계급을 점차로 쫓아내 쫓아낼게 없게 되는데까지 이른다(階級漸遣 以至無遣也)"고 설파한 바 있다. 청원의 "山是山 水是水"에 대한 삼반견해에서 마지막 제3단계는 바로 승조가 설파한 "無遣"의 경지다. 다시 말해 계급적 차별성의 완전한 극복이다.


청원유신의 법문이 垂示하고 있는 삼반견해는 3종의 層次(차별)을 갖는 존재 에 대한 인식방법이다. 청원의 사물에 대한 전혀 다른 3가지 관조방법은 본질적이며 심도 깊은 不同의 차이점을 갖고 있다. 동서고금에 이 같은 3단계 분류법의 인식론이 제기된 예는 허다하다. 우선 <文字> "도덕편"은 "上學은 정신으로서 듣고, 中學은 마음으로 듣고, 下學은 귀로 듣는다"고 했다. <文字>의 분류에 청원의 三般見解를 대입시키면 제1단계는 하학, 제2단계는 중학, 제3단계는 上學이다. 그러니까 완전히 깨치고 난후의 "山是山 水是水"는 영적 자각을 일으킨 정신에서 보는 산과 물이다.


조문원의 <法藏碎金錄>에 "覺에는 세가지 설이 있는데 얕고 깊음에 따라 覺觸之覺, 覺悟之覺, 覺照之覺으로 나눈다" 고 했다. 첫째의 覺은 단순한 감관 작용의 인식을 따라 사물의 존재를 보고 듣고 느끼는 대로 인정하는 범부의 일상적 인식이다. 두번째는 깨달음을 성취해 일체에 명석해 사물의 실상과 허상을 능히 구분할 수 있음을 말한다. 셋째는 大覺의 경지로 무릇 性(자성, 주체적 인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 달통의 도인이 갖는 인식이다.


14세기 독일의 신비주의 종교학자인 에크하르트(1260~1327)는 지식을 상, 중, 하 3등급으로 나누어 下學은 몸을 알고, 中學은 마음을 알고, 上學은 정신을 안다고 했다. 서양철학은 또 진리를 감각의 진리, 이해의 진리, 이념의 진리 등 3종류로 구분하기도 한다. 청원유신이 계층적으로 분류한 三般見解도 기본적으로 이 같은 인식론등과 같은 맥락이다. 晁文元의 분류가 더욱 명료하고 투철하다 하겠다. 청원의 삼반견해는 조문원의 분류법을 선적인 표현으로 바꾼 것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


청원의 제1 단계 "山是山"은 최하급인 감각층에서의 존재 이해다. 다시 말해 사물의 이해를 단순한 감관적 감각에 의지하는 범부의 보편적 인식단계다.


제2단계의 "山不是山 水不是水"는 중간급 인식인데 역시 感知단계이긴 하지만 선의 안목이 트여 산과 물이 진여불성이라는 본체의 현현이거나 그 상징일뿐이라는 견해다. 제1단계 보다 한 단계 올라선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경지"는 인식주체(사람)가 객체(사물)에 대해 지성적 분해, 또는 정감적 投射작용을 일으켜 대상의 形, 質. 理등에 대해 크고 작은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말하자면 인식 대상의 본질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진 상태다. 여기서는 산과 물에 이미 사람의 性靈과 정감이 들어가 있어 물리적 의미의 자연 山水가 아니다. 공자가 말한 지혜로운 자는 물(動)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靜)을 좋아한다(智者樂水 仁者樂山)도 이 같은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 귀절도 있다. "내가 청산을 보니 아주 곱고 사랑스럽구나, 짐작컨대 청산이 나를 봐도 또한 같으리라.(我見靑山多憮媚 料靑山見我也如是)" 역시 나(주체)와 산(객체)이 互換작용을 이룬 상태다.


제3단계의 "依前見山只是山 見水只是水"는 제2단계서 한층 더 진보한 단계 로 주체와 객체간의 한계나 대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物我一體다. 여기서는 주체와 객체가 의기투합해 내가 있고 物도 있으며 또 나도 아니고 物도 아니다. 산을 보는 사람의 정신이 一念(Universal Mind)으로 뭉치고 감각적, 이성적 지성 따위는 완전히 녹아 없어져 산과 물의 相이 없다. 이것이 지혜 분별을 내던진 無知(Having no-Knoweledge)다.


