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트 외3편 /안희연
나의 전생은
커다란 식빵 같아
누군가 조금씩 나를 떼어
흘리며 걸어가는 기분
그러다 덩어리째 버려져
딱딱하게 굳어가는 기분
배고픈 개가 킁킁거리며 다가와
이빨로 살살 갉아댈 때까지
나는 있다, 최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반갑겠지, 그렇게라도 말을 걸어주어서
심지어 사랑이라고 믿을 수도 있겠지
궁지에 몰렸었다고 말하면 그뿐
나를 속이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으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질 때마다
털실 뭉치에 끼워진 코바늘을 생각한다
그건 마치 겁먹은 짐승의 눈을 들여다보는 일 같다
잘 짜이고 싶은 것은 아니야, 그보다는
불안을 사랑하는 쪽이 좋지
살아 있으니까,
내 삶에도 주술이 필요했노라고 말하면 그뿐
물주전자가 물을 담기 위해 만들어졌듯
있겠지, 내가 담을 것과 내게 담길 것
때로는 길을 잃기 위해 신발을 신는다
오겠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마음에
진짜 이름을 붙여줄 날
내가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목을 가누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
밤이 되어도 불이 켜지지 않는 집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지만
누구도 아이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 없다
집은 비탈 아래 있다
마차에서 떨어져 나온 바퀴가 구르고 구르다
거기 쓰러져 멈추었을 때
집은 더 이상 발을 내디딜 곳 없어
주저앉은 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산지기는 자주 비탈 위에 서서 지나간 시간을 생각한다
그는 마차를 타고 숲을 달리는 꿈을 자주 꾸는데
낙석으로 길이 끊기는 장면에서 늘 깨어난다
그는 그 꿈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하지만
비탈 아래 무엇이 있는지는 보지 않는다
거기 누구 없어요?
산지기는 오래전 이 산에서 길을 잃었다
위에서 긴 나뭇가지가 내려왔는데
끝없이 오르고 오른 기억밖에는 없는데
천사들이 굴렁쇠처럼 시간을 굴리며 놀고
패를 뒤섞는 장난이 있고
이 모든 풍경을 메마름이라고 발음하는 입술이 있다
울다 잠든 밤이 많은 사람
그는 매일 횃불 묶은 마차를 산속으로 출발시킨다
산의 영혼이 그들을 집까지 인도해주기를 기도하면서
그러나 시간은 도착을 모른다
굴렁쇠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버린 천사들
모두가 쓰지 않고도 쓰고 있다
온통 검은 페이지 위에서
겨울의 재료들
알약,
고요한 잠 속으로 떨어진다
하루가 참 깊구나
시간의 미끄럼틀을 타고
우물,
우물만큼 잠겨 있기 좋은 장소는 없다
이곳엔 웅크린 아이들이 많아
또박또박 슬퍼질 수 있으니까
너는 어느 계절로부터 도망쳐 왔니
너는 참 서늘한 눈빛을 지녔구나
나와 대화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거울을 믿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휘파람,
한 가지 색으로만 이루어진 마음은 스스로를 속이는 법이니까
번지기 좋은 이름이 되려면 우선
어깨를 가벼이 하는 법부터 배워야겠지
재봉틀, 이 시간을 모두 기워 입고서
비로소 내가 될 때까지
눈 내리는 밤,
아무도 밟지 않은 페이지를 골라
편지를 쓴다
“내가 그리로 갈게, 꼭 살아서 갈게”
다행일까 호주머니 속에서 손은 계속 자라고 있다
무엇도 쥐어본 적 없는 손이다
밸브
열면 하염없이 쏟아지고
닫으면 꼼짝없이 갇히는 몸을 가졌다
여름 내내 한 일이라고는
바닥과 포옹하는 일, 흥건해지는 일.
그렇다 그렇다의 마음으로 살아도
아니다 아니다의 마음은 잡초처럼 자라난다
매미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혼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수를 피할 길은 없다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할 때에도
몇 방울의 나는 발등 위로 떨어지고
나는 나를 자주 들키는 사람
발끝은 언제나 젖어있다
겨울은 겨울대로 혹독해서 젖은 발을 빠르게 얼리고
도끼를 든 사람이 찾아와 발을 깨뜨리고 가는 꿈을 자주 꾼다
겨울 내내 할 일이라고는
춥다고 말하는 일, 창틀에 내려앉는 눈송이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주는 일,
나는 다시 녹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된다
열어도 닫아도 결국 썩어 들어가는 세계에서
<안희연 시인 약력>
*1986년 경기도 성남 출생.
*2012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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