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카페: http://cafe.daum.net/BaekSeok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1938년>
- ▲ 일러스트=이상진
추한 세상을 뒤로 하고 나타샤, 함께 산골로 가자
이 시는 바야흐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고 싶은 시인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짜 연애편지다.
어느 밤 눈은 내리고 연인이 있는 곳에도 연인과 함께 가고 싶은 곳에도 눈이 푹푹 내릴 때 한 대책 없는 시인이 사랑을 노래한다.
그윽한 영상을 펼쳐 보이며 잔잔하게 전개되는 이 시는 두 번의 절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시의 도입부에 단도직입으로 펼쳐진다.
내가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내린단다!
중증의 나르시시즘이다,
요샛말로 '자뻑'이 한참 심하다. '
낙엽이 져요,
당신이 그리워요' 이게 순서 아닌가.
그런데 이 시는 대뜸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여 낙엽이 지고,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꽃이 핀다는 것이다.
사랑의 힘을 이토록 과장되게, 그러나 천진하고도 사랑스럽게 전할 수 있는 것은 시뿐이리라.
두 번째 절정은 3연.
산골로 도망가자고 연인을 꾀는 시인의 속내에 그대로 드러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이 시가 발표된 때는 1938년이니 일본제국주의 압박이 점차 수위를 높여갈 때다.
세상은 갈수록 추해져 가고, 우리는 더러운 세상에 섞여 살기 힘든 순결한 존재들.
그러니 더러운 세상에 상처받지 말고 우리가 먼저 세상을 버려버리자고 이 시는 선동하는 것이다.
기막힌 사랑의 선동이 어이없으면서도 흐뭇하다.
상대를 단박에 무장해제시키는 철없고 순수한 자긍심이라 할 만하다.
그렇지, 이 정도는 돼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일 만하지! 게다가 이 말은 시인의 입을 통해 나오지 않는다.
출출이(뱁새) 우는 산골로 가 마가리(오두막집)에 살자고 하는 시인에게 나타샤가 응답하며 고조곤히(조용히) 속삭이는 말로 설정해 놓았는데,
묘하게 아련하고, 아프고, 캄캄하다.
사랑하는 그대가 이렇게 말해주는데 도리 있나.
푹푹 내리는 흰 눈 속에 응앙응앙 울며 어서어서 흰 당나귀가 와야지!
이제 당나귀를 타고 떠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이를 어째!
언젠가 눈은 그치고 말 텐데!
더러워 버린 세상에서 여전히 시인은 살아내야 하는 걸!
몽환적인 한 편의 흑백영화 같은 이 시는 그래서 더욱 애잔하다.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했고 시 잘 쓰고 핸섬한 모던 보이 백석(1912~1995)에겐 여자가 많았다.
그 중에도 통영 처녀 '란(박경련)'과 기생 '자야'의 인연은 특별해 보인다.
누런 미농지 봉투 속에 든 이 시를 백석에게서 직접 받았다고 전하는 자야 여사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서 첫눈 오는 날 길상사 마당에 뿌려달라고 유언했고, 그리 되었다.
생사를 알 길 없이 남과 북에 헤어져 살면서도 백석의 생일날이 돌아오면 금식하며 그를 기렸다는 한 여자가
첫눈 속에 돌아간 흔적이 아득하다.
여승(女僧)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고독
나는 고독과 나란히 걸어간다
휘파람 호이호이 불며
교외로 풀밭길의 이슬을 찬다
문득 옛일이 생각키움은 ---
그 시절이 조아졌음이라
뒷산 솔밭 속에 늙은 무덤 하나
밤마다 우리를 맞어 주었지만 어떠냐!
그 때 우리는 단 한 번도
무덤 속에 무엇이 묻혔는 가를 알려고 해 본 적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떡갈나무 숲에서 부엉이가 울어도 겁나지 않었다
그 무렵 나는 인생의 제1과를 즐겁고 행복한 것으로 배웠다
나는 고독과 나란히 걸어간다
하늘 높히 단장 홰홰 내두르며
교외 풀밭길의 이슬을 찬다
그 날 밤
성좌도 곱거니와 개고리 소리 유난유난 하였다
우리는 아무런 경계도 필요없이 금모래 구르는 청류수에 몸을 담갔다
별안간 뇌성벽력이 울부짖고 번개불이 어둠을 채질했다
다음 순간 나는 내가 몸에 피를 흘리며 발악했던 것을 깨달었고
내 주위에서 모든 것이 떠나 갔음을 알았다
그때 나는 인생의 제2과를 슬픔과 고적과 애수를 배웠나니
나는 고독과 나란히 걸어간다
깃폭인양 옷자락 펄펄 날리며
교외 풀밭길의 이슬을 찬다
낙사랑의 잣는 실 가늘게 가늘게 풀린다
무엇이 나를 적막의 바다 한가운데로 떠박지른다
나는 속절없이 부서진 배 쪼각인가?
나는 대고 밀린다
적막의 바다 그 끝으로
나는 바닷가 사장으로 밀려 밀려 나가는 조개 껍질인가?
오! 하늘가에 홀로 팔장끼고 우 --- 뚝 선 저 --- 거무리는 그림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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