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관련

[스크랩] 정약용과 다산초당

시치 2009. 8. 21. 01:01

 

  정약용과 다산초당

 

 

 

     차 이야기라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을 빼놓을 수 없다. 다산

  선생이 차를 접하고 「다산(茶山)」이라는 호를 얻게 된 것은 전남 강진 땅에서 보

  낸 18년 간의 귀양살이 때다. 그리고 초당에서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와 교우하며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5백

  여권에 달하는 저서를 집필했다.
    
 다산은 실학(實學)의 집대성자이며 조선후기의 차인이었다. 다산은 경기도 광주

  군 초부면 마재(馬峴), 지금의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에서 아버지 나주정씨(羅州

  丁氏) 재원(載遠), 어머니 해남윤씨(海南尹氏 : 공재 윤두서의 손녀)의 네째아들로

  태어났다.
     다산의 당호이자 서재이던 여유당(與猶堂)은 그의 전 저작을 모은 전서의 명칭이

  되었지만 바로 마재에 있을 때의 거실로서 다산학(茶山學)의 보금자리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산의 생가 일대에는 다산이 생전에 터를 잡았다는 자신의 묘소를 비

  롯해, 만년에 독서와 저술 등의 공간으로 사용했던 사랑채가 복원되어 있다. 현재

  마재는 세월의 흐름으로 다산의 기록에 나타난 것과는 그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다산은 22세(1783년)에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들어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훌륭한 정치가로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다산은 반대파의 모함으

  로 경상도 기장에서 귀양살이중 40세 되던 해인 1801년 10월 신유사옥의 단초가 된

  황사영(黃嗣永) 사건에 연루되었다며 한양으로 압송되어 갖은 문초를 받고 다시

  전라도 강진현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다산은 처음 강진땅에 유배 와서 거처를 마련 못해 동문밖 주막에서 기거하게 되

  었다. 이어 우두봉자락의 고성사, 탐진강변 석교마을, 만덕산(萬德山) 기슭 보은산

  방(寶恩山房) 등을 전전하며 가련한 귀양살이를 8년이나 한 끝에 다산초당으로 들

  어가게 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해남에 사는 외가쪽 사람들이 다산의 불편한 생활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유자

  나무가 많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귤동마을 뒤 만덕산에 초당을 마련하고 학문에 전

  념토록 배려한 것이다. 다산초당은 원래 귤원처사 윤단(尹 )이 초가로 지은 산정

  으로 해남윤씨의 후손을 가르치던 서당이었다. 이곳이 바로 다산의 18년 간 유배생

  활중 11여년을 지낸 다산초당(茶山草堂)이다. 만덕산은 차나무가 많다고 하여 다

  산(茶山)으로 불리는 산이다.
     다산 정약용선생이 1808년 봄 이곳으로 옮겨와 유배가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

  던 1818년 8월까지 11년 간 이곳에서 학문과 강학(講學)에 전념하였다. 마을 사람

  들은 다산에 사는 정(丁)씨라 하여 정다산(丁茶山)이라 불렀고 정약용이 이때부터

  아예 다산(茶山)을 자신의 아호(雅號)로 쓰기 시작했다.
     현재의 다산초당은 1936년에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57년 해남윤씨의 협조를 받

  고 정다산유적보존회가 복원하면서 지붕을 기와로 덮었다. 따라서 다산초당이 아

  니라 다산와당(茶山瓦堂)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산초당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

  의 친필을 집자(集字)하여 모각(模刻)한 것이다.
     다산초당(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은 강진읍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대흥사에서도 멀지 않다. 입구의 「다산 유물전시관」에서 산중턱의 초당까지는

  불과 800m 거리다. 귤동이라는 작은 마을을 벗어나서 산길로 접어들면 수백 년은

  됨직한 은행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대나무 숲이 울창하고 짙푸른 동백 거목들이 솟아 있어 대낮에도 어두침침하다.

  울창하게 들어찬 대밭과 하늘을 가리운 아름드리 소나무들, 시원한 공기가 온몸을

  파고든다. 이 길을 따라 가파른 오솔길을 오르면 다산초당이 나타난다.
     다산초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암(東庵)과 서암(西庵)이 자리하고 있다. 동암(東

  庵)은 다산 선생이 유배생활 중 초막(草幕)을 짓고 거처하였던 곳이며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제유표 등 5백여권의 책을 저술하여 우리나라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

  이다. 일명 송풍암(松風庵)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동암 근처에 소나무들이 무성하

  여 솔바람이 불어오는 암자라 하여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동암 또한 허물어져 없

  어진 것을  1976년에 강진군에서 복원한 건물이다. 다산동암(茶山東庵)이란 현판

  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친필이며 보정산방(寶丁山房)이란 현판은 추사선생의 글씨

  를 모각(模刻)한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서암(西庵)은 1808년 다산선생이 유배당시 지어진 초막으로 윤종상(尹鐘祥) 윤

  종진(尹鐘軫) 등 18명의 제자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하며

  허물어져 없어진 것을 1975년 기와로 복원했다.
     동백숲과 잡목이 우거져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한 초당에는 「다산4경(茶山四

  景)」으로 불리는 볼거리가 있다. 뜰 앞의 너럭바위를 부뚜막으로 삼아 청동의 화

  로에 약천의 물을 붓고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던 반석(盤石)인 다조

  (茶槽 차부뚜막)가 있다. 그리고 해배(解配)를 앞두고 발자취를 남기는 뜻에서 정

  약용이 초당 뒤 자연석에 손수 단정한 해서체로 새겨놓은 「丁石」바위, 다산선생

  이 직접 파 만든 샘으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맑은 물이 솟아나는 「약천(藥泉」,

