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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초의선사와 일지암

시치 2009. 8. 21. 00:59

 

  초의선사(艸衣禪師)와 일지암(一枝庵)

 

 

 

     조선후기의 선승으로 우리나라 다도(茶道)를 정립한 초의선사(艸衣禪師

  1786∼1866)의 속명은 장의순(張意恂), 법명은 초의(艸衣)이다. 초의선사는 15세에

  출가하여 60여년간의 수행과 함께 당시 실사구시를 표방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

  喜),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등 당대의 지식인들과 각별히 교유하며 다도(茶道),

  시(詩)·서(書)·화(畵) 등 전통문화와 불교, 유교, 도교 등에도 해박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39세 때 전남 해남 대흥사 동쪽 계곡에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이곳을

  근거지로 참선과 저술에 전념했으며 다도의 이론과 실제를 생활하면서 우리의 전

  통 차문화를 꽃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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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하동군 화개면 지리산 칠불사(七佛寺)의 통광(通光)스님이 역주(譯註)한

 『초의다선집(艸衣茶禪集)』에는 초의선사의 행장(行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대선사(大禪師)이자 한국 다도의 중흥조(中興祖)인 다성(茶聖) 초의

  선사는 서기 1786년(丙午, 정조10년) 4월 5일 전남 무안군 삼향면(三鄕面)에서 태

  어났다. 선사의 속성(俗姓)은 인동장씨(仁同張氏)이고 이름은 의순(意恂), 자(字)는

  중부(中孚)이다. 초의(艸衣)는 그의 법호(法號)이며 그밖에 해옹(海翁), 해노사(海

  老師), 자우산방(紫芋山房), 휴암병선(休菴病禪), 자하도인(紫霞道人), 우사(芋社),

  해상야질인(海上也 人), 일지암(一枝庵)이라고 했으며 헌종(憲宗)으로부터 대각

  등계보제존자초의대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禪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선사의 가계(家系)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신헌(申櫶)의 초의대선사탑

  비명(艸衣大禪師塔碑銘)에 의하면, 모친이 품에 큰 별이 들어오는 꿈을 꾸고 스님

  을 잉태하였다. 5세 때(1790년) 강변에서 놀다가 급류에 떨어져 죽게 되었을 때 마

  침 부근을 지나던 어느 스님에 의해 구조되어 살아났다. 그 스님이 출가할 것을 권

  함에 따라 15세 되던 해(1800년) 남평 운흥사(雲興寺)로 들어가 대덕(大德) 벽봉민

  성(碧峰敏性) 스님을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선사는 19세 때, 영암 월출산(月出山)에 혼자 올라갔다가 때마침 해가 지면서 보

  름달이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바라보고 일순간 가슴이 확 트이는 것을 경험하

  면서 깨달음(開悟)을 얻었다. 그 후 해남 대둔사 완호(玩虎) 스님을 계사(戒師)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법맥(法脈)을 이었으며 초의(艸衣)라는 법호를 받았다.
     선사는 22세 때부터 제방의 선지식(善知識)을 두루 참방하며 더욱 탁마한 끝에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에 통달하였다. 연담유일(蓮潭有一)선사의 선지(禪旨)

  를 이어받았으며 지리산 칠불암에서 서상수계(瑞相受戒)한 대은(大隱)·금담율사

  (金潭律師)의 계맥(戒脈)을 전수 받고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 등 명산을 순례하였

  다.
     선사는 또한 선(禪)과 교(敎)뿐 아니라 유교와 도교 등 제반 학문에까지 조예가

  깊었으며 범서(梵書)에도 능통하였다. 24세 때(1809년) 강진(康津)에 와서 유배생

  활을 하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처음 교류하고 유서(儒書)와 시부(詩賦)를

  익혔다. 30세 되던 해(1815년) 처음으로 한양에 올라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김명희(金命喜), 김상희(金相喜) 형제와 정약용의 아들인 정학연(丁學淵), 정학유

  (丁學遊) 형제, 자하(紫霞), 신위(申緯), 홍석주(洪奭周) 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

  다. 이를 문사(文士)와의 교유는 평생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화운(和韻)한 시가

