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문학상 수상작과 후보작들

[제13회 미당문학상 수상작]-내일은 프로 / 황병승

시치 2014. 8. 4. 01:52

 

제13회 미당문학상 수상작  

내일은 프로 /  황병승

 

   찬비를 맞으며 삼 일 만에 귀가했을 때 집안은 어두웠고 여자는 침울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했지요. 지난 달에도 지지난 달에도 우리는 약속에 도달하기 위해 서로를 철사로 꽁꽁 묶었고 우리는 서로에게 석고를 들이부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석고가 부서져 날리는 새벽.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살구를 한 번도 사다 준 적이 없지... 당신은 살구를 한 번도 사 온 적이 없어... 어째서, 내가 그토록 원하는 살구가 당신 마음속에 뿌리 내리지 못했을까... 당신은 살구 대신 복숭아를 사오곤 했지, 나는 복숭아 알러지가 있는데... 언제나 당신뿐이라고, 언제나 당신이 우선이라고 말하는 당신의 마음속에... 어째서, 나의 간절한 살구가 열매 맺지 못했을까..."

 

   여자는 울음을 터뜨렸지요.

 

   여자는 도시 사람답지 않게 순박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는데요. 내가 좁은 방에 틀어박혀 소설을 끄적이고 있을 때면 여자는 차와 간식이 담긴 쟁반을 건네며 덜떨어진 미소를 짓고는 했었지요. 나는 그때마다 다짐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두더지처럼 생긴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살아 있는 동안 아름답고 근사한 것들을 만들자. 죽는 순간까지 책상 앞에 쪼그려 앉아 연연하고 고려하자.

   그러나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녀의 두더지 같은 얼굴을 볼 수 없겠지요. 그녀가 건네주던 따뜻한 차와 간식도 더이상 받아 먹을 수 없을 것이고 그녀의 순박한 말투와 웃음소리도 더는 들을 수 없겠지요.

 

   나는 계속해서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 절뚝거리는 다리로 술집의 나무 계단을 올라섰습니다. 내일은 프로,내일은 프로. 중얼거리며, 말이지요. (부분)

 

내일은 프로 -[전문]

 

내일은 프로/황병승

 

  

   침묵하거나 침묵하지 않으면서

 

   나는 보여주고자 하였지요, 다양한 각도에서의 실패를. 독자들은 보았을까, 내가 보여주고자 한 실패. 보지 못했지…… 나는 결국 실패를 보여주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쓸모없는 독자들이여,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불빛 속에서, 아름답게 흐르는 강물을, 다리 위에서, 보고 있었지. 어둠 속에서, 나는 밤낮으로 출렁거리며, 다리 아래서, 보여주고자 하였는데, 괴로워…… 그러게 말입니다. 실패한 자로서, 실패의 고통을 안겨주는 이 페이지에서, 당신들이 수시로 드나들 이 페이지에서, 페이지가 너덜거리도록 당신들과 만나는 고통 속에서,

   “나는 실패를 보여주고자 하였으나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네. 이거 이거, 실패를 보여주기에는 역시 역부족이란 말인가. 괴롭습니다, 괴로워요……” 라고 말이지요

 

                                            *

 

   찬비가 얼굴을 때리는 새벽,

 

   나는 누구에게라도 전화를 걸고 싶었습니다

   죽은 할머니에게라도 할아버지에게라도

   거리의 부랑자들과 매춘부들에게라도

   웃거나 울지 않으면서

   침묵하거나 침묵하지 않으면서

   술집에서 만난 보이와 건달 녀석에게라도

   나는 전화기를 들고 아무 번호나 눌러대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모두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누구시죠? 누구십니까?