  다산선생이 연못을 만들고 탐진강가에서 돌을 주어다 산처럼 봉(峰)을 쌓고 주변

  에는 백일홍과 대나무를 심었다는 작은 연못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 있다.
     동암에서 오솔길을 조금 걸어가면 선마루가 나오고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탁 트

  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산은 외롭거나 괴로울 때는 여기에 나와 서쪽 흑산

  도에서 유배중인 형 약전을 그리워하였다.
     다산초당 천일각(天一閣)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다시

  800m 정도만 가면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寺)다. 언덕에서 보면 최근 조성한

  차밭 뒤로 빨간 동백이 막 피어나는 동백나무숲 산자락 한 쪽에 백련사가 자리잡고

  있다. 온산을 뒤덮은 백련사 동백 숲은 알아주는 동백명소다. 절 진입로 역시 온통

  동백나무로 숲터널을 이루고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한편 다산은 1805년 강진에 유배된 지 네해째 되는 을축년 가을 혜장선사(惠藏禪

  師)를 만난다. 갇힌 생활에서 조금 자유로워진 다산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마을

  노인 한 분을 앞세우고 삼십리쯤 떨어진 도암면에 있는 만덕산 백련사를 찾아간다.

  그곳 주지인 젊은 스님이 동문 주막에 학식 높은 선비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번

  보고 싶다는 기별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백련사에서 혜장을 만난 다산은 목례를 나눈 뒤 스님이 권하는 차를 마시면서 대

  화를 시작한다. 두 사람의 화제는 불교에서 주역으로 옮겨지며 날이 저물도록 계속

  된다. 밤이 늦어 못내 아쉬워하며 헤어질 때 다산은 말한다. 「차맛이 너무 좋습니

  다. 다시 스님을 찾아오면 그때도 차를 주시겠습니까」
     이에 혜장은「역(易)에 밝으시니 내일 일을 익히 아시겠지요. 가르침을 받겠습니

  다」 밤길을 걸어 처소로 돌아온 다산은 혜장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당시 혜장의 나

  이는 34세로 다산보다 꼭 10년이 아래였지만 유배생활에서 벗 없이 오랜 세월을 지

  내왔던 그에게 말벗이 될 수 있는 혜장의 등장은 반가움을 넘어 충격이었다. 뜨거

  운 가슴을 억누르지 못하고 잠을 뒤척이고 있을 때 자정이 넘어 인기척이 났다. 벌

  떡 일어나 문을 열고 보니 뜻밖에도 손님은 혜장스님이었다. 둘은 서로 껴안고 눈

  물까지 흘렸다.
     이 이야기는 강진에 구전되고 있는데 다산이 처음 차를 접하게 된 것은 이 때로

  서 이것이 조선 역사에 차가 재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해 겨울 다산은 혜장의

  도움으로 동문밖 주막을 떠나 강진읍 뒤 고성사(高聲寺)로 옮기고 그 거처를 보은

  산방(寶恩山房)이라 이름지었다. 이때 다산은 이미 차의 세계에서 풍류를 즐겼던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백련사의 자랑은 무엇보다도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이다. 사

  적비 옆 허물어진 행호토성 너머에 아름드리 동백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동백

  나무 숲을 나와 산언덕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대숲으로 에워싸인 길이 다산초당으

  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이 혜장선사와 다산 정약용이 서로 왕래하며 교유하던

  길이라고 한다.

     다산의 강진 유배생활이 마무리되던 해인 1818년, 그의 제자들이 다신계(茶信契)

  를 조직한다. 다신계 절목에는 모두 18명의 제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뒷부

  분에는 다산(茶山)이 직접 기술한 대목이 있다. 다산(茶山)은 약조에 이르기를

 「매년 청명한식(淸明寒食)일에 모든 계원이 다산초당에 모여 계사(契事)를 치르는

  데 운을 내서 시를 짓고 연명으로 작서하여 유산(酉山:丁若鏞의 아들)에게 보내라.

  또 곡우 때 딴 어린 차는 볶아서 엽차 한 근을 만들고 입하 때 딴 늦은 차로서 병차

  (餠茶) 두 근을 만들어 시와 서찰을 함께 동봉하여라」했고 「가을 국화가 피는 시

  절에도 초당에 모여 시(詩)를 지어 보내라」고 하였으며 「봄에 차를 따는 노역에

  빠지는 계원은 돈 5전을 내서 마을 아이에게 차를 따도록 하라」고 했다.

     다산(茶山)은 강진에서 18년 동안이나 유배되었다가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18명의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자상한 훈도를 잊지 않았다. 고향에서도 다산(茶山)

  은 저술에만 전념하다가 1836년 2월 22일, 75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제자들의 정성

  은 한해도 거름이 없었다. ■

 

 

출처 : 전통의 향기를 찾아서
글쓴이 : 침향 원글보기
메모 :

'고전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현대시 목록-해설  (0) 2010.04.19
[스크랩] 고전시가 목록-해설  (0) 2010.04.19
[스크랩] 초의선사와 일지암  (0) 2009.08.21
[스크랩] 다신전(해설)  (0) 2009.08.21
[스크랩] 다신전  (0) 2009.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