  60여 수 있다.
     선사는 차츰 자신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자 은거의 뜻을 갖고 39세 때

  (1824년) 대둔사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 일지암(一枝庵)을 지어 그 후 일생을 보내

  는 근거지로 삼는다. 43세 때(1828년) 지리산 칠불암에서 『다신전(茶神傳)』을 등

  초(騰抄)하였고, 45세 때 이를 정서(正書)하였으며 52세 무렵에 『동다송(東茶

  頌)』을 지어 차생활의 멋과 우리 차의 우수성을 기리었다.
     선사는 당대의 뛰어난 시인이며 화가, 음악가이자 쇠잔해 가던 조선 후기의 선종

  사(禪宗史)에 활력을 불어넣은 선문(禪門)의 거목이기도 하였다. 스님의 선사상(禪

  思想)이 잘 나타나 있는 『사변만어(四辨漫語)』는 당대의 유명한 백파(白

  坡:1767∼1852) 스님이 『선문수경(禪文手鏡)』을 저술한 것을 계기로 초의선사가

  백파선사의 잘못을 일일이 변증한 것이다. 이러한 선(禪)에 대한 논쟁은 김정희(金

  正喜), 우담홍기(優曇洪基), 축원진하(竺源震河) 등을 중심으로 선(禪) 논쟁이 크게

  일어 조선 후기 선사상(禪思想) 조류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선사의 선사상(禪思想)에서 주목되는 것은 당시 불교계가 전선(專禪) 일변도로

  흐르고 있는 사조에 반해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진리를 구현하려고 노

  력하였다는 점이다. 즉 선사는 언제나 제법불이(諸法不二)를 강조하여 그에게는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와 선이 둘이 아니었

  다. 특히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에 심취하여 차를 통해 법희선열식(法喜禪悅食)

  의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곤 하였다.
     또한 스님은 범패(梵貝)와 원예,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약 등에까지 능하였다. 실학의 대가 정약용과 실사구시(實事求是)

  를 주창한 김정희와의 교류에서 영향을 받은 바 있어 다방면에 능통하였던 것이다.
     다성(茶聖) 초의와 서성(書聖) 추사와의 교유는 각별하여 평생을 통해 지속되었

  는데 두 사람은 동갑나기로서 서로가 서로를 드높여 주는 남다른 사이였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초의는 당시 험난한 뱃길을 건너 세 차례나 제자 소치 허

  유(小痴 許維)를 통해 추사에게 손수 법제한 차를 보내고 추사는 초의에게 글을 써

  보내기도 하였다. 71세 되던 해(1856) 10월에는 42년간 금란지교(金蘭之交)를 맺어

  온 김정희가 과천 청계산 아래에서 유명을 달리하자, 그의 영전에 완당김공제문(玩

  堂金公祭文)을 지어 올리고 일지암에 돌아와 쓸쓸히 만년을 보냈다.
     선사의 저서로는 일생 동안 참선하는 여가에 사대부와 교유하면서 지은 시를 모

  은 『일지암시고(一枝庵詩稿)』와 일생동안 지은 소(疎) 기(記) 서(序) 발(跋) 제문

  (祭文) 영찬(影讚) 등을 실은 『일지암문집(一枝庵文集)』, 선의 요지를 밝힌 『선

  문염송(禪門 頌』중에서 골자만을 가려 주석을 달아 놓은 『초의선과(艸衣禪

  課)』, 조선후기 선 논쟁으로 백파긍선(白坡亘璇)의 선론에 반대의 입장을 밝힌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한국의 다경(茶經)으로 불리는 『동다송(東茶

  頌)』, 차의 지침서인 『다신전(茶神傳)』등이 있다.
     일찍이 대둔사를 크게 일으킨 중흥조로서 13대종사에 이르렀고 다도(茶道)의 이

  론과 실제를 생활화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전통 차문화를 꽃피운 선사는 일생을 통