제1단계 범부의 "見山是山 見水是水"는 기계적이고 본능적인 사물의 관조다. 따라서 그 인식의 심도는 원초적이고 표피적인 저급이다. 그러나 제3단계 道人의 "依前見山是山 見水是水"는 자연의 질서가 유지되는 원리와 존재계의 심연을 깨달은 참구후의 見性에서 보는 관조다. 자연의 질서란 空을 본질로 한 현상계의 전개다. 이는 無心으로서만이 감지할 수 있는 비밀이다. "부정"을 통해 현상계 저위 로 올라가 실체를 또렷이 내려다 보고 다시 현상계로 돌아와 頭頭物物의 존재 당체를 주체적으로 긍정할 수 있게 되면 바로 悟道의 경지다. 깨침을 이같이 변증법적으로 현실회향이 이루어져야 완전한 해탈이 된다. 이 같은 오도의 경지에서 현실을 긍정하되 결코 현실에 물들거나 끄달리지 않는 삶이 "平常心是道"고 "밥 먹고 물 마시는 평상의 생활(平常飮啄)"이다. 道人의 평상심시도는 외형적으론 세속 법부의 일상생활과 똑같이 밥 먹고 물을 마시지만 내용에서는 나와 밥이 분명히 구분되는 원초적 생활형태와는 전혀 다른 나와 밥이 따로히 없는 物我一體의 경지다.


지금까지의 복잡하고 난해한 설명을 쉬운 예로 비유해 보자. 가령 어른들이 어린 아이에게 저 산 너머에 마을이 있다고 하면 철부지인지라 그대로 믿는다.(제1단계) 조금 성장을 하면 어른들의 얘기에 의심을 품고 거짓말이 아닌가 하는 부정적 생각을 갖는다.(제2단계) 그러다가 어느날 여행을 가느라고 비행기를 탄다. 마침 그 비행기가 지난날 어른들이 말한 산 너머 마을위를 지난다. 그는 이때 확실히 산 너머에 마을이 있음을 확인한다. 비행기를 타고 지나면서 산 너머 마을을 두 눈으로 확인한 이후로는 다시는 산 너머에 마을이 있다는 얘기를 의심치 않는다.(제3단계)


청원의 "삼반견해"가 설파하는 무명에서 견성까지의 과정도 마치 이 같은 어린아이의 산 너머 마을 확인과 같은 것이다.


묻는다:교외별전의 선에서는 사람을 어떻게 교화하시는지요. 답한다:세계가 존재한 이래 해와 달이 서로 바뀐 예가 없느니라. 古佛 조주종심(778-897)과 한 납승의 선문답이다. 해와 달이 바뀐 예가 없다는 조주의 답은 해는 해고, 달은 달이라는 얘기다. 山是山 水是水와 같은 얘기다. "日月不曾換"은 해는 낮에, 달은 밤에 뜨고 기둥은 세로로 서고, 문턱은 가로로 눕는다는 현상계의 실상을 긍정하는 平常心을 체득하는 게 선의 요체임을 설파한 一旬다. 해는 해고 달은 달이라는 평상심시도의 달관도 청원유신이 설파한 제3단계 의 "산은 산"과 똑같은 경지다. 원래 조주고불의 선사상은 평상심시도가 그 핵심이다.


임안부의 五雲悟선사의 상당법어를 들어 보자. 월당老漢은 행하면서 行을 못보고, 앉으면서 앉음을 못보고, 옷 입을 때 옷 입음을 보지 못하고, 밥 먹을 때 밥 먹는 것을 못본다. 貧僧과 그는 한 선상위에 앉아 증면의 제각기 꿈을 주었다. 나(빈승)는 행하면 行을 보고, 앉으면 坐를 보는데 내가 옳은지 月堂이 옳은지 말해 보라. 여기서도 月堂은 제2단계의 否定的 깨침이고 五雲은 긍정와 부정을 뛰어넘은 절대긍정인 제3단계의 깨침으로 그 급수와 격이 다르다. 진정으로 깨친 자는 결코 현실세계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절대긍정으로 현실을 수용한다. 다만 그의 긍정은 현상계의 본체를 완전히 파악한 반야空觀의 긍정임을 유의하면 된다.


이은윤<중앙일보 종교전문 대기자>


‘산은 산, 물은 물’

“모든 분별 망상 거두어 낸 자리”


이제 가을단풍이 마을의 가로수까지 내려앉았다. 아침 일찍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관악산 줄기인 삼성산을 올라갔다. 거기 삼성산 칠부능선쯤에 삼막사가 자리하고 있어서 예전부터 자주 걸어 올라갔던 산길이다. 그러나 오랜만에 산길을 걷다보니 땀이 차고 다소 몸이 지친다. 약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삼막사 앞에 서서 확 트인 전경을 바라다본다. 온산이 울긋불긋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 좋다.' 작은 탄성이 터져 나온다. 산은 그렇게 가을과 함께 서 있었다.