 

                                            *

 

  이렇게 ‘영원’이 되고 말겠지

 

   찬비를 맞으며

   삼 일 만에 귀가했을 때

   집 안은 어두웠고 여자는 침울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했지요

   지난달에도 지지난달에도

   우리는 약속에 도달하기 위해

   서로를 철사로 꽁꽁 묶었고

   우리는 서로에게 석고를 들이부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석고가 부서져 날리는 새벽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살구를 한 번도 사다 준 적이 없지…… 당신은 살구를 한 번도 사 온 적이 없어…… 어째서, 내가 그토록 원하는 살구가 당신의 마음속에 뿌리내리지 못했을까…… 당신은 살구 대신 복숭아를 사 오곤 했지, 나는 복숭아 알러지가 있는데…… 언제나 당신뿐이라고, 언제나 당신이 우선이라고 말하는 당신의 마음속에…… 어째서, 나의 간절한 살구가 열매 맺지 못했을까……”

 

   여자는 울음을 터뜨렸지요

 

   “나쁜 새끼 같으니라고!”

 

   나쁜 새끼는 나뿐인 새끼, 나밖에 모르는 새끼, 라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살구 때문에, 살구 하나 때문에, 라고 말하지 말아…… 살구는 내가 지금까지 당신과 함께해온 이유이고 목적이고 전부였으니까…… 살구 때문에 나는 당신과 함께 지내는 내내 괴로웠고…… 살구 하나 때문에 당신과 한동안 떨어져 지내야 했으며…… 살구 때문에 떨어져 지내야 했던 한동안이 이렇게 ‘영원’이 되고 말겠지…… 살구 때문에, 살구 하나 때문에……”

 

   여자는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

 

  세탁기하곤 말이 안 통하니까

 

   이봐 피츠, 부모님은 무슨 일 하셔?

   세탁소

   어디에서?

   어딘가에서

   깨끗한 옷 좋아해?

   금세 더러워질 테지

   나쁜 짓 많이 했어?

   살인 빼놓고

   부모님은 뭐라셔?

   뭘 뭐라셔

   하긴 세탁부들은 대개 말이 없지

   세탁기하곤 말이 안 통하니까

   너도 다를 건 없어

   뭐라고?

   이봐 피츠! 그러니까 내 말은 소가 쓰러질 때까지 투우는 계속되지 않겠냐는 거야

   무슨 소리야, 갑자기

   알아, 우린 언젠가 창에 찔린 소처럼 쓰러지고 말겠지

   웃기시네

   웃기시네라니, 누가 누구한테?!

   차라리 머리통을 세탁기에 처넣고 말지

   그럼 내가 스팀다리미로 문질러줄게

   내 머릴?

   네 머릴

   빳빳하게?

   빳빳하게

   현찰처럼?

   기념우표처럼

   서랍 속에라도 넣어두게?

   그래, 금고 깊숙이

 

   와아…… 피츠는 갑자기 혼자가 되어버리겠군!

 

                                            *

 

   갑자기, 나는 혼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캐리어를 끌고 골목 끝으로 사라져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피츠 피츠…… 나는 왜 불현듯 지난가을에 적어두었던 메모가 떠올랐을까요

 

                                            *

 

  차와 간식이 없는 세상에서

 

   여자는 도시 사람답지 않게 순박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는데요

   내가 좁은 방에 틀어박혀 소설을 끄적이고 있을 때면

   여자는 차와 간식이 담긴 쟁반을 건네며 덜떨어진 미소를 짓고는 했었지요

   나는 그때마다 다짐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두더지처럼 생긴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살아 있는 동안 아름답고 근사한 것을 만들자

   죽는 순간까지 책상 앞에 쪼그려 앉아

   연연하고 고려하자

 

   그러나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녀의 두더지 같은 얼굴을 볼 수 없겠지요

   그녀가 건네주던 따뜻한 차와 간식도 더 이상 받아먹을 수 없을 것이고

   그녀의 순박한 말투와 웃음소리도 더는 들을 수 없겠지요

   아 아름답고 근사한 것은 무엇이며

   벽면 가득 붙어 있는 저 메모 쪼가리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이봐 피츠, 이 길 끝에는 뭐가 있어?

   이 길 끝에는……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전당포도?

   전당포도

   스낵바도?

   스낵바도

   잠자리도?

   잠자리도

   맙소사, 우린 완전히 길을 잃었어

   우린 완전히 새로운 길 위에 있지

   우린 너무 멀리 와버렸어

   하지만 우린 더 멀리 가야 해

   우린 곧 쓰러지고 말겠지

   창에 찔린 소처럼 말이야?