  하여 선(禪)과 교(敎)의 어느 한 쪽에 치우침이 없이 수도하고 중생을 제도하였는

  데, 세수 81세(고종 3년 1866년) 법랍(法臘) 65세를 일기로 대흥사 쾌년각에서 서쪽

  을 향해 가부좌를 하고 입적하였다.
     선사에게 사미계를 받은 스님이 40여 명, 보살계를 받은 스님이 70여 명, 선교(禪

  敎) 및 잡공(雜工)을 배운 사람이 수백 명에 달하였다. 대흥사 남쪽 기슭에 스님의

  부도를 세웠는데 송파 이희풍(松坡 李喜豊)이 탑명(塔銘)을 지었으며 탑의 오른쪽

  에는 비석을 세워 양석 신관호(養石 申觀浩)가 비문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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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남 대흥사는 초의선사가 13대 종사로 주석하면서 크게 중흥시킨 남도의 거찰

  이다. 전남 해남읍에서 남쪽으로 827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면 불과 10여km 남짓한

  거리다. 이 대흥사는 최근 대둔사라는 고유의 이름을 되찾았다. 그러나 절에서는

  아직도 대흥사로 부르고 있으며 일주문도 '대흥사'다. 일반인들에게도 대흥사가 더

  익숙해져 있다.
     8개의 아기자기한 봉우리로 이루어진 대둔산(해발 703m) 아래 울창한 수림이 병

  풍처럼 둘러있고 그 서쪽에 신라 진흥왕때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오는 대흥

  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이자 고승인 서산대사의 의발을 모신 곳이다. 또 13명의

  종사와 13명의 대강사를 배출하며 조선 불교 선교양종의 총본산이기도 하다.
     대흥사로 가는 숲길은 차향기 그윽한 길이다. 매표소부터 장춘교 지나 법계와 세

  속을 넘나드는 대둔사 피안교까지는 3㎞의 숲길이 이어진다. 햇살이 비집고 들어

  올 틈조차 없는 울창한 숲이다. 대흥사 진입로는 '조용히 사색하며 걷고 싶은 길'

  전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아름다운 숲길이다. 특히 측백나무와 편백나무로 이

  루어진 늦가을의 정취는 빼어나다.
     대흥사 가는 길은 조안교와 심진교, 도로 밑으로 난 구멍다리까지 11개의 다리를

  건너게 된다. 산자락에 일지암을 세우고 차문화를 전파했던 「다성」 초의선사가

  아홉구비 계곡을 건넌다고 해서 「구곡」으로 불렀던 길이다. 사찰 주위에도 숲이

  펼쳐진다. 남도에서 가장 큰 북가시나무숲이다. 수령 150∼200년 된 거목들이 어우

  러져 아름답기 그지없다. 또 희귀식물인 왕벚나무의 자생지로도 유명하다.
  
  대흥사 입구의 수림은 몇 백 년 묵은 소나무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기기묘묘하

  게 구부러지고 엉킨 나무들은 자연의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일주문(一柱門)

  인 해탈문 가까이에 있는 고승(高僧)들의 부도(浮屠)는 절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듯 당당하기 그지없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부도전, 운학교 건너 사천왕문을 지나면 경내다. 경내를 거닐

  다 보면 서산대사 사당인 표충사 앞에서 죽장자를 어깨에 걸친 채 앉아 계신 노스

  님을 만나게 된다. 한국차에 관한 명저 『다신전(茶神傳)』과 『동다송(東茶頌)』

  을 쓴 한국의 다성(茶聖) 초의선사의 동상이다. 대흥사의 근처 일지암에서 수행하

  며 사라져가던 한국차의 정신과 맛을 중흥시키고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정신과

  맛을 오늘까지 이어준 선사의 업적은 동상 앞에 새긴 몇 줄의 짧은 글 뿐만 아니라

  매일 마시는 차에 녹아 있다.
     예로부터 좋은 차는 바닷가 근처에서 아침안개가 자주 끼는 대나무 많은 산에서

  난다고 했다. 야생 차나무가 자라는 대흥사 주변은 이런 조건을 두루 갖춘 덕택에

  다성까지 배출한 한국차의 성지가 됐다. 정조대왕이 쓴 「표충사」 현판, 원교 이

  광사의 글씨 「천불전」 「침계루」, 추사 김정희의 힘찬 필치가 돋보이는 「무량

  수각」 등이 대흥사의 연륜을 짐작케 한다.