한 때 성철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라는 법어를 내려 그 오묘한 말씀에 궁금증을 자아내며 그것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이것은 성철스님이 종정을 수락할 때 법어의 한 내용인즉 "아아! 시회대중은 아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구나"의 그 구절이다. 그것이 장안에 화제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담배 연기 희뿌연 주막에 앉아 그 말이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나름대로 자신들이 이해한 바를 펼쳐가며 소주잔을 기울이곤 했다. 거기에는 선의 깨달음이 안겨다주는 담백함과 어떤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알고 싶었다. 정말 궁금했다. 그러나 끝내는 그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이 선어는 사실 청원유신(靑原惟信) 선사의 법어에 등장한다. 더 올라가면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의『완릉록(宛陵錄)』에서 그 첫 모습을 보인다. 청원유신선사는 당나라 때 임제종 황룡파의 스님이다. 그는 많은 대중을 앞에 두고 단상에 올라 상당법어를 한다.


“노승이 삼십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다.’그 뒤 선지식을 만나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을 때‘물은 물이 아니고 산은 산이 아니었다’그러나 이제 마지막 쉴 곳인 깨달음을 얻고 보니‘산은 진정 산이고 물은 진정 물이도다.”


[0614b29] 吉州青原惟信禪師上堂。老僧三十年前未參禪時。見山是山見水是水。及至後來親見知識有箇入處。見山不是山。見水不是水。而今得箇休歇處。依然見山秖是山。見水秖是水。大眾這三般見解是同是別。有人緇素得出。許汝親見老僧。(『속전등록(續傳燈錄)』 제22권)


선사는 참선하기 이전에‘산은 산, 물은 물이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바라볼 때 산은 분명 물이 아니고 산이며, 물은 산이 아니고 물이다. 그래서 산을 보면 산이라고 말하고 물을 보면 물이라고 말한다. 나는 네가 아닌 나요, 너는 내가 아닌 너이다.


그런데 훗날 선지식을 만나 참선을 하면서 어느 정도 경지에 들게 되자(有箇入處) 물은 물이 아니고 산은 산이 아니었다. 산과 물은 서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울려 있기에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되는 연기적 관계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산이 산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산의 실체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연기적 자기 비움으로 보여진다. 그렇게 산과 물은 자기 비움으로 부정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궁극의 경지가 아니다. 거기에도 일종의 망상과 생각의 단견이 작용한 것이다. 자기 비움이라 할지라도 그 자기 비움의 부정 속에만 빠져 들면 그것도 또한 병이다.


마지막으로 이제 쉴 곳을 찾았을 때(今得箇休歇處), 다시 말해서 궁극적으로 깨달았을 때 산은 진정 산이고 물은 진정 물로 돌아와 있었다. 모든 분별 망상을 거두어내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니 산은 그대로 산이요, 물은 그대로 물이다. 거기에 어떤 생각의 군더더기가 앉을 겨를이 없다. 생각을 비워내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그 정도로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 생각과 분별망상의 끈을 베어내기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이다.


황벽선사는 이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언어와 침묵, 움직임과 고요함, 모든 소리와 색깔이 모두 깨달음이거늘 어느 곳에서 부처를 찾겠는가? 머리 위에서 머리를 찾지 말며 부리 위에서 부리를 더하지 말라. 다만 차별적인 견해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산은 산, 물은 물, 승(僧)은 승, 속은 속일 뿐이다.” (『완릉록』)


사실 이 '산은 산, 물은 물이다'라는 선어는 화두이다. 그것은 위의 상당법어에서 청원유신 선사의 이어지는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유신 선사는 말한다.


“대중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은가, 다른가? 흑과 백을 분명히 가르는 답을 들고 나온다면, 나의 뜻을 알아차렸다고 인정해 줄 것이다.”


그 세 가지 견해가 같다고 말해도 틀리고 다르다고 말해도 틀린다. 앞서와 같이 단계를 나누어 설명한다 해도 그것은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각으로 지어낸 내용이며 이미 분별의 작용이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단계적으로 설명하는 것 또한 불교교학을 차용하여 선의 맛을 보여주는데 유용한 구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어떤 사유의 흔적도 따라잡을 수 없는 화두로 인도하는 옳기는 하지만 말이다.


청원유신 선사나 성철 스님이나 왜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동어반복적인 말을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끝 모를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을까? 진정 모를 일이다. 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했을까? 왜 그럴까?


고명석 / 조계종 포교연구실 책임연구원


未悟、初悟、徹悟


‘선시禪詩’가 일반 순수문학의 시가詩歌와는 다소 다른 점은 문자의 화려함이나 기술적 노련미에 달려있지 않고, 그 담겨진 내용[內蘊]의 진위성眞僞性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경詩境이‘깨달음’이라는 특수영역으로 진리의 본질인 불성佛性에 대한 철저한 앎知이 없이는 그 명칭을 얻기 힘들다. 때문에, 선시를 감상하려면 “본래면목”의 내함內涵에 대한 체험이나 탐토探討가 선행되어야 한다.


