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 햇볕들이 지나가고 (외 3편)/전동균
아프니까 내가 남 같다
도로를 무단 횡단하는 취객 같다
숨소리에 휘발유 냄새가 나는 이 봄날
프록시마b 행성의 친구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이들도 혼밥을 하고
휴일엔 개그콘서트나 보며 마음 달래고 있을까
돌에겐 돌의 무늬가 있고
숨어서 우는 새가 아름답다고 배웠으나
그건 모두 거짓말
두어 차례 비가 오면 여름이 오겠지
자전거들은 휘파람을 불며 강변을 달리고
밤하늘 구름들의 눈빛도 반짝이겠지
그러나 삶은 환해지지 않을 거야
여전히 나는 꿈속에서 비누를 빨아 먹을 거야
나무는 그냥 서 있는 게 아니고
물고기도 그냥 헤엄치는 게 아니라지만
내가 지구에 사람으로 온 건 하찮은 우연, 불의의 사고였어 그걸 나는 몰랐어
으으, 으 으으
입 벌린 벙어리 햇볕들이 지나가고
취생몽사의 꽃들이 마당을 습격한다
미안하다 나여, 너는 짝퉁이다
약속이 어긋나도
칸나꽃 피어나고
흰곰들은 부서지는 빙판을 걸어가요
내가 새매라고, 예티라고, 부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저를 무엇이라고 생각할까요
그들의 형제인 나를
왜 내게는
소리 없이 소낙비를 뚫고 가는 날개가 없을까요
어떻게 나는
인간의 육신과 마음을 얻었을까요
구겨진 종이 같은
재를 내뿜는 거울 같은
약속은 어긋나고 예언은 늘 빗나갔어요
맨발의 지팡이들은 오래전에 추방되었어요
잠들기 전에
내 무덤을 환하게 여는 눈빛을 주세요
무덤에 절을 할 거예요
돌에 물을 뿌릴 거예요
조금씩 달라지는 별들의 표정을 지켜볼 거예요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불러도
산밭에
살얼음이 와 반짝입니다
첫눈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고욤나무의 고욤들은 떨어지고
일을 끝낸 뒤
저마다의 겨울을 품고
흩어졌다 모였다 다시 흩어지는 연기들
빈손이어서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군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왔고
저희는
저희 모습이 비치면 금이 가는 살얼음과도 같으니
이렇게 마른 입술로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당신을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거돈사지(居頓寺址)
숲은 의연하다, 낭자한 허기와 피비린내 속에서
누구도
제가 지닌 가난보다 더 높게
더 낮게 살 수는 없으나
바라볼 때마다 나무들은
모습이 달라지고
이름이 바뀌고
약 같은 풀냄새
풀냄새 속으로 들어와 눕는
여름의 그림자들
숨어야지 숨어서 피어야지 그래야 꽃이지
사라진 절은 여전히 살아 있고
주춧돌들은 안간힘 다해 허공을, 그 너머를 떠받치고
손금을 몇 부러뜨리며 나는
내 몸을 빠져나와
햇볕의
윙윙대는 적막의
가장 깊은 안쪽으로, 먼 바깥으로 걸어가고 있으니
절터에 집을 지은
낯선 사람들,
두런대는 흙들의 사투리에게로
⸺시집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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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균 / 1962년 경북 경주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및 대학원 졸업. 1986년 《소설문학》 신인상 시 부문 당선. 시집 『오래 비어 있는 길』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거룩한 허기』 『우리처럼 낯선』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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