     대흥사 뒤편에서 비탈길을 따라 20여분 오르면 대둔산 중턱에 초의가 오랜 세월

  을 묻혀 살며 차생활을 즐겼던 두 칸 정도의 아담한 초가가 보인다. 우리나라 다도

  를 중흥시킨 초의선사가 만년을 보낸 일지암이다.
     산중턱 전망 좋은 곳에 한 평쯤 될만한 단칸의 암자다. 연못을 사이에 두고 고풍

  스런 목조가옥 자우홍련사(紫芋紅蓮社)와 나란히 산아래 가람을 향해 앉았다. 차

  나무로 울타리를 한 뜰에 가득 꽃을 심고 뜰 복판에는 연못이 있고, 추녀 밑은 크고

  작은 석조(石槽)를 마련해 둔 아름다운 차정원이다.
     일지암은 초의선사가 39세때인 이곳에 띠집을 짓고 「뱁새는 항상 한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가지에만 있어도 편하다」는 한산시(寒山詩)에서 일지(一枝)

  를 딴 일지암(一枝庵)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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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의선사는 차밭을 일구고 차를 직접 만들면서 우리「다도」를 정립했다. 불교

  에 달통했던 초의가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 등 유배객으로 내려온 당대의 사상

  가들을 만나 차로써 그들의 건강을 지켜주고 찻잔 너머로 개혁및 실사구시를 논했

  다.
     다도는 불을 지피고 물을 잘 끓여서 정성들여 만든 차를 간맞게 하여 마시는 평

  범하고 일상적인 행동 속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일체의 행위들이 수

  행에서 말하는 정신적인 방법과 상통해 있다는 것이 초의선사가 강조했던 다선일

  미사상(茶禪一味思想)이다. 초의선사는 이러한 우리의 전통 다도정신을 중정청경

  (中正淸敬)이라 했다. 차를 마시면서 인생의 쓴맛, 떫은맛, 신맛, 짠맛, 단맛 등을

  자기 안에서 서서히 하나의 향기로 승화시킨다는 것이다.
     원래 일지암은 초의선사의 입적과 함께 불타 없어졌지만 밀려드는 서구문물의

  홍수 속에서 우리것 지키기에 나선 해남차인회가 79년에 다시 일으켜 세워 현재까

  지 이어져오고 있다. 현재는 85년에 입적한 응송스님에 이어 3대 암주(庵主)인 여

  연스님이 외로이 일지암과 산기슭의 작은 차밭을 가꿔나가고 있다.
     일지암에는 초의선사가 무척 자랑하고 아꼈다는 유천(流泉)이 흐르고 있다. 소나

  무 둔덕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대나무 대롱을 타고 차례로 세개의 돌확에 담기는데,

  이 물이 찻물로 이용된다.
     홍련 몇 그루가 떠 있는 작은 연못에 무심한 듯이 떡돌 몇 개를 툭툭 쌓아올리고,

  그 떡돌을 기둥으로 삼아 누각을 올린 자우홍련사는 훌훌 날아올라갈 듯한 날렵한

  집이다. 규모는 작지만 웅장한 맛이 나는 아름다운 집이다. 자우홍련사의 연못 위

  누각형 대청엔 항상 나무찻상에 다기 한 벌이 차려져 있다.
     해남차인회는 매년 초의선사의 기일(음력 8월 2일)에 이곳 일지암에서 '초의 문

  화제'를 열고 우리 차문화 전승에 힘을 쏟고 있으며, 현재 대흥사에서는 동다실(東

  茶室)이라는 차마시는 곳을 운영하고 있다. 대흥사에서 운영하는 차실에서 차 한잔

  마시고 일지암(一枝庵) 비자나무 아래에서 초의선사의 다도정신을 되새기려는 답

  사객들로 일지암 가는 길은 산길답지 않게 언제나 붐빈다. ■

 

 

출처 : 전통의 향기를 찾아서
글쓴이 : 침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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