예컨대, 청원유신靑原惟信선사는「見山見水의 3단계」법문으로서, 실수實修를 통한 깨달음을 말하였는데:

“1)이 늙은이가 30년 전 참선수행을 아직 시작치 않았을 때,‘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을 뿐’이었으나,

2)그 뒤에 이르러서 선지식을 친견하고 입처入處가 있었는데, ‘산은 산이 아니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3)하지만, 오늘 크게 쉬고 보니, 예같이 ‘산은 단지 산일뿐이고 물은 물일뿐이다.’”(『五燈』卷 17「惟信」)


이 3단계의 게시揭示는“未悟、初悟、徹悟”로 “참선하기 전의 견해”、“참선을 시작한 뒤 얼마간의 깨달음이 있었을 때의 견해”와 “완전히 깨닫고 난 뒤의 견해”로 구별하여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제 1단계에서 유신선사는 산과 물을 분명하게 구분하였는데, 산은 물이 아니며 물은 산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긍정성인 경계. 제 2단계는 구별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긍정성도 없는 오직 부정성인 경계. 제 3단계는 구별성과 긍정성이 함께 있는 경계다.

제 1단계 가운데는“주관과 객관의 이원성二元性이 존재한다. 산과 물 및, 우리들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물과 구별관계가 있을 때, 자신은 사물과 구별을 시도한다. …… 이 가운데,‘나我’는 구별을 낳는 문[基礎]으로,‘나’를 만물의 중심에 놓는다.” 이 때의‘나’란‘自我’로서, 깨침의 본질인‘眞我’가 아니다. 이 단계에서 비록‘眞我’는 체달치 못했지만,‘자아’에서‘無我’로의 비약과 동시에 제 2단계에 진입한다. 이 때,“어떠한 분별도、어떤 객체화작용도、어떤 긍정성과 주객체의 이원적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皆空’이 된다.”하지만, 이“皆空”은 분별에 대한 부정인‘무분별’을 뜻하는 것으로, 전과 다름없이 일종의 차별 가운데 떨어져 있다. …… 여기서 분별의 부정성인 무분별의 관념을 다시 철저히 부정함으로서 제 3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끝으로 제 3단계에 이르렀을 때, 완전히 새로운 분별형식을 띠는데, 이는 끊임없는‘自我’부정을 통한 무분별의 층마저 극복된 ‘眞我’의 분별경계로,“산이란 산일뿐이며, 물은 물일 따름이다.” 이 3단계에서의 산과 물(見山只是山, 見水只是水)은 그 총체성과 개체성 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어 보이는데, 이 때의‘산과 물’이란 우리들의 주관적 입장에서 보이는 객체가 더 이상 될 수 없다.


그래서 원안(元安. 834~898. 唐나라 때 스님)은 “고향집에서 어리석음만은 면할 수 있었네.”라고 “청원유신의 제 3단계”를 노래했다.


決志歸鄕去(결지귀향거),   고향에 꼭 돌아가겠다고 결심하고서,

乘船渡五湖(승선도오호).   배에 올라 방방곡곡을 다닌 것 같다.

擧篙星月隱(거고성월은),   삿대를 의지해 달빛 머리 위에 이고,

                                    별빛을 받으면서 밤길을 재촉하다가,

停棹日輪孤(정도일륜고).   아! 홀로 떠오른 밝은 해를 보고서야

                                    비로소 노 젓기를 멈추었다네.

解纜離邪岸(해람리사안),   닻줄 풀어 사견의 언덕을 벗어났고,  

張帆出正途(장범출정도).   돛을 펼쳐 정견의 길로 나아갔다네.

到來家蕩盡(도래가탕진),   고향집엔 원래 무엇 하나 있지도 않았건만,

免作屋中愚(면작옥중우).   때마침 고향집에서 어리석음만은 벗을 수 있었네.


( 이 시는 원래 禪宗에서 제자를 깨우치기 위해 만든 公案의 이름으로, ≪五燈會元 ․ 卷六≫의「낙포 원안장(洛浦元安章)」에 나오는 글로서: 「어떤 중이 스님에게 묻기를:“ ‘학인이 고향에 돌아가려고 한다면 어떻게 하야합니까?’하니, 원안스님께서 대답하시길:‘고향집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가족들은 뿔뿔이 다 흩어져 아무도 살지 않는다면, 자네는 어디로 돌아갈 건가?’라고 하시니, 중이 대답하길:‘그렇다면 돌아갈 곳이 없겠습니다!’고 했다. 이에, 스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길:‘뜰 앞의 남은 눈은 태양이 녹이지만, 방안의 하늘거리는 티끌은 누구더러 치우라할꼬?’”라고 말씀하시고 바로 이 게송을 읊으셨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