   나는 지금이 너무 무서워

   나는 지금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꿈이었으면 좋겠어

   그럼 또다시 피를 흘려야겠지

   우린 너무 많은 걸 잃었어

   우린 많은 걸 배우게 될 거야

   아무도 우릴 뒤쫓지 않아

   우리가 전부 해치웠으니까

   아무도 우릴 막아서지 않아

   우리가 악몽의 주인이니까!

   나는 지금이 너무 두려워

   나는 지금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우린 곧 죽고 말겠지

   우린 지금 태어나고 있어

   나는 태어나고 싶지 않아

   아무도 원해서 태어나지 않아

   제발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부디 이 모든 게 꿈이 아니기를……

 

                                          *

 

   피츠 피츠……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 거리를

   나는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비에 젖은 후줄근한 옷차림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자가 집을 나갔다는 사실도 잠시 잊은 채

   소설, 소설만을 생각하며 나는 달리기 시작했지요

   또다시 실패를 보여주는 데 실패하고 말지라도

   누구시죠 누구십니까, 아무도 나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마지막으로 한 잔 더, 마시며 소설을 완성하고야 말겠다는 들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나는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술집을 향해

 

                                          *

 

  쿵쾅 쿵쾅 쿵쾅 쿵쾅

 

   나는 술집의 나무 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갔지요

 

   쿵쾅 쿵쾅 쿵쾅 쿵쾅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계단은 끝없이 이어졌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계단과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남자는 잘생긴 코지

   좋은 군인은 모두 좋은 코를 가지고 있어

   너는 네 엄마를 닮았으니

   최악의 코를 가진 불쌍한 녀석이 되겠지

   좋은 군인은 나 하나로 족하다!

 

   아버지의 목소리……

 

   나는 계단 아래 보기 좋게 처박히고 말았습니다, 피……

   코피가 흘렀지요

   나는 손등으로 코피를 닦으며 술집 문을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머릿속의 구상은 온데간데없이 날아갔고

   소설은 여전히 미완성이고, 여자가 떠난 텅 빈 집은

   또 얼마나 춥고 불쾌할까

 

   ……그래요, 아버지

   좋은 군인은 기품이 있죠

   군대의 기품은 계급이니까

   칼라collar가 더럽게 빳빳하죠

 

                                        *

 

  앞으로의 인생은 둘째 치고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나를 가끔 나무 위에 매달아 ‘주셨습니다’ 교육이라는 것인데……

   나는 나무 위에 몇 시간씩 매달린 채로 나의 지나온 행적과 앞으로의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려 했지만, 까마귀들이 날아와 미친 듯이 울어댔고, 어떤 날은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으며, 또 어떤 날은 날벌레들이 콧구멍 속을 바쁘게 들락거리는가 하면, 또 어떤 조용한 날엔 거미들이 얼굴에 흰 줄을 치기도 했지요

   반성이나 앞으로의 인생은 둘째 치고 내가, 여기, 왜 매달려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떤 비참한 인생이 시작되고 있었던 거지요

 

                                        *

 

  벙어리는 침묵과 절름발이는 목발과

 

   나는 술집 계단 아래 거꾸로 처박힌 채

   다짐을 했습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에이전시에 연락해서 타이피스트를 부탁해야지

   머릿속의 구상과 잠꼬대와 헛소리를 정확하고 빠르게,

   열정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타이피스트!

   기계와도 같은 타이피스트를…… 에이전시, 타이피스트

   에이전시라니, 타이피스트라니……

 

   나는 계속해서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

   절뚝거리는 다리로 술집의 나무 계단을 올라섰습니다

 

   내일은 프로

   내일은 프로

 

   중얼거리며, 말이지요

 

 

 

                       —《문학과사회》2013년 봄호,

                            시집『육체쇼와 전집』(2013)에서

-------------

황병승 / 1970년 서울 출생. 2003년《파라21》로 등단. 시집『여장남자 시코쿠』『트랙과 들판의 별』『육체쇼와 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